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정적, 그대가 너무 보고 싶다"
        2010년 09월 26일 01:09 오후

    Print Friendly

    K.
    2008년을 기점으로 당신과 저는 이제 연락두절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태도 모르는 겨울비가 양철지붕을 청승맞게 두들기던 부산 부곡동 선술집에서 당신과 저 사이에 식어버린 선지국과 소주 몇 병을 앞에 두고 고성이 오고 갔습니다.

    당신은 제가 교조주의와 맹동주의에 사로잡혀서 자신과 견해가 다른 모든 것들에 날선 비판만 하는 좌익소아병에 빠진 분열주의자라고 저를 향해 도발했습니다. 저는 당신들이 자신들의 신념과 조직논리에 입각하여 타 정파를 기회주의 세력으로 호도하고, 다수파가 쪽수로 당을 장악하려는 당신들의 패권주의가 이제는 너무 소름이 끼친다고 당신을 몰아 붙였습니다.

    빈 소주잔을 앞에 두고 날선 공방이 오고 갔고, 처마 아래로 흘러내리는 빗줄기는 콘크리트 바닥 사이로 고이고 있었습니다. 더욱 거세진 비바람과 양철지붕을 세차게 두들기는 빗소리와 옆자리 취객들의 뜻모를 고성 때문에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대화라기보다는 벽을 두고 서로 떠들어대는 것에 가까운 술자리가 그날 어떻게 끝났는지, 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집에는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작별인사라도 서로가 했는지도, 술값은 어떻게 치루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빗물에 번진 고추장으로 범벅이 된 와이셔츠만이, 그날의 술자리는 비루한 남자 둘이서 운동노선을 빌미로 황폐해진 삶에 끝도 모를 시비를 걸어 보았다는 것만 증언해 주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2.

    K.
    당신과 저는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 두 개의 시선을 가지고 두 개 이상의 해석을 하는 진영에 속해 있는 사람이기 이전에, 사막같은 세상을 배경으로 한 현실을 견뎌내기도 버거워서, 소주나 막걸리나 당구나 바둑이나 고스톱이나 낚시나 등산이나 여자 농담이나, 간혹 철학이나 문학이나 영화이야기 같은 것들로 비루한 일상을 버텨내는 소시민들이었지요.

    그 때 제가 술에 취해서 당신에게 운동의 전망에 대하여 비관적인 입장을 쏟아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당신에게 제가, 이 땅의 억압받는 노동자 민중이 새 세상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운동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운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나를 둘러싼 삶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에 지금도 이 길을 비척거리며 걷는 것이 아닌가라는 자괴감이 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면을 회피하고 싶지만 끊임없이 다가서는 세계의 질서라는 것을 뿌리치지 못하기에, 좌파의 윤리성이라는 외피를 입고 자기방어 기제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비겁함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이라는 사막을 무대로 관객 없는 일인극의 배우가 된 극한 고립감을 느꼈기에 대중화된 운동의 끈을 놓지 못하는 저의 이기성을 스스로 질타하였습니다.

    미칠 것 같았고 터져 나오는 속절없는 회의감이 봄날 사쿠라처럼 저에게서 만개할 때 “만일 지옥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곧 타인이다.”라는 샤르트르의 말처럼, 모든 관계가 낯선 이질적인 타자와의 관계로 비춰질 때 세상과의 소통을 포기하고 싶은 욕망이 억누를 자신이 없기에, 안락한 속물로 세상을 살고 싶다고 저는 당신에게 주절거렸지요.

    그처럼 나약한 저에게 당신 역시 그러하다고 말했지요. 다만 당신 역시 당신을 둘러싼 외적 환경으로 인해 당신의 내밀한 욕망을 뱉어내지 못할 뿐이라고 했지요. 십 년 넘게 함께 한 세월을 돌이켜보면, 전 당신같은 부류는 운동권의 도식적인 논쟁과 학습된 말투와 표정에 신물이 난 저와 함께 지낼 사람이지 절대 정파에 소속된 조직원으로의 삶을 살 수 없다고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각진 뿔테안경 사이로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당신의 이마와 동그란 얼굴 아래에서 유난히 커 보이던 당신의 목젖은 예술하는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전 제멋대로 해석을 하고 당신을 놀렸지요.

    그 당시 주로 우리는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만나, 자갈치 시장 고등어구이집에서 밥을 먹고, 남포동을 헤매고 다니다가 국도예술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그동안 서로가 보고 읽은 영화와 책에 대하여 말을 주고받다가, 술자리가 파할 쯤이 되면 시시껄렁한 여자에 관한 농담을 섞으면서 이번 주말에 등산을 가자하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곤 했지요. 그때가 아마도 당신과 저에게 가장 좋았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K.
    적어도 당신과는 정치적 논쟁은 하기 싫었고, 당신 역시 그러했습니다.

