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핵 위협이 총성 멈추게 했나?
        2010년 09월 02일 06:0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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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장면 (출처: 미국국립문서보관소)

    한반도에서 총격 소리가 멈춘 지 30개월 후,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은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한국전쟁을 끝낼 수 있었던 데에는 핵무기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협상이 조속히 진척되지 않으면 중국에게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확고한 경고(unmistakable warning)”을 보냈다며, 이러한 핵위협이 효과를 거뒀다는 주장은 “매우 적절한 언급”이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기용된 덜레스는 핵무기 신봉자였다. 그는 1948년 미국 국민들은 필요하다면 핵무기 사용을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52년 5월에는 ‘대담한 정책(A Policy of Boldness)’를 주창하면서 미국의 전략은 핵무기와 강력한 동맹에 의존해야 한다고 역설해, 아이젠하워 당선 이후 ‘뉴룩(New Look)’ 정책의 기초를 닦기도 했다.

    객관적인 사실 여부를 떠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북한과 중국에 대한 핵 위협 덕분에 한국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고 믿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휴전협정에 동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전선을 확대할 것이다. 그들은 전면전이나 핵공격을 원하지 않았다”며, “핵전쟁의 위험”이 “그들을 통제하는데 유용했다”고 말했다.

    덜레스는 정전협정 5개월 후에 열린 버뮤다 회담에서 영국 및 프랑스 대표단에게 “공산주의자들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미국의 의지를 확인하면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고 주장했고, 이듬해 4월 제네바에서 열린 한반도에 관한 정치회담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는 당시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핵무기를 실전에서 승리를 보장해주는 ‘절대 무기’이자 사용 위협을 통해 상대방을 길들일 수 있는 유용한 ‘외교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러한 정책결정자들의 인식은 한국전쟁 이후 미국 핵전략을 주조하는데 인식론적 뿌리를 이루게 된다. 적의 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공격에도 핵무기로 보복하겠다는 ‘대량보복 전략’의 역사적 뿌리가 바로 핵 위협이 한국전쟁을 끝냈다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자기만족적 판단에 있었던 것이다.

    아이젠하워의 등장과 스탈린 사망의 교차

    1953년 초는 한국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트루먼의 전쟁 수행 방식에 불만을 품고 ‘힘의 과시’를 통해 한국전쟁 종식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등장은 확전과 핵전쟁의 위험성을 높였다.

    이를 뒷받침하듯, 훗날 덜레스 국무장관은 “우리는 이미 전장에 원자폭탄을 운반할 수 있는 조치를 취했다”고 했고, 아이젠하워 보좌관인 아담스(Sherman Adams)는 1953년 봄에 “오키나와에 핵폭탄을 배치했다”고 말했다. 반면 북한군과 중국군의 피의 대가로 미국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서고자 했던 스탈린의 사망은 북-중-소 3국이 전쟁 종식에 합의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상대방의 절멸을 통해 통일을 추구했던 1950~51년 초의 ‘강(强) 대 강의 대결’ 시기를 겪고, 38선을 마주보고 피비린내 나는 교전과 지루한 정전 협상이 조우하는 1951~53년 초의 ‘교착 상태’를 지나, 53년 봄부터는 확전과 휴전을 동시에 품은 ‘강 대 온(溫) 대결’로 접어들었다.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정전 협상은 휴전선의 획정, 휴전협정 이후 비행장의 복구, 중립국감독위원회에 소련의 참여 여부, 그리고 전쟁포로 석방 및 송환 문제가 주요 쟁점이었다. 그러나 52년 3월 다른 사안들에 대한 이견은 해소되었지만, 포로 송환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계속되었다. 이 문제로 정전 협상이 결렬과 재개가 반복되는 사이에 양측 사상자 수도 크게 늘어났다.

