• “엥? 혁명 전에 지구가 사라진다고?”
        2010년 09월 27일 04: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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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다간 혁명을 하기 전에 지구가 망할지도 모른다”

    90년대 중반, 뜨거웠던 학생운동의 불꽃은 사그라들고 있었다. 허나, 그때까지만 해도 곁불의 온기가 남아있어 혁명이란 말에 가슴 벅차던 시절. 어느 날 내 머리를 후려친 것이 바로 이 한 마디 말이었다.

    엥? 바꿔야 할 세상 자체가 사라질 지도 모른다고?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환경에 대한 내 인식은 쓰레기분리수거나 세제 헤어스프레이 덜 쓰기 수준에 붙박혀 있었다. 환경오염에 대해 개인들의 책임과 실천을 강조하는 정부와 기업의 프레임에 확실하게 갇혀 있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후 ‘환경현장활동’이란 걸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핵폐기장, 쓰레기 소각장, 골프장 등이 생길 예정지에 들어가 일정 기간 거주하며 각 시설들이 얼마나 지역 환경에 치명적인지를 주민들에게 알리는 일이었다.

    이는 당시 학생운동의 일부 정파들이 활로를 찾는 와중에 ‘부문운동’의 실천을 강조하며 벌인 활동이었다. 학생운동 특유의 불철저함과 느슨함으로 이후의 경과에 대해서는 지금도 잘 알지 못한다.

    ‘부문운동’으로서의 환경현장활동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오일피크’(석유정점)에 대해 접하고 ‘에너지 전환’의 회원이 되었다. 회비를 내는 것 외의 활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회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에너지 문제에 대해 뭔가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굳이 ‘나의 환경활동 약사’를 기술한 것은 아마도 많은 이들이 여전히 정부와 기업에서 유포하는 프레임에 포획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에서다. 물론, 환경과 생태에 대한 한국인들의 생각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나 동강댐 건설 반대 투쟁 등을 거쳐 부안 핵폐기장 싸움과 대운하 논란에 이르면서 이전까지 ‘환경보호’에 얽매여 있던 국민들의 인식은 깊어지고 넓어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녹색성장’이라는 구호 앞에서는 어떨까. 친환경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는 정부의 말, 혹은 앞으로 친환경 녹색경영으로 전환하겠다는 기업의 약속은 어떤가. 이 정부 들어 말의 오염이 도를 넘어섰다. 녹색이라는 말은 본래 의미가 아리송할 정도로 훼손이 됐다.

    정부가 추진하는 녹색성장의 대표사업이 원전 확충(저탄소)과 4대강 사업(녹색성장)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녹색평론>의 김종철 발행인은 언젠가 한 강연에서 현 정부가 생명파괴적인 사업을 밀어붙이며 ‘녹색’을 앞세우는 것이 혐오스러워 잡지이름을 바꿔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녹색성장이라는 저 도착적인 구호의 ‘융단폭격’에서 자유로울 이들은 거의 없다.

    <녹색평론>에서 ‘녹색’을 떼고 싶은 지경

    게다가 전 지구적인 문제라면 어떨까. 짐짓 사람들은 기후변화에 대해 염려하지만, 그런 우려들은 이내 생활의 안락함과 기술의 편리가 주는 낙관론에 파묻혀버리고 만다. 해수면이 높아져 지도상에서 지워질 위기에 처한 투발루처럼 생존 근거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긴장감이 쉬이 생길 리도 만무하다.

    한국이 아열대기후가 되고 있다고? 우산 좀 더 쓰고 다니면 될 일을 뭘 그리 호들갑인가. 더우면 에어컨이 있고, 추우면 히터가 있는데 무슨 시덥잖은 걱정인가 말이다.

    기후변화가 그럴진대, ‘기후정의’는 국내 여론지형에 더더욱 등장하지 않는, 비인기 종목이다. 어쩌다 코펜하겐 기후협약 등이 언론의 메인뉴스로 올라오기도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 체감하는 이들이 몇이나 될 것인가.

       
      ▲ 책 표지

    『착한 에너지 기행』은 점차 아리송해지고 있는 녹색의 진짜 의미와 제대로 된 실천을 찾아 전세계를 살피고 돌아본 뜨거운 기록이다.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를 가리지 않고 달린 이들의 기록은 때로 새로운 상상력으로 읽는 이의 가슴을 뛰게 하다가도, 이내 ‘자원의 저주’를 받아 비참해진 민중들의 삶을 비추어 고통스런 진실을 목도하게 만든다.

    ‘적록연대’를 통한 ‘정의로운 전환’의 가능성을 꿈꾸다가도 기후변화 협상의 정체에 이내 답답해지는 것이다.

    이 좌충우돌하는 심경변화는 책의 구성을 충실하게 따라잡은 결과다. 책은 모두 네 덩이로 쪼개져 있다. 대안에너지를 만들고 실천하는 지역/공동체들의 사례, 친환경 에너지를 위한 자원개발로 인해 피폐해지고 있는 아시아 이웃들의 사례, 유럽의 적록연대 움직임들, 다섯 번에 걸친 기후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 참관기 등이 그것이다.

    서문에서 이미 ‘자백’하고 있지만, 여럿이 함께 쓴 책인 만큼 형식이 고르지 못한 측면이 있다. 얼핏 보고서에 가까워 보이는 꼭지가 있는가 하면 기행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유려하고 감성적인 문장도 눈에 띈다. 당연히 이것은 책으로서는 약점이라 하겠지만 각자의 시선으로 현장의 활기를 전하는 다른 맛을 접할 수 있어 약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특성에 가깝다.

