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 후속 주체의 판을 여는 당이 되자
    독자 vs 통합, 사이비 노선논쟁에 불과
        2010년 09월 08일 08: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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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

    9월 5일 진보신당 대의원대회에서 당발전특별위원회가 제출한 <당 발전 전략(안)>이 일부 수정된 채로 채택되었다.

    이제 <당 발전 전략>은 진보신당 내의 가장 최근의 합의를 담은 공식 문서가 되었다. 하지만 순회 토론 과정에서도 드러났듯이 이 문서에는 여전히 많은 쟁점이 공백 상태로 남아 있다.

    따라서 <당 발전 전략>의 합의에서 출발하면서도 그 공백을 채워 나가는 게 향후 진보신당의 중요한 과제다.

    필자는 당발전특별위원회 지원팀의 일원으로 <당 발전 전략(안)> 작성 과정에 참여했다. 하지만 특위 위원이 아닌 실무 지원팀이었기 때문에 필자 자신의 의견을 제출하거나 공표하는 것은 자제해왔다. 하지만 이제 <당 발전 전략>을 보완하고 실천해나갈 후속 작업이 시작되었으므로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을 말해보고자 한다.

    1. <당 발전 전략>에 빠진 핵심 사안 – 진보운동의 위기에 대한 진단

    <당 발전 전략>은 2000년대 중반부터 회자되어온 ‘진보정치 위기’론을 이어받고 있다. 하지만 이 위기의 근본 원인에 대한 진단은 생략돼 있다. 이 부분을 채워 넣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진단이 계속 누락된 상태로 남는다면, 우리의 처방은 얄팍한 대증 요법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진보정치, 더 나아가 진보운동의 위기는 곧 주체의 위기다. 그리고 이것은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북반구(자본주의 중심부) 어디에서든 (이제는 한국도 그 일부다) 신자유주의가 배제와 억압만으로 지배력을 확보한 것은 아니다. 이와 함께 포섭의 운동이 있었으며, 그래서 북반구의 신자유주의는 파시즘의 변종이 아니라 헤게모니적 지배의 한 유형으로 봐야 한다. 그 핵심은 중간층의 다수를 금융화 운동에 연루시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노동계급 상층을 금융 투기(가령 주식 시장)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중간층의 아파트 투기 및 사교육 열풍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다름 아닌 이 계층이 한국 사회에서는 최근에(1980년대 말에) 민주화 및 민주노조운동을 시작한 바로 그 주역들이다. 이제 486이 된 이른바 386세대, 그리고 현재 대공장 및 공공부문의 기업별 노조로 남은 민주노조운동 1세대들. 진보운동의 토대였던 이들이 신자유주의 포섭의 핵심 대상이 된 것이다.

    물론 선거 때마다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정치 세력에게 계속 표를 던지는 것은 여전히 이들 계층이다. 하지만 이들은 정치 세력들에게 신자유주의 구조 자체의 개혁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노무현 정부의 한계는 노무현 정치 세력의 한계일 뿐만 아니라 그를 지지한 유권자들의 시야와 요구의 한계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포섭의 반대면에서 배제와 억압이 자행됐다. 비정규직, 여성, 20대가 그 핵심 피해 대중이다. 여기에서 사실 ‘비정규직’이란 말은 은유일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신자유주의의 포섭 대상에서 빠진 노동자들, 즉 다양한 유형의 비정규직, 중소 사업장 노동자, 불안정 노동 계층, 실업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경향적으로 여성, 20대의 다수와 겹친다.

    현재 한국의 진보운동은 언술 차원에서는 ‘비정규직’을 강조하지만 민주화 및 민주노조운동 1세대를 넘어서 그 지지 기반을 동심원적으로 확대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포섭의 대상과 배제의 대상 사이에는, 즉 기존 진보운동의 토대와 그 당위적인 후속 기반 사이에는 깊은 골이 패여 있다.

    한국 진보정치의 근본 위기는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외국 교과서(사회민주주의든 혁명적 사회주의든)에 따르면 사회 변혁의 주체여야 할 집단(노동계급) 내부에 이러한 깊은 골이 파여 있기 때문에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개혁이든 혁명이든 그 어느 것도 작동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나라의 사회민주주의자는 민주당 주변을 기웃거리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며, 이 나라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정규직 노조의 고립된 경제 투쟁을 혁명의 준비로 착각하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 진보정당의 문제들도 결국 이 근본 위기에서 파생된 병리 증상들이라 봐야 한다. 종북주의와 같은 낡은 사상이 대중정당에서 쉽게 수적 다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대중운동을 통해 진보정당의 활력 있는 대중적 토대가 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패권주의가 작동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환원론의 위험성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감히 말한다면, 진보정치의 근본 위기의 해결 없이는 종북주의, 패권주의의 극복도 없다. 진보운동의 주체 형성이 막혀 있는 근본 난국을 돌파하지 못한다면, 진보운동 안에서 그 누구도 ‘새롭다’는 말은 더 이상 감히 입 밖에 내놓지 말아야 한다.