    정전 협상이 진행된 2년간 미군 사상자 수는 8만5천명에 달했고, 포로 협상이 진행된 15개월간 미군과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 전체 사상자 수도 약 12만5천명이었다. 북한군과 중국군 23만4천명도 정전 협상 2년간 목숨을 잃었다. 이들 수치에는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포함되지 않았다. “악마는 디테일이 있다”는 말을 상기시켜주듯, 포로 송환 문제로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린 것이다. 동시에 ‘더 빨리 휴전은 불가능했느냐’는 보다 본질적인 질문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전쟁 휴전 협상 타결에 2년이나 걸린 원인과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직간접적인 교전 당사국들 가운데 어떤 나라들이 휴전을 원치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북진 통일’을 국시로 내세우면서 휴전 협정에 결사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전쟁 지속 여부의 열쇠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 쥐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승만 정권의 이러한 태도는 결정적 변수로 보기 어렵다. 인기 없는 전쟁으로 궁지에 몰린 트루먼 행정부는 물론이고, 아이젠하워 행정부 역시 한국전쟁 종식을 핵심적인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다. 공산군 측의 직접 교전 당사국들인 북한과 중국도 휴전을 희망했다. 그러나 그 배후에 있는 실력자인 소련의 스탈린의 생각은 달랐다. “스탈린은 유엔군이 또 다시 북한으로 진군하지 않는 한, 교착 상태에 빠진 전쟁이 계속되는 것이 이익이 된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당시 스탈린은 네 가지 측면에서 이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 미국을 한반도에 묶어두는 것이 미국의 경제력을 소진시키고 유럽에서 소련이 우위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봤다. 둘째, 한국전쟁 수행 방식을 둘러싼 미국과 동맹국의 이견이 소련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셋째, 미국의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미군 포로 신문을 통해 미국의 군사 작전과 기술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다. 넷째,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적대 행위 지속은 중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제고하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익은 소련이 지상전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소련군의 피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비용 대 이익’을 계산할 때, 스탈린으로서는 휴전 협상의 지연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휴전을 둘러싼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갈등

    스탈린의 소련과는 달리 중국은 52년 하반기 들어 전쟁 종식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이 사망하기 전까지 정전 협상을 둘러싼 중소간의 갈등이 불거졌고, 중국 내에서는 스탈린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중국군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는 불만도 제기됐다.

    한국전쟁 개입 결정과정부터 중국 지도부의 상당수는 직접 개입을 꺼려했다. 개입을 꺼려했던 인사들 가운데에는 총리이자 외무장관인 저우언라이, 중국공산당 부주석인 리우샤오치, 훗날 마오쩌둥이 후계자로 지목한 린비야오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오랜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 재건의 시급성, 국민당 잔당 세력의 소탕, 미국에 대한 군사적·산업적인 열세, 오랜 내전으로 치친 인민해방군의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한국전 참전을 무리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이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국내 반동 세력의 발호와 국민당의 중국 본토 공격을 야기할 수 있고, 미국과의 대결이 불가피하다면, 중국 본토보다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의견을 제시해 반대파들을 설득·제압했다.

    그러나 중국의 한국전 참전 대가는 혹독했다. 약 3백만명이 전투와 병참 지원을 위해 동원되었고, 이 가운데 약 3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국 내부에서도 3년간의 동원 과정에서 3백만명이 죽었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전비(戰費)도 정부 예산의 절반 가까이를 잠식하면서 중국 경제는 더욱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세금을 더 거두고 광범위한 대중 동원 캠페인을 전개했는데, 이는 한국전쟁에 필요한 물적 토대를 갖추는 성과를 낳았지만, 동시에 산업 불균형의 심화와 농촌 사회의 불만, 그리고 기아 사태를 촉발하면서 중국 내부의 불안도 동시에 가져왔다.

    이처럼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자, 중국 지도부는 52년 하반기에 소련 모델을 모방해 5개년 경제발전 계획을 작성하고, 경제 부처를 신설해 훗날 개혁개방정책의 주역이 된 덩샤오핑 등 유능한 지방 관리를 대거 등용해 경제 성장에 박차를 가하고자 했다. 그런데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이 투입되어온 한국전쟁의 종식이 절실히 필요했다.

    경제 성장과 한국전쟁 종식. 이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저우언라이는 52년 8~9월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을 만났다. 두 차례의 면담을 통해 저우언라이는 소련의 경제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한국전쟁 종식을 원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특히 정전 협상의 최대 쟁점으로 부상당한 포로 문제와 관련해 저우언라이는 1차 면담에서 “포로 문제는 나중에 다시 다루고 먼저 정전협정에 서명하자”는 입장을 전달했다. 이는 유엔 측이 제안한 ‘선 휴전, 후 협상’과 맥락을 같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 방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저우언라이는 2차 면담에서 전쟁 포로를 중립국인 인도로 보내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스탈린은 경제 지원과 한국전쟁을 연계해 저우언라이를 압박했다. ‘군사 및 경제 지원을 할테니, 전쟁을 계속하라’는 메시지였다. 소련의 군사 및 경제 지원이 절실했던 중국으로서는 속절없이 스탈린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으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한 중국은 52년 10월 인도가 유엔에서 내놓은 제안, 즉 포로를 인도를 비롯한 중립국으로 보내자는 결의안에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소련의 유엔 대표는 인도의 제안에 반대했고,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중국도 지지 입장을 철회하고 말았다.

