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수부대에 진압된 문무대 군복시위
        2010년 09월 23일 11: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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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 광주(사진=5.18 기념재단) 

    “어제 나는 내 귀에 말뚝을 박고 돌아왔다/ 오늘 나는 내 눈에 철조망을 치고 붕대로 감아 버렸다/ 내일 나는 내 입에 흙을/ 한 삽 처넣고 솜으로 막는다//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나는 나의 일부를 묻는다/ 나의 증거 인멸을 위해/ 나의 살아남음을 위해” (황지우 시 [그날그날의 현장 검증] 전문) 

    교련의 시대

    서울역 데모를 마치고 바로 신입생 남자들은 모두 군사훈련을 받으러 군대에 입소하게 되었다. 그 때는 모든 대학교의 남학생들은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지금은 모두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교련시간이란 게 있어서 그 시간에는 수업대신에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교련선생은 주로 군인 출신들이 맡았다. 우리들은 주로 교련 선생에 대해 “똥개” 혹은 “미친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만큼 지독했다. 1학년 때는 문무대라는 곳으로, 2학년 때에는 전방부대에 입소하여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참고]

    다른 사람의 글 – 대학 장악 위해 군사문화 강화

    문무대 교육은 전국 대학 1년생을 대상으로 실시된 것인데, 10일 동안 남한산성 근처(육군행정학교)에 입소해 각개전투와 화생방, 유격훈련을 받는 군사교육이었다. 당시에는 2학년까지 2년 간 교련을 수강해야 했기에 교련복을 입은 대학생들을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대학을 장악하기 위해 군사문화를 강화하려는 분위기였기에 교련시간에 복장통제도 심했다. 종아리에 각반을 차고, 운동화를 신어야 했으며, 머리에 교모(베레모)를 써야 했다. 복장검사와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실랑이가 교련시간에 자주 있었고 대규모 집단 항의의 경우 강제징집으로 군대로 끌고 갔다(교련반대 강제징집).

    휴교령이 조만간 있을 것이라는 소문과 군사교육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는 이유 등으로 인해 입소 반대 데모가 있긴 했지만 그 수레바퀴를 바꾸지는 못했다. “학교 수업의 연장이므로 휴교령이 내려지면 당연히 퇴소한다”라는 전제를 달고, 문무대라는 곳에 입소하여 군사훈련을 받게 된다.

    그러던 중 우리는 계엄령 확대 선포와 휴교령 소식을 군복을 입은 채 들었다. 수업이 없어졌으므로 당연히 퇴소하는 게 상식이라고 생각한 순진한 우리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시위를 문무대 교정에서, 그것도 군복을 입은 채로 하게 된다.

    열을 지어 운동장을 돌며 구호를 외치자 당황한 문무대 측은 급기야 학교 총장을 불러오게 되고, 우리는 운동장에 앉아 있었다. 마침 하늘을 수놓으며 낙하훈련을 하던 공수부대의 아름다운 낙하산을 보고 있었다. 어느 새 불려 왔는지 대학교 총장이 나타났다. 

    문무대로 불려온 총장

    "이러면 정말 큰 일 난다. 내가 책임질 테니 당장 중지하고, 빨리 숙소로 들어가라" 

    총장은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절박하게 말했다. ‘택도 없는 소리’라고 코웃음을 치는 순간 ‘부릉부릉’하며 정문으로 트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18대의 트럭은 연병장 뒤에 차례로 섰다.

    차가 서자마자 총 끝에 대검을 단 공수부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절도 있고, 힘 있는 구호 소리만으로도 우리는 겁먹기 충분했다.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내무반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잽싼 행동은 아마 없을 거다. 이후 주동자들이 그들에게 불려가서 곤욕을 치렀다는 얘기를 비참하게 들어야 했다. 

       
      ▲연행되는 젊은이들.(사진=5.18 기념재단) 

    나는 밥을 먹으러 가며 그들을 본적이 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또 저지를까봐 며칠 동안인가 모든 곳에 그들이 있었다. 핏발 선 눈, 얼굴엔 도무지 표정이라는 게 없었다. 도열해 있던 그들 중 하나가 갑자기 픽 쓰러지기도 했다. 거의 잠을 안 재운 상태라는 수근거림이 있었다. 나는 살벌하다는 게 무엇인지를 그 때 알았다. 뒤에 그들이 광주에 투입되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 땐 몰랐지만 역사적으로 본다면 광주에서 형제들이 쓰러지고 있을 때 우리는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던 셈이다. 문무대 교육을 마치고,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휴교령이 내려질지 예상하지 못하고 도서실 사서함에 책을 맡긴 게 있어서 그 책을 찾아야 했다. 찾아간 학교는 빨간 유니폼을 입은 공수부대의 몫이었다. 탱크까지 교정에 버젓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자유롭게 거닐던 교정을 장악하고 잔디 위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정문을 지키고 서 있던 철모에 하얀 띠를 맨 계엄군에게 학교 방문의 이유를 얘기하고, 중문(中門)을 통해 들어가라는 답변을 듣고 돌아서는 순간, 뒤에서 총을 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활기 넘치던 학교 앞 거리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탄압, 저항, 고립 그리고 아름다운 기록들

    "사람이 사람을 보고 처음으로 두려움과 무서움을 느낀 날"이라고 어딘가에 써 놓았던 것 같다. 그 때까지도 나는 소문만 들었지 저 남쪽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를 정말 하나도 몰랐다. 

    광주에 대해서는 많은 책과 증언이 나와 있으니까 그걸 보는 게 낫겠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게 아니니까.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두자. 

    서울의 봄이 비극적으로 끝나가는 시점에 광주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영웅적’인 투쟁을 시작되었다. 5월  18일 오전 9시 전남대 정문 앞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를 공수부대가 잔인하게 진압했다. 이에 분개한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광주 시민 전체의 항쟁으로 발전했다.

    공수부대의 학살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자 시민들도 파출소 등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하기 시작했다. 5월 21일에는 시민들이 광주를 장악했다. 시민들이 집에서 밥을 해 오고, 부상자를 앞을 다투어 치료하던 때의 아름다운 기록들이 남아있다. 

       
      ▲시민군과 박수치는 시민(사진=5.18 기념재단) 

    계엄군의 포위 속에 고립된 광주 시민들은 다른 지역 시민들의 궐기와 미국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나 언론은 광주 시민들을 불순분자에 의해 사주 받은 폭도로 몰았다. 미국은 오히려 계엄군의 광주진압을 승인했다.

    5월 27일 새벽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광주로 진입했다.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잠시 저항하였으나 중무장한 계엄군에 의해 차례차례 사살되었다. 광주시민들의 처절하고 영웅적인 투쟁은 수많은 희생을 낸 채 끝났다.

    당시 시위를 할 때면 주로 불렀던 노래가 있다. 광주에 대한 기억을 담은 ‘오월의 노래’라는 것이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실려 어디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산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고통없이 어떻게 헤치고 나가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여기다 사람들이 가사를 더 만들기도 했다.

    “대머리야 쪽발이야 양키놈 높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 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나는 너희들이 지금도 가슴이 저며오는 5월 광주를 기억하기 위해 언젠가 반드시 한번은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아주길 바란다. 어제 없이 오는 오늘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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