    2. ‘독자/통합’ 논란이 과연 ‘노선’ 논쟁인가?

    여기에서 잠깐 이야기를 돌려 보자. 당발전특위의 활동 배경이 된, 그리고 지금까지 <당 발전전략>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 쟁점은 이른바 ‘독자/통합’ 논란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진보신당의 중차대한 노선 논쟁이니 당직 선거로 결판을 보자는 목소리가 드높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독자/통합’ 논란은 결코 ‘노선’ 논쟁이 될 수 없다. ‘독자’든 ‘통합’이든 어느 것도 도무지 ‘노선’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진보신당이 외부 세력과 통합을 모색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그게 진보신당의 ‘노선’을 실현하는 데 적절한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할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노회찬 대표의 말대로 이것은 전략이 아닌 전술 차원의 선택일 뿐이다. 그렇다면 ‘독자’냐 ‘통합’이냐는 논란 이전에 ‘노선’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 ‘독자’ 혹은 ‘통합’ 어느 한 쪽이 자신을 ‘노선’이라고 우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논란은 애초에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통합’론이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노선’의 위상으로 스스로를 내세우면서 이 잘못된 논쟁이 시작되었다. 출발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사실은 ‘독자파’라는 그 대립쌍도 문제의 본질에서 비껴나고 있다. ‘독자파’에 어떤 합리적인 핵심이 있다면 ‘통합’론이 ‘노선’의 위상을 자임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 정도일 것이다.

    ‘독자파’든 ‘통합파’든 본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사이비 ‘노선’ 논란을 벌이기 전에 제대로 된 당 ‘노선’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당 발전전략>은 여전히 당 노선을 제시하는 데 수줍어하고 자신 없어 한다. 하지만 언급은 하고 있다. ‘비정규직, 여성, 생태’의 정당이라는 표명이 그것이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결코 가벼이 지나칠 수 없는, 진보신당의 중대한 과제를 지시하고 있다.

    3. 노선 – ‘진보 후속 주체들의 판을 여는 당’이 되자

    필자는 진보신당의 노선은 ‘비정규직당’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종북주의당’도 아니고, 두루뭉수리 한 ‘민생정당’도 아니다. ‘비정규직당’이 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기에서 ‘비정규직’이란 하나의 은유다. 신자유주의 구조로부터 배제의 대상이 된 좁은 의미의 비정규직, 중소사업장 노동자, 여성, 20대-30대가 수렴되는 어떤 사회적 존재들을 표상하려는 것이다.

    진보신당의 노선이 이것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진보신당이 ‘진보의 재구성’을 창당 정신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위에서 현재 한국 진보운동의 근본 위기가 민주화 및 민주노조운동 1세대의 주역들이 신자유주의 구조에 포섭된 반면 그 배제 대상들은 아직 진보운동의 주역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진보의 재구성’의 수단이 되겠다는 진보신당이 해야 할 일도 분명하지 않은가? 한국 사회에서 변혁 주체의 형성을 가로막는 깊은 골에 가교를 놓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세대와 세대를 잇는 일이다. 생물학적 세대로만 이해될 것을 염려한다면,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 시대와 시대를 잇는 일. 즉, 진보신당의 과제는 지금까지의 진보운동의 경험들을 최대한 재구성, 재편성하여 진보운동의 후속 주체들이 스스로 성장해갈 기반을 구축하는 일이다. 진보 후속 주체들의 판을 여는 일이다.

    좀 뜬금없는 유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은 1950년대 말에 등장한 서구 신좌파의 역할과 비슷하다 하겠다. 1956년 소련의 스탈린 격하 운동과 폴란드, 헝가리의 봉기를 계기로, 한때 세계 혁명의 본부로 여겨지던 현실사회주의권의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러자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기존 공산당원이나 그 지지자들 중 상당수가 이탈하여 ‘신좌파’(New Left)라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현실 정치의 시각에서만 보면 ‘신좌파’의 존재는 무시해도 좋을만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덴마크의 사회주의인민당처럼 신좌파가 정치세력화에 성공한 나라도 있지만, 이것은 정말 예외적인 사례일 뿐이었다. 좌파 정치 지형을 지배한 것은 기존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거나 친소 공산당이었다.

