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곡에서 인기곡으로 <청계천 8가>
    By 나난
        2010년 09월 17일 10: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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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년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각 조직들은 내부 상처를 추스르면서 변화된 시대에 맞춰 새로운 방향 모색을 시작합니다. 문화예술운동의 전국조직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은 사단법인화를 추진하여 제도 영역으로 진출하면서 외연을 넓히고 기존 문화운동의 바람막이 역할을 자처하였고, 노동자문화운동을 주도해 오던 연합조직들은 93년~94년 사이 각기 다른 내부 논의를 통해 해산을 합니다.

    노래단체들도 제각기 자기 대중 기반을 만들어가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하며 지역 대중들과 만나고, 또 노조를 통해 각기 다른 정서의 조합원 대중들을 만나게 됩니다.

    천지인과 희망새

    90년대 초부터 상대적으로 노조운동이 다소 위축되긴 했지만 전노협에 대기업 노조와 사무전문직 노조들이 속속 결합하면서 대공장 남성 노동자 중심의 투쟁하는 노동자에서 보건의료, 사무전문직 등의 다양한 노동자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전처럼 하나의 정서, 하나의 이슈로 노동자 대중들이 공감하는 것은 쉽지 않게 됩니다.

       
      

    이전처럼 전국을 휩쓰는 노래는 잘 창작되지도 않았고, 노래가 창작되어도 제각기 다른 정서와 연령대, 다양한 노동자들 모두를 공감시키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노래는 더 다양해지지만 그 이전과 같은 대중세를 갖지는 못합니다.

    그 즈음의 다양하게 분화되어가던 활동 중에 두드러진 건 ‘천지인’과 ‘희망새’의 등장입니다. 민중록그룹을 표방하며 천지인이 결성되었고, 통일운동의 자기 정치색을 드러낸 희망새가 결성이 되어 음반을 발매하면서 각기 다른 이유로 논란에 휩싸였지요.

    희망새는 정치적인 색채와 발성으로 논란이 되긴 했으나 애초부터 지향을 명확히한 출발이라 일정한 집단에서 수용되었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천지인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민중가요, 노동가요의 형식에 대한 논란을 야기시켰습니다. 노동자노래단을 거쳐 꽃다지에서 활동을 하던 <누가 나에게…>, <열사가 전사에게>의 작곡자인 김성민이 꽃다지를 그만두고 나가 결성을 한 것도 그랬고, 또 록이라는 형식에 대한 선진적인 노동자대중들의 반발과 비판은 엄청 완강했습니다.

    특히 <열사가 전사에게>의 천지인 버전은 열사의 정신을 왜곡했느니, 노래를 망쳐놨다느니 하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과거나 이 후의 논쟁처럼 특별한 결론이나 장르에 대한 발전적인 모색 없이,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노래들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자리를 잡게 됩니다.

    합법음반 발매

    한 편으로는 노동가요가 투쟁의 현장에서만 불리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일상의 공간에서 함께 향유하고 즐겨야 하고, 이를 위한 노래들도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에 따라 꽃다지도 93년 겨울, 기존의 집체극 형식의 대규모 공연에서 대학로의 작은 소극장공연을 1주일간의 콘서트를 시도하였고, 수용자들을 조직하는 후원 모임도 결성하게 됩니다.

    이는 일상에서 노동자 대중들을 투쟁의 정서만이 아닌 일상의 정서로 조직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꽃다지는 합법음반을 준비하여 발매를 합니다. 합법음반이라 함은 제도권에 공식적인 등록을 하고 심의를 거쳐 음반을 제작하여 레코드점에서 판매가 가능하고, 또 방송에서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침이슬>이 민중가요로 세대에 걸쳐 많은 이들에게 불릴 수 있었던 것은 곡 자체가 좋아서도 있지만 이미 음반으로 발매되어 소장하고 있거나 방송에 나왔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십, 수백만이 부르는 노동가요도 그러한 반열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음반 사전심의에서 거의 대부분 곡에 밑줄이 그어진 채 되돌아 왔습니다. 붉은 줄이 그어진 부분의 가사를 수정하라는 지시와 함께 말입니다. <누가 나에게…>에서는 ‘어느 새 적들의 목전에…’를 ‘저들의 목전에’로 한 글자만 바꿔달라고 했으나 <단결투쟁가>는 하도 밑줄 친 곳이 많아서 노래가사를 아예 다시 써야만 하는 지경이었습니다.

    이미 백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전혀 다르게 수정해서 음반에 싣는다면 그건 <단결투쟁가>가 아니겠지요? 그래서 한 글자도 수정할 수 없다고 버티며 무작정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 심의위원회 쪽에서도 완강하게 나왔지만 결국은 그 시대의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전곡을 가사 한 자 수정하지 않고 통과시켜 줄 수밖엔 없었습니다.

    청계천은 변했지만

    그리하여 94년 5월, 노동가요로서는 처음이라 할 수 있는 꽃다지 합법음반 1집이 한국음반을 통해 발매되었고 전국의 레코드점에도 진열이 되고, 라디오에서도 <단결투쟁가>가 흘러나오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레코드점에 음반이 꽂혀있다고 꽃다지나 노동가요를 모르는 사람들이 음반을 사지는 않았으며, 방송에도 초기에 좀 나오다가 94년 여름이 지나면서 공안정국으로 다시 회귀하자 거의 들을 수 없게 되어버렸지요. 더군다나 방송에 나오는 것을 의식한 부드러운 편곡으로 노동가요의 질감을 희석시켰다는 비판도 받았구요.

    이번에는 이 시기에 논란이 되었던 노래들 중에서 천지인 1집에 실렸던 <청계천 8가>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들어보면 그 당시에 왜 이런 노래들이 논쟁거리가 되었는지 참으로 이해가 잘 안 가실 겁니다. 이미 90년대 중반이 되면서 인기곡 반열에 오른 노래이고, 아주 많은 이들의 애창곡이기도 하니까요. 청계천의 모습도 그 때와는 달라졌지만 이제는 그 당시 논쟁과 무관하게 즐겁게 감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청계천 8가>
    김성민 글, 곡

    파란 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물샐 틈 없는 인파로 가득한
    땀 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 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어느 핏발서린 리어커꾼의 험상궂은 역설도
    어느 맹인 부부 가수의 노래도
    희미한 백열등 밑으로 어느 새 물든 노을의 거리여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 새 텅빈 거리여
    칠흙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워~워~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음원 출처 : [천지인 1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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