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의 계란들, 바위를 깨다"
        2010년 09월 19일 10:0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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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긴 밤이 끝나고 새벽이 오려 하고 있습니다. 쇠창살 너머로 새벽별이 스러지고 이제 막 동이 트는 능선마다 달려오는 사람들을 보세요. 내일을 살기 위하여 오늘을 죽는 새벽의 사람들을 보세요. 이슬에 젖은 발자국 소리가 지금 산야를 울립니다.” (송기원 시 ‘편지’ 중에서)

    "화려한 ‘말년 휴가’ 중인 전두환"
     
    "광주"
    우리 세대의 삶은 80년 5월 광주를 빼 놓고 말할 수가 없다. “빛 고을”이라는 우리말 풀이처럼 광주는 우리 세대 사람들이 살아야 했던 어둠 속의 한줄기 ‘삶의 빛’이었다. 통계에 의하면 80년부터 83년 사이에 집회 및 시위로 구속된 학생들의 숫자만 1,4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모두 광주항쟁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 시기를 겪었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 광주라는 부채를 안고 살았다고도 할 수 있다. 

       
      ▲영화포스터.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있다. ‘화려한 휴가’는 전두환이 광주시민을 죽이러 군인들을 보내면서 붙인 작전명이었다. 
     
    촛불 시위와 마찬가지로 민주화를 바라면서 평화롭게 집회를 하던 학생들과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하면서 군인들은 그것을 ‘화려한 휴가’라고 했다. 한번 생각해 보자. 너희가 촛불집회를 하고 있는 데 갑자기 군인들이 나타나서 총을 쏘았다면 어땠을까?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에서 전두환을 비롯한 군부세력이 가졌던 역사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반란군일 뿐 같은 나라의 백성’이 아니었다.

    이들은 15년 뒤인 95년 ‘12․12, 5․18 특별법 제정’으로 무기징역 등 법의 심판을 받았지만, 97년 특별사면을 받아 30년이 지난 지금 인생 말년의 ‘화려한 휴가’를 보내고 있다.

    전두환은 2010년 1월 300여명의 하객들과 팔순잔치를 벌였고, 학살을 지휘한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발전기금 이사장을 맡고 있고, 보안사 정보처장이던 권정달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자유총연맹 총재를 지내기도 했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모습이다. 

    역사는 내게 낭만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나는 그 해 대학생이 되었다. 나이보다 한 해 늦긴 했지만 대학생이 된 나는 지긋지긋한 대학 입시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잘 읽지도 않는 『한국문학사』를 일부러 옆구리에 끼고, 갓 배우기 시작한 담배를 물고, 짐짓 심각한 척하는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 신입생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물줄기는 이런 낭만을 허용하지 않았다.

    내가 입학하기 바로 직전인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 거의 20년 가까이 군사독재를 해 오던 압제자가 갑자기 죽자 많은 사람들이 당황해하고 심지어 우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곧 민주주의를 외치는 수많은 물결이 온 나라를 흔들었다.

    물론 전두환이 권력을 잡기 위해 12월 12일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비상계엄령이 유지되는 상황이었으나 대학가는 실로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울의 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소련에 대항해서 싸웠던 ‘프라하의 봄’에 빗댄 표현이었다. 진실로, 진실로 봄이었다. 온 강산에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었다.
      
    그러나 역사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이지만 모든 지배세력은 ‘변화’를 싫어한다. 시위와 집회, 불만의 폭발을 두려워한다. 그만큼 그들은 기존의 사회에서 혜택을 받고 살았기 때문이다. ‘기득권 세력’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불편함을 못 참는다. “그냥 이대로”가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이고, 따라서 보수적이다.

    그러나 총칼의 억압 때문에 숨죽이고 살았던 사람들은 그와 다르다. 당연히 변화를 추구하고, 보다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군부독재는 수많은 귄위를 앞세운 질서와 반공 위주의 교육을 남겨 두었다. 당시에는 학생회라는 게 없었다. 학교마다 학도호국단이라는 게 그걸 대신했다. 군복과 비슷한 교련복이라는 것을 입고 학교에서도 군사교육을 받아야 했다.

    하긴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해야 했고, 오후 5시경 국기 하강식에는 가던 길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고, 극장에서도 영화를 보기 전 애국가를 들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사회는 모두 군대식으로 운영되었었다. 

