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상적 절차 거쳐 살인하는 지옥 사회"
        2010년 09월 04일 04: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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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에서는 당연히(?) 별 관심 대상이 안되었겠지만, 여기 북구의 영화계에서 요즘 제일 화제작은 덴마크 기록영화 ‘아르마딜로’입니다.(http://www.armadillothemovie.com/armadillo/TRAILER.html)

    북유럽 화제작 영화 ‘아르마딜로’

       
      ▲영화 포스터. 

    평화적이다 싶은 북구 국가들이 일제히 아프간 침략의 현장에 동원돼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아프간 남부에 있는 덴마크 군대 기지의 이름을 본딴 <아르마딜로>는, 바로 이 아프간 침략을 문제화시킨 것이니까요.

    영화의 줄거리는 아주 단순해요. 그저 덴마크 침략군의 일상을 추적하는 것이죠. 덴마크에서 여친과의 섹스/스트립쇼를 즐긴다, 부모와 여친에게 작별 인사하고 눈물을 살짝 흘리면서 ‘복무 현장’으로 간다, 빨치산들이 출현됐다는 경보를 받고 출정에 나선다, 나즈막한 민둥산 사이의 계곡에서 빨치산과의 교전 끝에 몇 명의 빨치산을 사살한다.

    피범벅이 ‘탈레반’ 시신을 끌고 나와 조사하면서 "저 놈을 운좋게 잘 죽였다"고 자축한다, 그 다음에 캠프에 돌아가서 시원한 맥주를 들여마시면서 "탈레반 놈을 두 방에 이렇게도 운좋게 쓰러뜨렸다"고 웃으면서 동료들에게 기쁨(?)을 나눈다.

    그 다음에 맥주를 더 마시고, 여친과의 통화를 하고… 그런 것뿐입니다. 활기차고 생명력 넘치고, 또 바보로 보이지 않는, 복지국가에서 좋은 걸 먹고 마시고 많이 놀고 예쁘게 큰 젊은이는, 동물 이하로 생각하는 ‘탈레반 놈’을 잘 사냥해서 사냥 당한 그 탈레반의 시신 옆에서 기분좋게 떠드는 것입니다. 그에게 탈레반은 인간도 동물도 아닙니다. 그저 이성적 인간들이 벌이고 있는 목적에 적합한 행동, 즉 ‘저항세력 소탕’의 사물화된 대상물일 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해서 731부대의 대원이나 아우슈비츠 가스실의 보조원, 그리고 아프간에서 탈레반을 사냥하는 침략군의 일원이 되나요? 별 게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시이 시로 장군(731부대 부대장)의 부하들도, 루돌프 호스나 아르투르 리벤헨셀의 부하들도 특별히 ‘악마’로 큰 것이 아니었죠.

    인간을 해충으로 보기도 하는 ‘이성적 동물’

    하이쿠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모차르트 음악을 즐기고, 이런 ‘정상적’ 생활을 해온 사람들은, 어느 순간 순량한 국민답게 어버이 같으신 천황님이나 히틀러 수령님의 명령을 받들고 조국과 인류의 공동선, 악에 대한 선의 승리, 그리고 본인들의 지속적 안락한 삶을 위해 본인들에게 ‘비인간’이라고 설명되어졌던 대상물들을 산 채로 칼로 자르거나 독가스로 질식사시키기 시작했었죠. 파리나 모기를 죽이듯이.

    순량한 국민에게 "빨갱이는 파리 이하다", "유대인은 모기보다 더 해롭다"고 권위있게 설명하기만 하면, 그들이 그걸 믿고 아주 아주 이성적으로 ‘해충 박멸 작전’을 벌이죠. 인간이란 이성적인 동물이잖아요? 집단생활에 길들여지고, 그 집단생활 속에서 권위를 따르고 집단의 이성에 복종하는 데에 익숙해진, 그런 동물이잖아요?

    아프간에 간 덴마크 군인들도 마찬가지죠. 어릴 때부터 컴퓨터게임하면서 ‘살인’도 하나의 재미일 수 있다는 생각에 길들여지고, 우파 신문에서 "이슬람 광신도들이 세계 만악의 근원"이라는 걸 배우면서 ‘탈레반’이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해지고, 교수, 목사, 상사로부터 "탈레반을 살충하면 아프간이 우리 덴마크처럼 평화로운 민주사회가 될 것"이라는 권위있는 말을 들은, 그들은, 바로 ‘살충작전’에 나서죠. 아주 즐겁고 유쾌하게, 즐기면서 사는 진정한 덴마크 식으로…

    옛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를 ‘잉여가치 착취의 과정’으로 설명했는데, 이 이야기는 진리의 반쪽일 뿐입니다.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잉여가치가 자본가에 의해서 수취되는 것도 맞지만, 컴퓨터게임부터 신문까지 사회의 이미지/정보유통 시스템에 노출돼 있는, 그리고 그 어떤 다른 사회도 상상하지 못하는 노동자가 대개의 경우에는 자본가의 생각을 공유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즉, 자본주의는 동시에 피착취자들의 순치과정이기도 하는 것이고, ‘정상적’ 피착취자는 착취자의 세계관을 대체로 공유하고, 언제든지 착취자의 위치를 점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입니다. 노동자 출신의 노무현이나 이명박이 악랄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행자가 되는 게 대한민국만의 사정인 줄 아세요?

