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좀 나오게 맞았어야지"
    By 나난
        2010년 09월 16일 09: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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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일. 생각 없이 들어도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런데 이 시간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길바닥에서 나고, 허구한 날 얻어맞고, 맞은 것도 억울한데 가해자가 되서 경찰서에 끌려간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긴 시간일지 감도 오지 않는다.

    대로변 칼바람이 치는 한 겨울이나, 보신탕집 사장님만 신나는 삼복더위에 농성당번이 되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까? 노동자들에겐 흘러가는 시간도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학습지노동자들의 투쟁이 이렇다. 폭력과 불법, 불공평이 난무하는 곳에서의 투쟁.

    "그림 좀 나오게 맞았어야지"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든 이 절망의 공간에서 1000일 동안 투쟁을 이어 온 사람들이 바로 학습지노동자들이다. 노동자들의 요구가 언제나 그렇듯 학습지노동자들의 요구는 상식적이다 못해 순진하다. 재능교육 자본과, 혜화경찰서, 구청까지 민관합동으로 거품을 물며 달려들어 행패를 부릴 만큼의 무리한 요구는 단 하나도 없다. 하지만 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딱 한 시간 동안 1인 시위 하는 것조차 전쟁이었으니 말이다.

       
      ▲ 농성장은 철거되고, 용역에서 폭행당하며 재능교육지부 조합원들은 1,000일의 농성을 이어왔다.(사진=재능교육지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고 폭행당하고, 엿장수 마음대로인 조사와 재판은 농성장을 지킬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이제는 너무 많아서 얼마인지 셈하기도 힘든 벌금. 처벌받아야 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들은 오히려 희희락락인 현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함께 연대했던 우리들도 재능투쟁에 회의를 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꼴통이라고 부르는 학습지노동자들은 좌절할 줄을 몰랐다.

    용역에게 얻어맞은 날. 보통 고통과 분노를 느껴야하건만. 맞은 티가 안 난다고 아쉬워한다. 옆에서는 한 술 더 뜬다. "그림 좀 나오게 잘 맞았어야지." 14차례의 농성장 철거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농성장 철거됐다는 문자를 받고 부랴부랴 달려갔더니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계신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갑갑한 마당에 지부장님이 싱긋 웃으며 한 마디 하신다.

    “요새 집회대오도 줄고 긴장감도 떨어졌는데 잘 됐어.”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 다시 농성장을 세워야 하는 마당에 눈물이나 짜내는 일은 사치고 시간낭비이기 때문이다. 딱 하나만 더. 재능교육 경호업체를 자임하는 혜화경찰서가 본사 앞 집회를 모두 금지하는 기상천외한 일을 저질렀다. 역시나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타협하지 않는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단체의 명의로 집회신고를 했다. 오히려 경찰이 정신을 못 차린다. 재능교육 집회는 이미 접수됐다고 접수증을 안 내주려고 버틴다. 주관단체가 다름을 한참이나 설명해야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들어간다.

    이렇게 1년 가까이 집회신고투쟁을 한 결과 법원은 학습지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헌법 위에 군림하는 혜화경찰서의 짓거리가 워낙 말도 안 되긴 했다. 하지만 집회금지에 밀려 재능교육 시청사옥이나 혜화동로터리에 안주했다면, 집회 및 시위의 당연한 권리를 지켜낸 값진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그 무엇도 학습지노동자들의 투쟁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이제 궁금해야 한다. 무엇 때문에 학습지노동자들은 포기도 좌절도 모른 채 온 몸으로 싸워나가는지 말이다. 보통 이런 질문은 기자가 아닌 이상 하는 사람은 민망하고, 받는 사람은 낯이 간지럽기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계속 옆에서 어슬렁대며 일상적인 말과 행동을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학습지 교사의 노동자성 쟁취. 자본가나 특수고용노동자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이를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구호나 말과는 다르게 삶으로 보여주긴 어렵다. 왜냐하면 자본의 천국인 땅에서 특수고용노동자가 노동자성을 쟁취하는 일은 과거 8시간 노동쟁취 만큼이나 꿈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한 요구지만 현실이 되긴 어려운 상황에 맞서기 보다는 눈앞의 실리에 타협하기가 더 쉽다.

    그러나 학습지노동자들은 타협하지 않는다. 당장의 이익을 잡기 위해 손을 내미는 순간 스스로 노동자임을 포기하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 2권이니, 산재보험의 부분적 적용이니. 이 따위 가진 놈들의 장난질은 통하지가 않는다. 오직 하나, 학습지 교사는 당당한 노동자라는 일념으로 어려운 길을 선택한다. 어려워도 반드시 가야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전망, 대체 어디에 있을까

    민주노조에 대한 책임감. 어떻게 만든 노동조합인데! 어떻게 쟁취한 단체협약인데! 3000 조합원의 눈물과 땀으로 일군 민주노조와 단체협약을 재능교육이 하루아침에 엎으려했다. 재능교육은 1000일 내내 실수만 저질렀는데, 이게 가장 큰 실수였다. 99년 파업투쟁 무용담의 핵심은 다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장 즐겁게 일했던 때”, “사람답게 사는 것이 뭔지 노조를 하면서 알았다.” 왜 가장 큰 실수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아무리 싫어도 결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는 법인데, 재능교육은 건드리고 말았다. 결론은 간단하다. 학습지노동자들은 사람답게 살면서, 행복하게 일하기 위해 민주노조를 지키려는 것뿐이다.

    노동자들의 삶 자체가 위기고, 이를 극복할 노동자운동 또한 위기인 시대라고 한다. 그래서 모두들 위기를 극복할 전망을 찾으려고 분투하고 있다. 전망. 대체 어디에 있을까? 지부장님 말처럼 노동자들의 투쟁을 글로 배운 나에게는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글이 아니라, 삶으로 함께 학습지투쟁을 했기에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

    전노협 탈퇴 종용에 “내가 전노협이니 탈퇴시키고 싶으면 내 목을 치소!” 의자 박차고 파업대오로 웃으며 걸어 들어가는 당당한 노동자의 모습. 세월은 흘렀지만 그 당당한 노동자의 모습은 혜화동 학습지노동자들의 농성장에 아직도 살아 있다고 말이다. 1000일. 모진 탄압에도 굴하지 않은 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싸워온 동지들. 감히 말하겠다. 전망이 여기 있다고. 1000일 동안 온 몸으로 길을 만들어 온 사람들에게. 이제 이 투쟁을 아는 모두가 함께 길을 만들어 나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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