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폰, 진부한 희망 & 진보신당
    2010년 09월 25일 01: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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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통신업체들의 근시안적인 사업 풍토로 인해 한국의 IT산업이 “갈라파고스가 되어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했고, “삼성전자가 아이폰보다 스무배 더 많은 휴대폰을 팔면서 영업이익은 두세 배 적게 나는” 비밀을 깨닫게 된 정치인이 있었다.

어울리지 않은 두 가지 에피소드

무선통신 “산업”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던 이 정치인은 “출근하는 길거리에서 휴대폰으로 이메일을 확인해보고 답장을 보내며 업무처리를 하는” “뉴욕시민들”의 모습을 본 후 당직자들에게 아이폰을 지급하였다.

   
  ▲ 지난 6.2지방선거에서 무선인터넷 정책을 제시한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사진=진보신당)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어느 정당은 ‘휴(休)! 한국사회’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노동시간 단축, 공휴일 보장, 적절한 휴식이 보장되는 노동환경”이 이 슬로건의 주요 내용이었다. OECD 평균 노동시간인 연간 1,769시간을 훨씬 웃도는 연 평균 2,316시간이라는 노동시간으로 지쳐가는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쉴 시간을 주자는 것이 기본 전제였다.

왠지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에피소드는 아이러니 하게도 한 정당에서 발생한 일이다. 그 정당은 진보신당이었고 그 정치인은 노회찬 대표였다.

물론 노회찬 대표가 당직자들에게 아이폰을 나눠주면서 시도 때도 없이 이메일 확인하여 업무처리를 할 것을 요구하거나 스마트폰 위치추적 기능을 이용하여 당직자들의 근태를 확인하려 하진 않았을 것이다(후자는 마땅히 그러했을 것으로 확신하나 전자에 대해선 확신하기 어렵다).

또한 진보신당의 공약은 그 자체로 이 사회에 하나의 의제를 제시하였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쉴 수 있는 사회, 오래전 버트란트 러셀이 조용히 찬양했던 게으름을 하나의 권리로 누릴 수 있는 사회(물론 공약에서 대놓고 게을러지자고 말하진 않았다)라는 의제.

진부한 희망, 진부한 결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건이 하나의 정당, 그것도 진보정당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어색한 느낌을 갖게 한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노동의 확장과 쉴 수 있는 사회. 이 두 이질적인 개념은 한 입에서 동시에 주장될 수 있지만 공존의 가능성을 납득시키기는 어렵다.

스마트폰의 폭발적인 보급과 더불어 정치영역에서도 스마트폰에 관한 관심도는 매우 높아졌다. 특히 트위터라는 소셜미디어와 스마트폰이 결합하면서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한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양적인 면은 물론 질적인 면에서까지 정보의 공유와 참여의 폭이 넓어졌다. 따라서 정치인은 물론 정치에 관심을 가진 수많은 대중들은 스마트폰이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일단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희망은 거듭되는 데자뷰를 일으킨다. 지난 천년 이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쿠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보급되었을 때, 정치적 국경을 없애버릴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전보가 등장했을 때, 엥겔바트가 텍스트들의 공간적 한계를 링크로 무너뜨릴 때도 그랬으며, 월드와이드웹이 온라인을 모니터에 구현하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희망은 부활했고 지속되었으며 잠시 가라앉았다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제 주제가 스마트폰으로 바뀐 채 오래된 희망은 다시 부활한다.

진부한 희망에 대해선 진부한 결론이 제시된다. 언제나 그랬듯이, 새롭게 등장한 그 기술을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것, 그것이 교과서적인 결론이 된다. 새로운 소통의 도구가 생겼다. 이 소통의 도구를 이용하여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를 찾자. 이걸로 이야기 끝?

