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면목동 중딩, 싸움 못한다는 것의 의미?
        2010년 09월 06일 07: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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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포스터 

    10여 년 전 면목동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쯤 되는 남자애가 싸움과 운동을 못한다는 것은 한 50가지 핸디캡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책상에 앉으려 하면 뒤에 있는 녀석이 의자를 빼곤 했고, 앉아 있으면 누군가 뒤통수를 치곤했고, 수업이 시작하고 나면 어디에선가 잘려진 지우개가 날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짜증나서 뒤를 돌아보면 누군가에게서 욕설이 날아왔다. “XX 한 번 뜰까?” 매일 쫄아 있고, 울 수밖에 없었다.

    나의 ‘양아치’ 친구들

    보통 성적이 권력이 되었던 중학교 2~3학년 쯤 되어서야 맞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고등학교 때가 되어서야 삥 뜯기는 것에서 자유로워졌다. 난 다행히 동네 친구들이 ‘양아치’였기 때문에 많이 맞지 않고 삥 뜯기 않을 수 있었는데, 그나마 친구들과 모조리 다른 반이 되었던 해는 늘 괴로웠던 것 같다.

    싸움과 운동을 못하는 애들이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하려면 보통 두 가지 선택이 있었던 것 같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모범생’이 되거나, 아니면 다른 종류의 특기 하나를 갖거나. 나는 중학교 이전까지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재미 붙일 만한 다른 게 필요했다.

    몸치인데다가 눈썰미도 없고 그림도 잘 못 그리던 나한테는 유일하게 재미있는 시간은 <즐거운 생활> 시간 중 음악시간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의 경우 생각보다 빨리 리코더를 불었고, 캐스터네츠 짝짝짝, 멜로디언으로 치는 <미루나무 꼭대기에>를 남들보다 조금 빨리 익힌 덕택에 음악시간은 내게 늘 즐거운 시간이었다.

    엄마는 내가 ‘음악 신동’이라고 여겨서 피아노 학원에 보냈고, 덕택에 소문이 나서 "기집애같이" 논다며 남자애들한테 맞는 일이 잦아졌다. 신기한 것은 초등학교 ‘음악시간’의 분위기였다. 매일 별별 ‘기행’과 ‘비행’을 넘나들던 녀석들도 음악시간에는 선생이 하자는 대로 따르곤 했다. 다들 목청이 터지도록 동요를 부르기도 했다. 캐스터네츠, 탬버린, 큰 북, 작은 북, 그리고 그 외의 악기들을 함께 합주하며 깔깔대곤 했다. 그런데 그 기억이 초등학교 이후에는 없는 것 같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클래식 음악’이라는 것을 듣기 시작했다. 비발디의 ‘사계’를 듣고,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을 들었다. 클래식들을 듣는 목적이야 교과과정의 목적에 쓰여 있었겠지만, 내가 보기에 클래식 음악을 듣는 목적은 중간/기말 음악 듣기 평가에서 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어떤 작곡가의 무슨 곡인지를 맞추는 데 있었다.

    피아노를 가장 잘 쳤던 여자애는 상고에 갔다

    시험은 인트로(도입부)나 클라이맥스 20초 가량을 듣고 맞추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시간을 제외하면 누구도 클래식 음악을 들었던 기억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가곡 몇 곡을 시험을 보기 위해 외워서 불렀던 기억도 난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음악 시간’은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귀찮게 음악실로 가는 행위가 되어버렸다.

    물론 개중에 어떤 녀석들은 계속 음악을 ‘하곤’ 했다. 음대에 간다는 녀석이 한 학년에 한두 명이 있었긴 했다. 그런데 솔직히 이야기를 하자면 그 녀석들은 너무 ‘잘난 애’들이었다. 목사의 아들이거나 ‘아파트 촌’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그냥 ‘잘 사는 집 애들’이었던 것 같다. ‘선행 학습’으로 ‘소질’을 파악해서 가르친다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소질’을 체크해볼 시간 자체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전교에서 가장 피아노를 잘 쳤던 우리 반의 H라는 여자애는 상고에 갔다. 그렇게 다들 20살이 되었고 ‘그럭저럭’ 밥벌이를 시작했다. 그나마 ‘공부’라도 잘 해서 대학에 간 몇 녀석들이 ‘밴드’를 했고, 고등학교 때 밴드를 했던 녀석들은 거진 다 대학에 못 갔다. 실용음악과 입시 학원에 다닌 녀석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베네주엘라 유소년 오케스트라.(영화 한 장면) 