    원정대가 목격한 ‘기적’

    책의 전반부는 읽는 이를 두근거리게 만든다. 독자는 여기서 여러 개의 ‘기적’들을 목격하게 된다. 지열, 태양열, 빗물이용, 폐목재 바이오가스 등을 통해 자신들이 사용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고 있다는 트리어대학교의 실험, 반환된 미군기지를 풍력과 태양열 발전을 통해 재생가능 에너지 단지로 만든 모바크의 지자체-기업-주민 상생 모델(이상 독일).

    화석연료에서 100% 독립을 일궈낸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귀씽의 에너지 자립 신화, 음식물쓰레기를 이용한 바이오가스로 석유 없이 농사를 짓는 일본 오가와마치의 농부들까지.

    한국의 현실에서는 꿈같은 사례들이 현실로 눈앞에 그려지는 것을 보면서 설레였다. 불가능한 일들이 아니라는 새삼스런 깨달음. 화석연료에서 독립한다는 것이, 재생가능한 에너지를 활용해 지역을 다시 살려낸다는 것이 현실가능한 일이라는 엄연한 증명. 에너지 전환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와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결코 멀고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들 도시들은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친환경 에너지에 대한 산업적 집착은 때로 사회적 불평등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팜은 유채보다 5배나 효율이 높은 친환경에너지의 원재료다. 친환경에너지 생산의 미명 아래 벌어지는 인도네시아 팜 플랜테이션의 비극은 어째서 대안에너지 개발과 기후변화에서 정의라는 개념이 절실한지 보여주는 핵심적인 사례다.

    “인도네시아에서 진행된 팜 농장 확대는 인도네시아의 사회,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쌀 경작지마저 팜 농장으로 바뀌어 졸지에 일터를 잃은 농민들, 강 상류에 들어선 팜 농장에서 흘러나오는 오염물질 때문에 병들거나 기형이 된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어부들, 농약에 중독돼 피를 토하는 아이들, 경작지 감소로 쌀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자 싼 식량을 찾아 줄을 서는 여성들,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해 온 가족이 적은 임금을 감수한 채 팜 농장에서 일하는 광경들. 이것이 지금 인도네시아의 풍경이다.”(152쪽)

    그리고 ‘친환경에너지’가 낳고 있는 비극

    기후정의란 말은 익숙한 이들도 있겠지만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낯선 이야기일 것이다. 기후정의는, 기후변화의 문제가 ‘전 인류의 책임’으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책임소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도출된 개념이다.

    “기후변화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기후변화로 고통을 겪는 이들은 누구인가…(중략)…회의참석자들은 기후변화를 가져온 온실가스를 방출한 역사적 책임이 선진국에 있으며 기후변화로 위험에 직면하고 있는 사람들은 제3세계의 민중이라고 분명히 지적했다.”(112쪽)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이제 ‘지구가 인류에게 복수한다’는 두루뭉실한 공자님 말씀을 버려야 할 때다. 우리가 북극곰의 안위를 걱정하며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일이라 할 수 없지만, 대상을 정확하게 찾지 못한 문제인식은 해답도 엉뚱하게 내기 마련이다.

    북극곰의 안쓰러운 처지에 눈물 흘리던 이들이 결국 돌아가는 곳은 어디인가. 기껏 쓰레기 분리수거와 대중교통 이용 등으로 귀환하고 있지 않은가. 개인들의 일상적 실천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조직적으로 강에 폐기물을 대량으로 쏟아 붓는 이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을 그대로 둔 채, 당신이 매일 아침 강에 나가 쓰레기를 줍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환경을 지켜냈다고 만족한다면 초점이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것 아니겠는가.

    다시 정의로

    한국이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여전히 개발도상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경제규모는 세계 10위권을 넘보고 온실가스 배출량은 세계 9위인 한국은 여전히 지속가능하지 않은 원자력 발전에 집착하고 있으며, 원주민들의 삶을 파괴하는 팜 플랜테이션에 삼성과 SK 등 국내 대기업들의 진출이 확산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버마의 천연가스 수송관 사업은 해외 에너지 기업들과 버마 군부가 강제노동, 토지몰수, 강제이주와 마을의 파괴, 강간, 고문, 탈법적 살해 등의 범죄를 저지르는 비극을 낳았다.

    이와 유사한 프로젝트가 다시 한국의 기업들(한국가스공사, 대우인터내셔널)에 의해 재현되고 있어 국제사회의 염려가 커지고 있다. 더 이상 기후변화 문제에 있어 한국은 피해자 역할만을 연기할 수 없다는 게 점점 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독일과 영국 벨기에 등에서 수집한 적록연대의 사례들은 고무적인 내용들도 많았으나 역시, 아직까지는 넘어야 할 장벽이 많아 보인다. 물론, 아직까지 노동조합의 주요 아젠다에 기후변화나 대안에너지 분야가 포함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국내와 비교하면 부러운 진도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착한 에너지 기행』이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 급진적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충분히 근본적이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사회가 기후변화와 기후정의라는 문제를 언제까지나 백안시할 수는 없을 거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안방에서 추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어렴풋이 염려하던 일들을,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치열하게 대면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이 책은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상상매뉴얼이자, 기후변화로 인한 세계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공감의 전거다. 적록연대의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실전 매뉴얼인 동시에 기후정의를 위한 실천을 촉구하는 제안서이기도 하다.

    물론, 말 그대로 기행인지라 이 책만으로는 대안에너지와 기후정의, 적록연대 등의 세부적인 결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에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독자의 몫이다.

    좋은 책은 읽는 이의 생각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더 좋은 책은 독자의 행동을 촉발한다. 저자들이 당장 무엇을 하라고 지침을 알려주진 않는다. 그러나 끝까지 책을 읽어낸 독자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아낼 것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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