그러나 그렇게 쉽진 않다. 각각의 기술이 등장했던 시대적 배경, 그리고 그 기술이 새롭게 만들어내는 문화적 유형이라는 것은 마치 똑같은 논의와 똑같은 희망 그리고 똑같은 결론이 나올 것 같은 이 반복되는 현상에 저마다의 차별성을 찾아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스마트폰과 스마트워크

스마트폰에 관련된 함의를 낱낱이 분석하는 것은 많은 시간을 소요할 뿐만 아니라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능력이 닿는 범위 안에서 논의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 협소한 능력의 한계 안에는 대부분 회의가 자리하고 있음을 먼저 밝혀야겠다.

이 새로운 기술, 즉 스마트폰(여기에 더하여 스마트폰을 이용해 시너지를 얻게 된 소셜미디어)이 엄청난 속도로 가히 폭주하듯이 범람하게 된 현상 자체에 대해 평가하는 수고는 사양하겠다. 어차피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더 크므로.

애초 아이폰 막아놓고 스마트하지 않은 국산폰을 스마트폰이라고 우기면서 팔아왔던 삼성을 비롯한 기업들의 행태를 돌이켜보면서, 소비자들을 언제까지나 봉으로 생각하며 베타테스터 정도로 취급해왔던 이들이 허둥대는 모습을 보며 깨소금맛을 느끼는 정도의 감정이 있을 뿐이다. 무선통신망 확보를 위해 사용자에게 부담되었던 이용비용과 국민이 부담한 세금이 이제 제 값을 좀 하지 않을까 하는 시큰둥한 기대가 조금 더해졌다면 더해졌을까.

정치적인 영역―이것 역시 그다지 명확한 구획은 되지 못할 테지만―에 한정하여 간단히 이야기를 해보자. 진보신당의 묘하게 삐걱거리는 에피소드들을 기억할 때, 정치적 영역에서 스마트폰이 가져올 전혀 상반된 측면의 가능성들에 대해 진보신당은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다.

예컨대 스마트폰 보급과 더불어 급속하게 논의되고 있는 소위 ‘스마트 워크(smart-work)’는 노동환경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며,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어떤 대응이 필요할 것인지를 궁리하다 보면 진보신당의 에피소드가 왜 문제가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스마트워크와 재택근무

이 논의는 과거 재택근무가 노동환경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해 진행되었던 논의와 아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간단히 회고하자면, 재택근무를 긍정적인 것으로 바라보았던 측에서는 이러한 근무형태가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직업활동과 일상생활을 결합시킴으로써 사회적 소외를 막을 수 있고, 사업자의 부담을 줄임으로서 경비절감의 효과를 얻을 수 있으며, 특히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경우 상당한 이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던 측에서는 정규의 노동시간에 대한 제약이 없어짐으로 인해 노동시간이 늘어나게 되고, 일상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노동에 함몰될 위험이 있으며, 사업장에서 향유할 수 있는 복리후생에서 제외될 수 있고, 특히 여성의 경우 육아와 가사노동 등 재생산영역에서 더 많은 고통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논의의 구조는 ‘스마트 워크’ 논의에 그대로 적용된다. 약간의 차이를 가질 수 있지만 근본적인 것은 ‘스마트 워크’의 문제나 재택근무의 문제나 다를 것이 없다. 예컨대 스마트폰을 통한 ‘스마트 워크’의 경우 위치 추적이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이것은 재택근무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집에 있는지 없는지 네트워크를 통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여기서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 것은 ‘스마트 워크’가 되었든 재택근무가 되었든 그 부정적인 측면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 것인가이다.

법률의 정비를 통해서 혹은 행정지도를 통해서 줄일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줄일 수 없는 것인지 하는 것을 검토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틈타 비정규직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장치마저 무력화시키려는 자본의 준동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를 검토해야 한다.

그런데 엉뚱하게 이제 관전해야 할 포인트는, 언제 어디서든, 이동 중에도조차 이메일을 확인하고 업무를 볼 수 있다는 기능에 반해 당직자에게 아이폰을 나눠준 노회찬 대표가, 똑같은 기능에 반해 직원들에게 아이폰을 지급했던 어느 기업 총수와 어떻게 입장을 달리할 수 있는가이다.