    스탈린의 사망과 정전 협상의 가속화

    북한군과 중국군의 피의 대가로 미국과의 냉전 구도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했던 소련은 스탈린 사후에 극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소련의 새로운 지도부도 한국전쟁 종식을 선호하고 나선 것이다. 트로이카 – 베리아(Lavrentii Beria), 말렌코프(Georgii Malenkov),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 가운데 가장 강경파였던 몰로토프조차도 “스탈린은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려고 한 북한의 계획을 승인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들 트로이카와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한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피폐해진 경제 재건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의 필요하고, 한국전쟁 종식은 그 첫 단추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를 반영하듯 말렌코프는 3월 9일 스탈린의 장례식에서 “평화 공존”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3월 15일에는 이른바 “평화 구상”을 발표하면서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평화적인 수단을 통해 해결하지 못할 갈등은 없다”며 대미 관계도 이러한 정책에 포함된다고 발표했다.

    소련의 신정권이 데탕트 의지를 피력하고 나서면서 한국전쟁 종식의 새로운 전기도 찾아왔다. 소련은 3월 19일 김일성과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보내 북-중-소 3국은 첨예한 문제를 해결하고 정전협정에 도달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조속한 정전을 희망한 북한과 중국의 요구를 일축했던 소련이 스탈린 사후에 오히려 북한과 중국에게 정전 협상 마무리를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자 북한과 중국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스탈린 장례식에 참석한 북한과 중국 대표단은 소련 지도부와 만나 “북한과 중국측은 적대국과의 합리적인 타협에 기초해 전쟁을 종식”하는데 합의했다. 이러한 합의를 뒷받침하듯, 3월 27일 공산군 측은 부상당한 포로를 교환하자는 유엔의 제안에 동의했다. 김일성도 3월 29일 평양을 방문한 소련 대표단에게 소련 측의 제안을 크게 환영하면서 조속한 정전 협상 타결을 희망했다.

    3월 31일에는 저우언라이가 귀국 의사가 없는 포로들을 중립국으로 보내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스탈린에게 거부당한 제안을 소련 신정권의 동의하에 공개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소련의 몰로토프 외무장관도 4월 2일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소련은 동맹국들과 입장 및 행동을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소련이 스탈린 사후 대미 관계 개선 및 한국전쟁 휴전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미국은 미소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은 정전 협상 타결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주소련 미국 대사 볼렌은 4월 20일 한반도 문제의 조속한 해결이 양국 관계의 “리트머스 시험”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전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소련 역시 “조속한 정전 협상 마무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고 화답했다.

    미국의 핵 위협이 총성을 멈추게 했는가?

    스탈린 사망을 계기로 정전 협상은 급물살을 탔다. 공산군 측은 유엔군의 제안을 수용해, 6월 8일 포로교환 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나 ‘북진 통일’과 한미 상호 방위조약 체결을 강력히 요구했던 이승만은 막바지에 다다른 정전 협상에 찬물을 끼얹었다.

    6월 18일 미군 관할하에 있었던 반공 포로 2만여명을 몰래 석방한 것이다. 이에 격분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승만에게 강력 항의하는 한편,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를 보내 이승만과의 담판에 나섰다.