    하지만 현대 세계사의 그 어떤 서술도 ‘신좌파’의 존재를 무시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들이 1968년에 등장한 새로운 대중적인 좌파 세대의 선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좌파’는 사회민주주의-공산주의가 지배하는 기존 좌파 정치 지형을 비판하여 그 경직된 구조를 허물었고, 이들이 열어놓은 그 틈새에서 68세대가 치고 올라왔다. ‘신좌파’는 기존 좌파 정치와 68세대를 잇는 ‘사라지는 매개자’의 역할을 했던 셈이다.

    진보신당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이러한 역할이다. 진보신당은 진보 후속 주체들의 싹이 움트기에는 너무 굳어 있는 기존 진보운동 지형을 이완시키고 균열시켜야 한다. 그리고 미래의 궐기로, 대변혁으로 이어질 다양한 실험들의 배양지가 되어야 한다.

    4. ‘비정규직당’ 노선에 복무할 때에 ‘진보신당 강화’도, ‘새 진보정당 건설’도 가능하다

    진보신당이 이러한 노선을 걸을 때에만 ‘진보신당 독자 역량 강화’도,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도 가능하다. <당 발전전략>은 이 두 과제가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고 천명하기는 했지만, 정작 이 둘을 서로 결합시키는 근거를 분명히 짚지는 않는다. 필자는 ‘비정규직당’ 노선이 바로 그 근거라고 본다.

    진보신당이 하나의 정당으로서 독자적으로 생존-발전하려면, 무엇보다도 진보신당 외의 다른 어느 정당도 채워주지 못하는 무언가를 제시해야만 한다. ‘비정규직당’으로 역할하는 진보정당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정치 지향이자 흐름이다. 당장의 선거 결과나 현실 정치 지분에 상관없이 그 존재와 활동만으로도 정치적으로 유효한 정당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위상이 현실 정치의 성과와 결코 무관한 것도 아니다. 물론 진보신당이 ‘비정규직당’ 노선을 추진한다고 해서 곧바로 비정규직, 여성, 20대의 지지를 받기는 힘들 것이다. 이들은 기존 진보 지지층에 비해 덜 조직화되어 있고, 따라서 진보정당이 접근하기 가장 어려운 계층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당’이 비정규직의 지지를 받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 당분간은 현실 정치의 성과에 대해서는 단념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비정규직당’의 존재 덕분에 선거 정치에서 기존 진보 지지층과 진보 후속 주체들 사이의 연대가 작동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민주화 및 민주노조운동 1세대 유권자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협소한 이해가 아니라 도덕적 대의에 따라 투표하는 경향이 있다. ‘비정규직당’은 이런 성향의 유권자들이 진보 후속 주체들에게 연대를 표명할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진보신당은 이러한 가능성을 초기 자원으로 삼아 현실 정치에서 성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즉, ‘비정규직당’ 노선은 정당 투표 득표의 강력한 근거가 될 것이다.

    한편 진보신당이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해가는 과정에서도 ‘비정규직당’의 지향은 핵심 기준이자 중심축이 된다. 한 마디로 새로운 진보정당은 좀 더 광범한 기반 위에서 ‘비정규직당’의 지향을 추구하는 진보정당이어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는 ‘새로운(!)’ 진보정당이라고 말할 수 없다.

    조만간 진보신당은 진보 후속 주체들이 전면에 나설 수 있도록 진보운동의 지향과 구조를 혁신하는 프로그램을 작성해야 한다. <당 발전전략>이 향후 과제로 명시한 ‘종합실천계획’ 수립의 주된 내용이 바로 이것이어야 한다. 이 내용은 진보신당의 독자적 실천의 나침반이 될 뿐만 아니라 새 진보정당 건설의 공동 실천-공동 논의 과정에서도 핵심 의제가 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당 발전전략> 당대회 채택본이 밝히고 있는 ‘진보신당 독자 역량 강화’를 위한 ‘종합실천계획’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종합실천계획’은 별개일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진보 후속 주체들의 새 판을 열 하나의 ‘종합실천계획’이 필요할 뿐이다.