    얼마 전 개봉한 <기적의 오케스트라 엘 시스테마>를 본다. 언제 총에 맞을지 모르고, 실제로 총에 맞아 죽기도 하는 아이들이 많은 베네수엘라. 1975년 11명의 아이들과 함께 수도 카라카스에서 시작된 엘 시스테마는 현재 184개의 센터를 가지고 26만 5천명의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

    엘 시스테마 프로그램에서는 2~18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전국의 지역 학교에서 매일 4시간 이상 음악 연습을 하고 순회공연을 한다. 마약과 폭력, 살인에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에게 엘 시스테마 지역학교들은 하나의 ‘보호소’가 되었고, 다른 한 편에서 감성의 ‘회복’ 혹은 ‘치유’를 만들어주는 공간이 되었다.

    노동자문화와 인디밴드

    엘 시스테마의 아이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돈이 필요 없었다, 우리가 배운 것은 음악만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유대와 사회적 책무이다, 앞으로 내가 받은 것을 똑같이 어린 후배들에 베풀겠다, (……)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이 사회에 감사한다.”

    꼭 클래식 이야기도 아니고, ‘음악의 힘’ 이야기만도 아니다. 만약 피아노치기를 좋아했던 H가 매일 놀러가서 4시간 씩 공짜로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엘 시스테마 같은 공간이 중학교 때에도, 고등학교 때에도 동네마다 하나씩 있었다면 그녀의 29살 지금의 인생은 어떠했을까?

    고등학교 때 ‘록커’가 되겠다고 밴드를 하겠다고 다니던 녀석들이 매일 동네의 음악 학교에 가서 합주를, 당시 시급 2000원짜리 알바를 안 하고도 ‘나랏돈’으로 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기타도 베이스도 드럼도 나랏돈으로 대 주었다면? 게다가 순회공연까지 하면서 계속 ‘합주’를 하면서 ‘하모니’를 만들거나 어떤 ‘협력’의 경험을 해봤다면?

    봉제공장 시다의 딸내미와 아들내미에게도 ‘다른 선택지’라는 게 한 번 쯤은 더 오지 않았을까. 그리고 다른 ‘사회’에 대한 감각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사실 영국의 ‘동네 클럽’들과 인디 밴드들도 오래된 노동자 문화가 만들어낸 결과 아니었던가. 일본의 지역 인디 밴드들 뒤에도 협동조합들이 있지 않나.

    4대강 사업에 들어갈 예산 22조를 생각하면, 7천3백만 명에게 30만 원짜리 연습용 기타나 바이올린, 첼로를 사줄 수 있는 돈이다. 수혜자를 조금 조정해서 청소년에게만 지급할 경우 0~18세까지의 청소년 인구는 1천만 명. 그들에게 모두 악기 하나씩을 사주는 데 드는 돈 3조다. 올해 집행된 4대강 예산의 숫자다. 거기에 얼마를 보태면 청소년 모두가 공짜로 악기의 합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아무리 더해 봐도 22조 근처까지 가지도 못할 것 같다.

    문화적 해방과 좌파의 재생산

    다른 한 편 해외로 공장을 모조리 이전시키고 국내의 사업장을 닫아버린 콜트 콜텍 사장의 자산이 1200억이라는데, 생각해보면 40만 명에게 기타를 공짜로 나눠줄 수 있는 돈이다.

    문제는 돈 계산이 아니라, 캐스터네츠 짝짝짝 소리를, 기타 소리를, 바이올린 소리의 가치, 합주의 가치와 향유의 가치를 ‘사회적 권리’ 혹은 ‘인권’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투쟁’ 아닐까. 그게 좌파가 세울 수 있는, 세워야 할 또 하나의 ‘공공성’이 아닐까. 또 그러한 ‘문화적 해방’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들이 좌파의 ‘재생산’의 조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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