    정상적 절차를 거친 살인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고, 노동자 출신이 아니더라도 중산층 하류의 출신인 레이건 같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를 밀고 나가는 경우를 얼마든지 외국에서도 찾을 수 있죠. 특히 신흥자본주의 국가들의, 푸틴과 같은 보스들을 보면 하층 노동자 출신이라는 게 당장에 표시가 나죠. 쓰는 언어나 제스처 때문에.

    그렇다고 그 정책은 노동계급에 유리하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본주의의 힘이라는 게 있다면, 이처럼 전 사회를 그 이데올로기로 ‘무장’시키고 각자의 마음에 그 이데올로기를 각인시키는 게 바로 그 힘입니다. 그러니까 ‘정상적’ 덴마크 젊은이가 아프간에 가서 ‘인간 사냥꾼’이 되는 게 ‘정상’일 뿐이죠.

       
      ▲영화의 한 장면.

    그러면, 근대적 인간이 ‘정상적’ 절차를 거쳐 살인을 기반으로 삼는 이 지옥적 사회의 ‘정상적’ 구성원이 되지 않는 방법이란 있나요?

    진부한 답일 수는 있지만 집단적 대(對)사회적 투쟁, 즉 계급 투쟁과 관련된 경험이 아니라면 아주 어려울 수 있는 것입니다.

    투쟁 과정에서는 이 사회의 실체를 확인하고, 인간적인 연대를 경험하고, 선한 목적을 위해서 개인적 희생을 감내해본, 그런 사람이라면, 적어도 생각없이 국가와 자본을 위한 ‘사냥꾼’이 될 확률이 적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일시적 투쟁 참여도 ‘사냥꾼’으로서의 거듭나기(?)를 완전히 예방하지도 못해요. 1968년의 신화, 학생 혁명의 화신인 다니엘 콘벤디트가 유고 공습을 열성적으로 환영하고 아프간 침략을 주저없이 긍정하는 녹색당의 보수적 정치꾼이 된 걸 못보셨나요?(http://en.wikipedia.org/wiki/Daniel_Cohn-Bendit)

    공산주의 경험의 긍정적 평가가 필요하다

    단순히 일시적 참여를 했을 뿐만 아니고, 이론적, 알음알이의 차원에서도 자본주의가 왜 아우슈비츠와 아프간 침략을 낳을 수밖에 없는지, 자본주의의 ‘정상적’ 시민이 왜 잠재적으로 살인자일 수밖에 없는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 즉 사회과학을 제대로 익힌 사람이라면 학생 시절 단지 한 때에 재미 삼아 운동해 본 사람에 비해 자본주의의 각종 유혹들을 경계할 만한 힘을 더 가질 걸요.

    그리고 알음알이 차원뿐만 아니고 감성적 차원에서까지도 돈을 벌고 쓰는 영혼없는 생산/소비의 순환에 대해 매우 강력한 반감을 가지는 사람이 아니라면, 역시 ‘정상적 국민’의 원상태로 돌아갈 가능성은 큽니다. 투쟁 경험, 이론 습득, 감성적 반자본주의적 성향, 이 ‘삼위일체’라면 이 마왕의 예토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헐값에 팔지 않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죠. 사실,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옛날에 <강철이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라는 공상주의적 성장 소설이 구동구권에서 아주 유행했는데, 공산주의자의 인격 형성 과정, 공부 과정, 투쟁 과정을 그리는 이 소설을, 제가 최근에 다시 읽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인간으로 만든 사람들이 한 사회의 중심축이 될 수 있다면, 우리들의 ‘지옥 탈출’이 가능할는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 소설의 주인공 코르차긴 정도의 집념과 오기,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 아니라면, 인간으로서의 諸惡莫作, 諸善奉行(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법구경 구절-편집자)의 삶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 나락에서 결국 자기도 모르게 한 명의 야차나 아수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차원에서는, 20세기 마지막의 진정한 종교, 공산주의의 경험을 좀 긍정적으로 재평가해야 할 필요성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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