    “너와 나는 서로 다른 존재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완벽하게 소유하려 하거나 자신과 똑같은 길을 가야 한다고 강요하지 말라.”는 발타자르 그라시아의 금언처럼, 우리가 서로 간에 내밀한 어떤 욕망을 공유할지라도, 똑같은 길을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복적이기보다는 차라리 습관적으로 진행되는 당내 정파 간의 논쟁과 이합집산에 잔뜩 질려있던 저에게, 비록 당신이 다른 진영에 속해있고 저와는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의 진실한 소통 가능성에 대하여 기이하게도 어떠한 회의도 저는 품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하루가 멀다 하고 상대방을 볼모로 패거리가 형성되어 서로 헐뜯는 것이 당내 정치공학으로 포장하는 행위를 시정잡배들보다 못한 짓이라고 힐난하면서, 저는 여기에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외부적으로 표출하고 싶었던 욕망 때문에 당신에게 더욱 더 집착했던 것 같습니다. 저와 당신과의 ‘순전무결한 소통가능성’이라는 것이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지요.

    3.

    K씨.
    2004년 초가을에 저와 당신이 함께 오륙도에 갔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당신에게 물었죠. 오륙도가 어디에 있는 섬인지 아십니까? 당신은 오륙도가 해운대에 있다했고 저는 태종대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둘 다 아니었습니다.

    오륙도는 부산 남구 용호동에 있는 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륙도는 해운대에서 보이기도 하고 태종대에서도 보이기도 하지만 남구 용호2동 용호농장 아래에 위치한 이 두 곳의 중간 지점에 있는 섬이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곳에서 그 사물의 현존과 진실을 받아들이지만, 외려 그것은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에서 발생하는 오해이며 미혹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산 살면서도 저는 오륙도가 태종대 근처 섬이라 생각했었고, 당신은 해운대 근처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기실 이것은 우리가 이 자연개체를 바라본 위치지점에서 발생한 저와 당신의 오해의 기억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22호인 저 개체를 두고도 이렇게 정 반대의 오해를 우리 기억의 편린으로 간직해왔는데, 그동안 또 다른 얼마나 많은 오해들을 내 옆에 기록해 놓고 살았을까 뒤돌아 보았습니다.
    그러니, 내 자신이 가엾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 속울음이 나옵디다.

    K.
    오륙도 모르는 부산사람 없으면서도 실제 다녀가 본 부산사람 별로 없는 곳이 이곳 오륙도였지요. 이유인즉슨 오륙도로 가는 접근의 난해함 때문이었지요. 신선대 뒤 용호농장 아래로 형성된 나환자촌 밑으로 오륙도가 있었으니, 오륙도 유람간다는 것은 피서의 환상성을 좇는 우리네들에게 절대로 유쾌한 나들이코스가 될 수 없었겠지요.

    50년 세월 동안 환멸이 땅에 싹을 틔우고 자기혐오가 그 땅에 닭을 풀어 계란을 낳던 이 곳 문둥이 마을을 지나 오륙도에 가 본다는 것은, 삶의 모멸감을 켜켜이 세워두고 대면하기로 작정한 징한 사내들 아니고서야 누가 지나가보고 싶었겠습니까.

    우리가 그 때 함께 갔던 오륙도에, 마을은 무너져 내렸고 눈빛이 모호한 노인네들이 간간히 담배를 물고 앉아 있었지요. 당신은 저에게 무너진 담비탈 뒤의 집들을 바라보며 이들이 살다간 인생살이의 비애를 가늠해 보지만, 우리의 얕은 가슴팍이 무얼 가늠해 볼 수 있겠냐고 한탄을 했었지요.

    K.
    우리는 오륙도를 돌아보고 방파제 부근 횟집 테라스에 앉아 당신과 저는 전어를 안주로 소주를 네 병 정도 마셨지요. 당신은 그 때 저에게 구라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0년 작품인 ‘라쇼몽’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숲 속에서 벌어진 하나의 살인사건에 대하여 사무라이 타케히로와 자신의 아내 마사코, 산적 타조마루, 그리고 그 사건을 몰래 목격한 나무꾼의 진술이 다 다른 영화 줄거리를 말하면서, 당신은 저에게 진실을 인식한다는 것의 불가능성을 읊조렸지요.

    밀물 때 여섯 개, 썰물 때 다섯 개로 섬이 나뉘는 오륙도가 하나만의 진실을 내포할 수 없는 것처럼, 때로는 여섯 개로 때로는 다섯 개로 표상화되는 오륙도처럼, 하나의 사건에 대한 네 개의 진술이 나오는 ‘라쇼몽’처럼, 진실이라는 것이 부재한 이 시대에, 서로의 입장을 강요하기 위해서 획일화된 이즘(ism)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자고 대화를 나누었지요.