스마트폰에 대한 관심과 노동권

기업의 영업이익에 신경써야할 뿐만 아니라 서울시민의 정보기본권까지 챙겨야 했던 노회찬 대표의 고뇌는 충분히 이해가 되나, 바로 이 부분에서 또 다른 혼란을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서울시민들의 정보기본권을 생각한다면, 특히 이 정보기본권 향유를 위한 가장 원천적인 전제로서 정보격차의 해소를 목적했다면, 혹시 노회찬 대표가 서울시장이 되었을 때 차상위계층 이하의 서민들에게 아이폰 무상지급을 했을까? 일단 지방선거 공약에서는 이런 내용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혹은 열악한 아이폰 생산라인에서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팍스콘 노동자들을 대신해 잡스에게 강력 항의하겠다는 공약은 넣을 생각이 없었을까? ‘휴! 한국사회’를 ‘휴! 만국의 노동자’로 확장할 국제주의적 관점은 지방선거 공약에 넣기보다는 대통령 선거 공약에 넣을 만한 것이긴 하나, 최소한 노동권에 대한 관심이 여기까지 확장될 수는 없었을까?

실제 스마트폰이 가져올 정치영역의 변화라는 것은 바로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즉 말 그대로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영역이 의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영역이 정치적 의제로 해석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스마트폰이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받아들여야 할 진보신당은 아직까지 명료하지 못한 행보를 보이고 있거나 진지한 천착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진보신당만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보신당에 대한 비판(혹은 노회찬 대표에 대한 비판)은 진보신당이 그나마 스마트폰과 관련된 일련의 정책이나 대안을 겉으로 드러내기라도 했었다는 점에서 다른 정치조직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현재 일반적인 정치인들의 스마트폰 사용은 아직까지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함의를 충분히 인식한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판단된다. 이것이 현실의 변화가 유발한 과잉된 기대에는 편승했으나 정작 그 변화를 감당할 만큼 스스로를 진전시키지 못한 정치의 한계다.

스마트폰이라는 무기로 무엇을 할 것인가?

오히려 가능성은 일반 사용자들에게서 발견되는데, 이들은 이미 스마트폰을 이용해 트위터로 실시간 사건을 공유하면서 정치적 가능성을 양산한다. 물론 그것이 어느 정도 현실에 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예단하긴 어렵지만 스마트폰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특히 정치적 가능성은 사용자 일반에게서 그 긍정적인 힘을 더 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가능성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이다.

스마트폰은 이전에 나타나 세상을 변화시켰던 수많은 기술발전의 전례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세상의 어떤 변화에 기여할 것이다. 여기까지 예측은 가능하지만 그 이상 구체적인 예언은 할 수 없다. 스마트폰이 정치영역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스마트폰 자체가 그러한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스마트폰이 그 변화를 위한 매개로 훌륭하게 활용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게다.

사건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해석될 것이며 재발견 될 것이다. 의미를 가지는 것은 사건 그 자체이지만 여기서 스마트폰은 그 의미를 전파하고 확산하며 재구성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스마트폰은 이전의 모든 통신매체와는 다른, 즉 라디오나 TV, 혹은 데스크탑이나 노트북으로 접속해야 했던 인터넷과는 차별화된 기능을 통해 그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거듭, 이 대목에서 오래된 결론을 반복하자면 그 수단을 손에 쥐었으니 이제 그 수단으로 뭘 할 것인지, 좀 더 나가자면 어떤 세상을 만드는데 스마트폰이라는 무기를 사용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물론 아무도 그 세상이 어떤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다.

한편 여기서 어떤 세상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우리 앞에 현현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들의 발생이 기껏 노력해서 그려놨던 우리의 그림을 완전히 다른 그림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결정할 수 있다. 법철학의 대가 라드부르흐가 했던 말을 패러디 하자면,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발견할 수 없다면, 미래가 어떠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이 납득할 수 있는 의제를 창출하고 대중으로 하여금 그것을 유통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누가 선점하느냐가 다음 문제가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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