    진보신당이 제시하는 이러한 프로그램에 대한 동의 정도에 따라 새 진보정당의 건설이 앞당겨질 수도 있고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진보신당의 지향에 좀 더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세력이나 흐름들과 먼저 힘을 합치고 이후 단계적으로 새 진보정당의 외연을 확대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5. 진보신당 독자 역량 강화에 대하여

    사실 지금까지 필자가 주장한 당 발전 방향은 지방선거 직후 <레디앙> 등의 지면에서 많은 논자들이 이미 제시한 바이기도 하다. 이때에 ‘비정규직, 여성, 20대’의 당으로 나아갈 구체적인 방안들도 많이 나왔다. 진보신당의 2010년 하반기 사업계획도 그러한 지향에 따라 나름대로 충실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래서, 어떤 기발한 상상력이 아니라 이미 나와 있는 제안들을 진지하게 실천하기 시작하는 일이다.

    이런 제안들 중 가령 지역조직들이 비정규직, 중소사업장 노동자, 청년 실업자의 상담 센터 역할을 하자는 것은 중장기적인 사업 방향이면서 동시에 지금 당장에 각 지역조직들이 시작해야 할 과제다. 지역에서 비정규직 상담 활동을 통해 꾸준히 저변을 넓혀가는 일본 공산당의 사례를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전 당적인 실천도 필요하다. 이것도 무슨 허황된 계획을 잡을 게 아니라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서부터 스스로를 훈련시켜 가면 된다. 진보신당은 이미 동희오토 투쟁에 결합하면서 이 훈련에 착수했다. 이러한 투쟁에 끈질기게 결합하면서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과들을 만들어내고 당의 체질을 새롭게 형성해야 한다. 이런 훈련을 거듭하다 보면 내년에는 가령 최저임금제 투쟁을 전 당력을 기울여 계획적으로 벌일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비정규직당’으로서 신뢰를 쌓아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정당이기 때문에 또한 비전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 발전전략>이 과제로 정한 ‘종합실천계획’ 안에 진보 후속 주체들의 관점에서 진보운동의 정책 내용과 대중조직 구조를 혁신하자는 프로그램을 담아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프로그램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은 한국적인 형태의 연대임금제를 구축할 방안이다. 그러기 위해 노동조합 구조를 어떻게 바꾸고 어떤 교섭 체계를 요구하며 정당원과 노조원들이 어떤 실천에 나설지 제안해야 한다. 만약 이렇게 대중운동의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연대임금제를 실현하는 게 난망하다면 진보 세력은 ‘기본소득제’와 같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과감히 채택하여 전면에 내세워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제반 실천 방향은 필연적으로 거대 자본과의 대결로 이어지게 된다. 이미 동희오토 투쟁이나 현대차 사내하청 문제는 비정규직 문제의 원흉이 재벌, 금융 투기 세력 등 거대 자본임을 폭로하고 있다.

    진보신당이 이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진력한다면, 반드시 거대 자본과 정면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 즉, ‘비정규직당’은 곧 ‘거대 자본과 싸우는 당’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의 진보정당은 ‘재벌과 맞서 싸우는 당’이어야만 한다는 김상봉 교수의 제안을 실현할 유력한 방안 중 하나가 될 것이다.

    6.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 및 2012년 총선, 대선 대응에 대하여

    <당 발전전략>은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의 몇 가지 전제 조건을 밝히고 있다. “자본주의의 한계와 폐해를 극복할 새로운 비전 마련”과 “신자유주의 극복과 노동, 생태, 평화의 가치를 구현하는 복지국가 건설” 그리고 “진보정당운동 과정에서 누적되어온 여러 정치적 오류 및 편향, 낡은 정치 활동과 조직 활동의 관행을 혁파”하는 것이 그것이다.

    한데 여기에 하나 덧붙여야 할 게 있다. 그것은 2012년의 양대 선거에 대한 방침이다. 당면 선거 방침이 서로 다른 세력들이 선거를 앞두고 한 정당으로 결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거 방침에 대해 높은 수준의 합의가 있어야만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함께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총선보다는 대선이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선과 총선은 격이 다르다. 권력과 직결된 선거는 대선이며, 따라서 정치 세력들이 서로 다른 비전을 내걸고 심판 받아야 할 핵심 무대는 대선이다. 진보 좌파가 아무리 현실적인 힘이 미약하다 하더라도 독자적인 선택지로서 나서야만 하는 게 바로 대선이다.

    반면 입법부 선거인 총선은 권력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현실 정치의 행위자로서 입장권을 확보하고 영향력의 크기를 결정하는 장이다. 따라서 각 정당들의 좀 더 유연한 대응이 가능하며 그게 또한 바람직하다. 진보정당도 마찬가지다. 가령 소선거구제 아래서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선거연합 전술을 추진할 수 있다.