    하지만, 오륙도에서 있었던 우리의 대화 역시 진실과 조우할 수 없는 시대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나 아니 당신에게도, 한갓 정치적 노선은 다를지라도 개인적인 고민이 있을 때는 언제나 서로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지냈던 10년의 세월을 족히 넘은 우리의 우정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무엇‘이라는 확신이 있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것 역시 우리의 오해이며 착각이었습니다. 2007년과 2008년 그 두 해 동안의 당 내에서 벌어진 정치적 사태는 우리가 영원히 화해 불가능한 존재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자파의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서 어떤 파렴치한 짓도 마다하지 않고 마타도어를 퍼뜨리는 자’들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서 안기부에 동지를 팔아먹는 기회주의자’들로 나뉘어져 버린 사태 앞에서, 결국 우리는 한쪽 편에 서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처럼 서로에게 흠집을 내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는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기주의는 인간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죄악이다.”라던 구로자와 아키라의 말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속절없이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당신과 저 사이에서는 정치적 문제와 사적 관계를 엮지 말자던 우리의 다짐은 오륙도의 지평선 너머 사라지고 말았지요.

    제가 당신에게 냉담한 어조로 말했지요.
    "앞으로 연락하는 일 없을 것 같습니다."
    “………”
    "끊겠습니다."

    그 이후 우리는 서로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우리를 첨예한 대립각에 서게 했던 그 무엇도 두 개로 나뉘어져 버렸습니다.

    4.

    당신과의 관계 단절에 대해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먼저 연락할까 생각하다가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 하는 그깟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2년이라는 세월을 당신 없이 그렇게 보내고 말았습니다.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언제나 당신의 근황이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구는 외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했고, 누구는 고시공부하러 산 속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경기도 어느 소도시에서 학원강사를 한다는 소식도 들렸지만, 이것도 아니라는 소문도 들렸습니다. 당신은 내 삶 속에서, 시험시간에 빌려다 쓴 볼펜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신 소식이 너무 궁금해서 집주소라도 알아내서 찾아가보고 싶었지만, 저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홀로 사는 당신의 연락처를 알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책장을 정리하다가 1989년 집문당에서 나온 키에르케고르 선집에 꼽혀있는 당신의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색이 누렇게 변색된 그 낡은 책 속에서 발견된 사진 속에, 2003년 10월 부산대학교 앞 술집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당신이 보였습니다.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슬펐습니다.

    누군가 부재한다는 사실이, 부재한 누군가와 연관된 사물을 발견하고 가슴이 시린다는 사실이, 반드시 헤어진 첫사랑이나 망자가 된 가족이 아니더라도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 목이 메었습니다. 오늘 저는 제 속 안으로의 화를 삭이지 못해서, 당신에게 남긴 생채기가 너무 후회스러워서, 남구 용호동 이기대를 미친 듯이 헤매 다니다가 오륙도에 들렀습니다.

    아직은 사람들 간간이 오는 오륙도라고 낚시가게가 몇군데 보이고 라면과 조개탕 파는 식당도 두어군데 보였습니다. 식당과 사람들 사이에 여름 성수기의 왁자지껄함과 그 흔한 호객행위 하나 보이지 않지만, 담담히 그네들의 삶의 내력을 풀어왔던 자들의 여유로움은 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6년 전 당신과 함께 갔던 오륙도는 이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해 기울고 달이 나오면, 불이 켜지고 닭이 울고, 밥내음에 가난한 아이들이 미역을 입에 물고 집으로 갔던 용호농장 아래 문둥이 마을도 역사의 한켠으로 지워져 있었습니다.

    대신 이곳에는 오륙도 SK VIEW라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원주민들은 건설자본에게서 얼마의 이주보상비를 받고 서둘러 자기들의 고향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과 함께 한 세월도 희미한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지는 것 같은 이곳 오륙도에서 부재한 당신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K.
    당신, 어디로 갔습니까.
    해운대 쪽으로요. 태종대 쪽으로요. 아니, 아니면요 오륙도 너머로 가버렸습니까. 밀물 때 6개, 썰물 때 5개로 섬이 나뉘는 오륙도에서 5개의 섬으로 나아갔습니까. 6개의 섬으로 나아갔습니까.

    K씨.
    바라보는 곳을 떠나 바라뵈는 곳에 와서 나지막하게 물어보겠습니다. "우리 인생 제대로 살고 있는 것 아니지요?"

    연락 주십시오.
    010-6554-3438 김광모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