    반복되는  비극, 전두환의 등장
     
    민주화가 되자 대학생들은 금지되어 있던 학생회를 부활시켰고, 4월부터 본격적으로 학원 내에 남아있는 유신독재의 찌꺼기들을 걷어내는 싸움에 들어갔다. 비민주적 학칙 개정, 학내 언론의 자율성 보장, 경찰 정보원의 학교내에서의 감시 활동 금지, 학원의 족벌 운영과 재단 부조리 척결, 어용교수 퇴진, 병영집체훈련 철폐 등 그동안 억눌려왔던 민주화의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시끄럽게 여긴 대학 재벌들은 교수와 직원들을 동원하여 곳곳에서 마찰이 일어났다. 당연히 수많은 대학교에서 대립이 생겼고, 자연스레 집회와 시위가 계속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입학하자마자 데모를 구경하게 되고, 자연스레 시위에 참가하게 되었다. 거대한 시대적 흐름이 개인을 압도한 그런 시절이었다. 그리곤 5월이 되었다.
     
    은지야. 너희로서는 조금 어렵겠지만 당시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상황을 볼 필요가 있다. 1980년을 전후로 하여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의 양상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이 계속 이어졌다. 박정희가 죽으면서 20년 가까운 군사독재정권이 끝났다. 당연히 유신헌법은 폐기하고, 민주적인 헌법을 다시 만들고 그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해야 했다. 그러나 국무총리 최규하는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면서 당시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박정희가 뽑아 놓은 사람들에 의해 ‘체육관 투표‘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실세가 아니었다. 1979년 12월 12일에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리고 1980년 4월 14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법률상 겸직이 금지된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되었다. 중앙정보부는 지금의 국가정보원보다 훨씬 더 많은 권력을 최고의 억압을 위한 장치였다.

    한편 박정희의 군사독재정권과의 투쟁에 공동으로 협력하며 싸워왔던 주요 정치인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서로 등을 돌린 채 정권장악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87년에도 반복되는 비극적 역사는 이미 이 때 시작되고 있었던 셈이다.

    그날의 감격은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되고

    쉽게 말하자면 민주화 세력은 분열된 채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에 독재 권력을 이어 가려는 세력이 국민들의 눈치를 보면서 하나씩 하나씩 차분한 준비를 하고 있는 1980년이었다. 이것을 막으려고 나선 것은 학생, 노동자, 민중들이었다. 5월이 되면서 그동안 학내 민주화에 몰두해 있던 학원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5월 14일 약 7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전두환 물러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5월 15일로 기억되는 그 날, 우리는 흑석동에서 서울역까지 거리 시위를 했다. 비가 왔던 것 같다. 여의도를 거쳐 가는 그 먼 길을 촛불집회처럼 평화롭게 행진했다. 물론 교문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다. 우리가 누리는 대부분의 평화로움이란 대부분 다른 누군가의 희생의 결과일 때가 많다.

    내가 들어간 학과에는 여학생이 7명 있었는데 한명도 빠지지 않고 같이 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변화에 대한 열망은 ‘객관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10년 뒤에 그 중 한 명의 여학생이 너희들의 엄마가 된다. 물론 당시에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1980년 5월. 서울역 광장.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서울역은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차 있었다. 기록을 보면 당시 서울역 광장에는 십여만 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전두환 퇴진하라!’, ‘비상계엄령 해제하라!” 라고 외치고 있었다. 각기 다른 학교에서 우리처럼 모두 서울역을 향해 행진해 온 것이다. 상상해 봐라. 너희가 각자의 학교에서 친구들과 걸어서 시청광장까지 촛불 때 외치던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해서 한 곳에 모였다면 그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 

    그 날의 집회를 이제는 ‘서울역 회군’이라고 말한다. 명나라를 공격해야 할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거꾸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것처럼, 그렇게 군대를 돌리는 걸 회군(回軍)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그날 집회를 계속하자는 입장과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더 준비하고 투쟁하자는 입장이 있었던 거다.

    촛불 때도 심심찮게 우리 내부에서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으니 쉽게 이해될 것이다. 아무튼 그날 투쟁지도부는 “시민의 호응이 적은 상태에서 심야에 군부대와 충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시위를 중단하고 집회를 해산하고 말았다. 그 때의 투쟁 중단의 옳고 그름은 역사적 평가에 맡겨두자. 

    [참고]

    다른 사람의 기록 – 서울대 80학번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중에서

    “하오 4시 서울역 2층 그릴에서 각 대학생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학생대표들은 서로 엇갈린 주장을 교환했다.

    “경찰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중앙청 방면으로 진출하자” “시민들 반응도 그렇고 군대가 출동했다는 정보도 있다. 싸움을 계속하면 유혈사태가 발생할 거시다. 일단 여의도 광장으로 퇴각하자” “아니다. 현재의 농성장인 서울역 광장에 계속 머물자” 결론이 나지 않자 20여명의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현장에 있던 서울대의 마이크로 버스에서 연석회의를 가졌다.

