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청교육대라는 대학도 있나요?"
        2010년 09월 25일 07: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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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오래 참고 견디는 어머니의 밤/ 낯선 총칼이 주둔하는 거리마다/ 찢기운 상처를 덮으며 흘리는 어머니의 눈물이 넘치고/ 분노는 우리의 가슴 저 밑바닥/ 귀환하지 않고 있는 북만주 대륙의/ 차가운 흙 위에 내려 선다.”(김진경 시 ‘한국사’ 중에서) 

       
      ▲삼청교육대 훈련 모습. 

    장미꽃 바라볼 틈도 없이 시작된 대학생활

    대학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창 젊은 나이를 즐길 시간도, 막 피기 시작한 장미꽃을 볼 틈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무겁게 침묵했다.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된 것은 그 후 누군가 보여 준 <Newsweek>라는 영어 주간지에 실린 사진과 글을 통해서였다.

    정치가 무엇이고, 정권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쉽게 죽일 수 있는 것일까? 정확한 통계는 여전히 모른다. 광주에 대해서는 이후 얘기를 통해서,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더 자세히 알게 되고 그럴수록 분노를 크게 가지게 되었다. 촛불집회에 이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면 과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을까? 

    문무대 군사훈련을 마치고 돌아 온 뒤 긴 휴교령이 시작되었다. 너희가 휴교령이 무언지 알까? 눈이 많이 오든가, 홍수가 나면 학교를 쉬게 할 때 정부는 휴교령을 내린다. 그런데 당시는 그게 아니었다. 대학생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학교 문을 정부가 일방적으로 닫아 버린 것이었다. 같은 단어도 시대에 따라 다른 법이다. 학생들이 아예 모이지도 못하게 휴교령을 내려놓고 전두환은 광주시민을 죽이고, 대통령이 되었다. 

    전두환, 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꾸게 만든 그는 그렇게 등장했다. 나는 한 번도 전두환을 대통령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동족을 죽인 살인마를 도저히 대통령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1980년 9월 1일은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한 날이다.

    1979년 12월 12일 소장에서 9개월여 만에 두 계급이나 특진한 그는 8월 22일 대장으로 예편한 뒤 불과 닷새 만에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박정희가 만든 유신헌법 아래서 생겨 ‘거수기’로 불린 통일주체국민회의로부터 대권을 넘겨 받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혼자 출마했으니까.

    감옥에서 받은 삼청교육

    기권 1명을 제외한 2,524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웃기는 얘기다. 그때 찬성표를 던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정치권의 주변에 있거나 부자로 잘 살고 있을 거다. 한 번도 과거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게 우리나라의 현대사이니까. 

    또 무엇을 했을까? 전두환은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광주항쟁을 진압하자마자 ‘삼청교육’대라는 것을 만들었다. 박정희도 그랬었다. 4.19 혁명을 누르고 쿠데타를 하자마자 이후 불량배들을 체포하는 것으로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삼청교육대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겠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아마 너희 또래인듯한 사람이 “삼청교육대라는 대학도 있나요?” 라고 질문을 했더구나. 

       
      ▲네이버 지식인에 올라온 질문. 

    그만큼 세대 차이가 있는 거겠지? “군대, 낙성대, 청와대가 대학이 아닌 것처럼 삼청교육대 역시 학교가 아닙니다”라고 누군가 친절하게 답을 달아 놓았다. 사실 삼청교육대는 무시무시한 얘기다. 마치 영화 ‘실미도’가 이제야 북파공작원이 있었던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삼청교육대라는 단어도 그동안 감춰지고, 잊혀져 있었다. 

    전두환은 1980년 8월 4일 ‘계엄포고령 13호’ ‘삼청 5호 계획’을 발표하여 “폭력범과 사회풍토 문란사범을 소탕”하겠다고 나섰다. 사회악을 뿌리 뽑겠다는 거였다. 나도 82년에 감옥에 가서 삼청교육이란 걸 받아 보았지만 그건 장난에 불과했다.

    불과 5개월 동안 6만755명을 체포하여 A급 3,252명은 군법회의에 회부, B·C급 3만9786명은 4주 교육과 6개월 복역 후 2주 교육하여 훈계 방면, D급 1만7,717명은 경찰서에서 내 보냈다.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새문안교회를 벗어나다

    그 결과는? 1988년 국회 국방부 국정감사 발표에 의하면 현장 사망자가 52명, 후유증으로 죽은 사람이 397명, 정신장애 등 상해자 2,678명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런 무시무시한 역사가 80년에 진행되었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너무 무서운 얘기다. 

    그 때쯤 나는 밤이면 끝없는 계단에 굴러 떨어지고 몽둥이를 든 전경들에게 쫓기는 악몽을 가끔 꾸기도 했다. 광주에 대해 알면 알수록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다. 그 동안 다니던 광화문의 새문안 교회를 벗어난 것도 그 때쯤이다.

    그 즈음의 새문안 교회는 대학 선배들 대부분이 구속되는 것을 당연시했던 분위기고, 매주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었다. 선배들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반대 투쟁으로 많이 구속되었었다. 거기서 많이 배웠다. 그러나 효과적인 저항을 위해서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중요할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리고 본격적으로 학교에 있는 사람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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