    (부연하자면, 이 문제는 이번 지방선거와도 연관된다. 지방선거는 행정부 선거와 입법부 선거를 동시에 치른다. 어찌 보면 이것이 진보신당의 지방선거 방침이 미궁에 빠진 객관적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단체장 선거에서는 보다 원칙적인 대응이 필요했던 반면 의회 선거에서는 유연한 전술이 요구되었다. 진보신당은 이 서로 상반된 요구 사이에서 해법을 찾지 못했다.)

    총선에서는 진보정당들 간의 선거연합을 추진할 뿐만 아니라 연합의 범위를, 경우에 따라, 중도우파 정당들로 확대하는 것도 검토해볼 수 있다. 19대 국회의 비정규직 입법 목표나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등의 정치 개혁 과제 같은 핵심 정책 합의를 바탕으로 선거구별로 연합 전술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보정당의 대선 방침은 단호해야 한다. 진보정당의 독자 후보가 노동자, 민중 권력의 비전, 사회 변혁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진보적 대중을 결집 혹은 재결집해야 한다.

    더구나 이번 대선은 87년 이후 5년마다 반복된 전통적 진보 세력의 도전 그 이상의 의미를 확보해야 한다. 비정규직, 여성, 20대 등 진보 후속 주체들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더욱 진보정당의 독자 후보 방침이 중요하다.

    <당 발전전략>은 이것을 ‘진보정당의 발전에 복무한다는 커다란 방향’이라는 에두른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당 내 토론을 통해 좀 더 명확한 해석을 내려야만 한다. 민주당 중심의 민주연립정부 방침 등 진보정당의 독자적 발전을 훼손하는 흐름과는 선을 긋는다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선은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의 외연을 결정하는 중대한 기준이다.

    진보정당에게 2012년 총선, 대선은 ‘기회’보다는 ‘시험대’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필자는 진보신당이든 그 계승자인 새로운 진보정당이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움’에 부응하기만 한다면 현실 정치에서 유의미한 거점을 확보하는 데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렇게 2012년을 넘긴다면, 진보정당운동의 진정한 도약 기회는 2014년이 될 것이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진보정당은 진보 후속 주체들에 걸맞는 진보 후속 지도자군을 배출해야 한다. 지역 정치에서부터 착실히 성장하는 새로운 지도력 유형을 창출해야 한다.

    진보신당의 다른 당원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필자는 이러한 과제를 완수할 때까지 진보정당운동의 중핵이 해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 세대가 자신의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그나마 인내할 수 있는 비극이지만 다음 세대로 횃불을 이어가는 것조차 실패한다면 이것은 너무 처참한 비극이 아닌가?

    7. 끝맺으며

    이탈리아는 한때 서유럽에서도 좌파 정치가 가장 번성했던 나라다. 공산당과 사회당이 서로 경쟁하면서 수백만 당원을 자랑했고, 60~70년대에 걸쳐 학생운동, 노동운동이 나라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탈리아는 전혀 딴판이다. 공산당과 사회당의 맥을 잇는 정치 세력들은 재벌 정치인 베를루스코니에 맞서야 한다는 명분으로 중도우파와 통합해 민주당을 창당했다. 선거에서 베를루스코니를 이겨야 한다는 것 외에 별다른 이념적 정체성이 없는 거대 정당이 등장한 것이다. 대신, 한때 정치 스펙트럼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던 좌파는 그 실체가 사라진 꼴이 되었다.

    구 공산당의 명맥을 잇는 공산주의재건당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당이 미래의 희망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 당은 과거 공산당 전성기의 향수 안에 틀어박혀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주의재건당의 일부가 탈당하여 사회당, 녹색당 등 다른 좌파 정당들의 뜻 맞는 이들과 ‘좌파/생태/자유’라는 새 정당을 만들었다. ‘좌파/생태/자유’는 좌파 정치 문화 자체를 혁신하여 새 세대의 길을 열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이 당의 지지율은 한국의 진보신당과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이 당은 현재 이탈리아에서 좌파 부활의 모색이 약동하는 유일한 정치 공간이다.

    동 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한다. 2008년 미국 금융 위기로 신자유주의 시대가 흔들리는 듯 보였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조짐은 좀처럼 감지되지 않는다.

    어디서나 비슷하다. 그람시의 나라 이탈리아까지도 저 모양이다. 하지만 적어도 저 나라에는, 한 세대에서 다른 한 세대로 횃불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둠이 더욱 짙어지기만 하는 이때에 묵묵히 다시 길에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이 땅에도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 <더 로드>에서처럼 ‘불을 운반하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한다. 필자는 이것이 진보신당이 떠안아야 할 소명이라고 믿는다. <당 발전전략>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은 바로 이 소명, 즉 ‘진보 후속 주체들의 길을 여는 정당’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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