    당시 이승만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수준의 한미동맹, 즉 유사시 미국의 자동개입이 포함된 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밀고 당기는 지루한 협상은 7월 12일 한미 공동선언문 발표로 마무리됐다. 이승만은 정전 협정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고, 미국은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의사를 표명했다. 그리고 보름 후 3년 1개월 동안 지속된 한국전쟁도 일단 멈췄다. 그러나 이는 ‘종전’이 아니라 ‘정전’이었고, 불안한 정전체제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한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정전협정의 공로를 미국의 핵 위협으로 돌렸다. 5월 하순 공산군 측에 다양한 경로로 전달한 ‘최후통첩’, 즉 공산군 측이 정전협정에 동의하지 않으면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확전도 불사하겠다는 위협이 정전 협상 타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국과 북한은 이전부터 휴전을 희망했고, 소련도 스탈린 사후 대미 관계 개선 및 한국전쟁 종결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는 미국의 최후통첩 전달 전의 일이었다. 또한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으로부터 5월 21일 대중국 메시지를 전달받은 인도의 네루 총리는 나중에 이를 중국에 전달하지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는 미국의 핵 위협이 정전협상 타결의 결정적 배경이었다는 주장이 검증을 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푸트(Rosemary J. Foot)는 미국의 핵위협에 대한 중국의 반응을 자세히 분석해 “핵 위협이 전쟁을 끝내는데 부분적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아이젠하워와 덜레스가 주장한 것처럼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푸트는 난항을 거듭했던 정전 협상이 마무리될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의 핵 위협보다 다른 요인들이 더 컸다고 지적했다. 소련, 중국, 북한의 경제적 압박, 스탈린 사후 미국과의 긴장 완화를 원했던 소련의 대외 노선 변화, 그리고 재래식 폭탄을 이용한 유엔군의 집중적인 공습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공산 진영의 맹주이자 한국전쟁 배후의 실질적인 실력자였던 소련은 1952년 가을 들어 경제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0월에 열린 9차 당 대회에서 소련 지도부는 강력한 국방력 건설을 위해서라도 경제 발전이 필요하다는 점에 의견을 모았다.

    당시 소련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서 냉전이 격화되면서 서독과 일본의 재무장에 큰 우려를 갖고 있었는데, 이는 서방세계와의 긴장완화를 통한 이들 나라의 재무장 억제 및 소련 자체적인 경제 건설을 통한 군사력 건설의 필요성을 동시에 가져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한반도에서 정전 협상을 조속히 마무리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로 간주되었다. 이를 반영하듯 스탈린은 1953년 2월 28일 측근들에게 한국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탈린은 닷새 후에 숨을 거뒀다.

    중국 정부 역시 52년 12월에 5개년 경제발전계획을 발표하는 등 경제 발전에 주안점을 두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은 신생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정부 예산의 50% 가까이를 국방비로 투입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막대한 군비지출은 한국전쟁 개입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전쟁의 조속한 종결은 중국의 경제성장의 필수 조건으로 간주된 까닭이다.

    북한 역시 전쟁 시기에 경제 규모가 3분의 1 이하로 급감하고 급격한 물가상승 및 조세 체계의 붕괴로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었다. 푸트는 이처럼 소련, 중국, 북한의 경제난이 정전 협상에 대한 이들 나라의 인식을 변화시킨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군사적으로도 미국의 핵 사용 위협보다 유엔군의 재래식 폭탄을 이용한 집중 공습이 북한에게 더 큰 타격을 입혔다고 주장했다. 53년 5월 들어 유엔군은 북한의 댐을 맹폭했다. 5월 13일에는 평양 남쪽에 있는 독산댐을 파괴해 주변 일대가 물에 잠겼고, 5월 15일에는 추가적으로 두 개의 댐을 파괴했다.

    이에 따라 주변 가옥과 곡창지대, 그리고 철도·도로가 침수되고 다수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러한 유엔군의 공습은 이미 초토화된 북한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고, 이는 북한이 정전 협상에 보다 유연해진 태도로 임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 푸트의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핵 위협이 총성을 멈추게 했다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주장은 일종의 ‘미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신이 가져온 결과는 엄청났다. 미국은 이후 핵 위협을 외교 수단으로 삼는 경향이 더욱 강해졌고, 이는 북한과 이란에게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으면, 핵 선제공격 대상으로 남겨두겠다는 오바마 행정부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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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참고 자료

    Elizabeth A. Stanley, "Ending the Korean War: The Role of Domestic Coalition Shifts in Overcoming Obstacles to Peace," International Security(Summer 2009),
    Roger Dingman, "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 International Security (Winter, 1988-1989),
    Trent A. Pickering, “A Nuclear Dilemma-Korean War Deja Vu," U.S. Army War College March 2006
    Rosemary J. Foot, “Nuclear Coercion and the Ending of the Korean Conflict," International Security(Winter, 1988-1989), p. 100.
    인용한 미국의 비밀해제문서 사이트: http://www.gwu.edu/~nsarchiv/; http://www.trumanlibrary.org/oralhist

    *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 최근에 쓴 책으로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가 있습니다. 다음에는 본 연재의 에필로그로, 한국전쟁 이후 세계 핵 질서의 변화를 다룬 글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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