    여기서 연좌데모는 밤 8시 30분에 끝내고 학교로 돌아간다는 결론을 보았다. 서울대 학생회장(심재철이다)이 마이크로 버스위에 올라갔다. "지금 이 시각에서 우리 회장단은 각 대학의 특수한 상황보다는 .. 책임감있는 행동을 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지금부터 각 대학은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부르고 힘차게 학교로 돌아가자".

    그리고 16일은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을 들고 가두홍보에 들어감. 시위에서 가두홍보로의 전환. 17일 토요일 평온. 18일 일요일 비상계엄 전국일원으로 확대.그리고 전남대 시위. 5.18의 시작
     

    "심재철이란 사람은 기억해두자"

    다만 그 때 투쟁을 중단하자고 했던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이라는 사람만 기억해 두자. 현재는 한나라당 국회의원이다. 촛불집회의 원인이 된 광우병 쇠고기가 문제되자 “광우병이 걸린 소라 할지라도 등심 스테이크는 먹어도 안전하다”고 시식회까지 열었던 그 사람이다. 최근에는 역사의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국가보안법을 강화하는 법안을 발의해하기도 했다.

    웃기는 역사지?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투쟁하던 사람이 이제는 그 군사독재 정권이 만든 당에서 국회의원까지 하고, 국민들의 뜻을 저버리는 일을 앞장서서 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후에도 틈나는 대로 그런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하고 넘어가자.

    아무튼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간 틈을 전두환을 비롯한 군부가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학생들의 총궐기에 움찔했던 전두환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다간 정권 탈취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확대했다. 탱크로 무장한 군대를 주요 도시에 투입했고 전국의 대학에 휴교령을 내림과 동시에 이화여대 회의장을 급습해 학생 대표들을 연행했다. 그리곤 이어서 광주항쟁이 생기게 되는 거다.
     
    은지야. 역사를 보면 어느 시점에선 ‘칼날 위의 판단’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 판단에 따라 역사는 달라진다. 투쟁을 계속해야 하는지, 아니면 후퇴해야 하는지는 항상 고민이 남는 부분이다.  아무튼 그날 서울역 ‘회군’으로 인해 이어 5월 18일부터 광주에서의 대량 살상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김대중과 김영삼이 5월 16일 회동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동시에 사전에 작성한 명단에 따라 김대중을 비롯하여 정치인, 재야인사,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박정희의 사망 이후 민주화의 꿈에 부풀었던 서울의 봄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나도 니 나이 때는 그랬어, 임마"라는 말
     
    아직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던 나는 그런 것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역사의 흐름을 알지 못했다. 때로는 자기가 서 있던 자리가 역사적 자리였음을 한참 뒤에 가서야 아는 경우가 있다. 서울역에서의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버스에 타 있던 승객들이 내 몸에서 나는 최루탄 냄새 때문에 기침을 하고 난리가 났다. 나는 미안해서 맨 뒷자리에 앉았다. 혀가 꼬부라진 채 그 사람이 말했다.
     
    "너 데모했구나.. 임마, 나도 니 나이 때는 그랬어" 
    지금도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다. “내가 말야 니 나이 때는..”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 말이 되게 싫었던 것 같다. 그 사람처럼 살지는 않겠노라고 결심하고, 일기장에 썼던 기억이 있다. 추억은 좋은 것이다. 어쩌면 인간만이 유일하게 기억을 가지고 과거를 반추하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도 젊었을 때는 그랬노라"고 얘기하는 사람만큼은 되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항상 현재이고, 현실이 중요하다.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 한 때 무엇을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도 ‘과거 운동의 경력을 팔아 현재의 출세’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것이 역사의식이라는 점만 기억해 두자. 그러고 보면 때로는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함’이 평생을 좌우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김수영이라는 시인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라는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훌라쏭과 함께 시작된 1980년
     
    취해 있었던 그 사람이나 나나 역사 속에서 보면 우리는 정말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보잘 것 없는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왔고, 변화시켜 왔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에 대한 싸움을 할 때 부모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라는 게 가장 많이 들은 얘기다. 그러나 무수히 깨지기만 하던 그 계란으로 불과 15년만인 1995년에 전두환을 구속시킬 수 있었다.

    마치 촛불집회 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많이 불렀던 것처럼 당시 많이 불렀던 노래가 있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훌라/ 같이 죽고 같이 산다 훌라훌라/ 무릎을 꿇고 사느니 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라는 노래다.

    이 노래 중에서 “훌라훌라”는 “좋다좋다”로 바꿔 부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가사를 바꿔서 “전두환은 물러가라 좋다좋다”하면 자연스럽게 2절이 되고, 또 3절을 누군가가 만드는 그런 노래였다. 우리는 그걸 “훌라쏭”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1980년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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