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가을의 첫 사과
    2010년 08월 31일 03:2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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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역사를 정사로 보던 야사로 보던 아주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는 왕의 다음을 잇는 후사(後事), 즉 세자책봉 과정과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숙종대의 장희빈과 인현왕후처럼 여인들의 역사도 결국은 자신이 낳은 아이가 왕이 되느냐 아니냐를 중심으로 전개된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 가장 익숙하게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는 세종이 왕이되는 이야기다.
태종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고 그 이름이 첫째가 양녕대군 둘째가 효령대군 셋째가 충녕대군이었다.

이제(李褆) 양녕대군은 태종 이방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시서에 능했고 영민하기 그지없던 그였기에 자연스레 세자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아버지 태종이 권력을 위하여 정적들을 제거하는 모습에 환멸을 느낀데다가 셋째인 충녕이 왕의 자질이 있을 뿐만 아니라 태종이 더 총애한다는 사실을 알아 차린다. 하여 일부러 왕도의 법도를 무시하는 행동을 저지르고 자유분방하게 행동거지를 가져가 결국 폐세자 당하고 셋째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둘째 효령대군과도 의논을 하니 효령대군도 출가하여 스님이 되고 만다.

살아서는 왕의 형이요
죽어서는 스님의 형이니
부러움과 거리낌이 없도다

형제들과 우애 좋게 지내다가 천수를 다하고 운명하면서 남긴 양녕대군의 싯구다.

영,정조 시대에도 결국 왕이 되지 못하고 뒤주 안에서 죽어가야 했던 사도세자 이야기도 있다. 저간의 속사정이야 당시 사람들의 몫이고 이런 것들이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러고 보면 맏아들 상속의 원칙이 순탄하게 지켜진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여러 이유로 인해 상황이 비켜간 것이다. 그런데 사과나무에서도 대를 잇는 우여곡절 이야기들이 주렁주렁 매달리는게 아닌가?

   
  ▲ 제1번과와 2번과가 냉해를 입어 밀려나고 3번과가 열매를 달기 시작했다. 올해 이런 현상이 90%정도에 이른다. 농부의 설명이 구체적이다.

   
  ▲ 화방6개 올해는 봄철 내내 벌어진 이상기후로 인해 냉해를 입어 제1번과가 솟았다가 도태되고 2번과가 대신하였다가 또 도태되고 3번 과가 자리를 잡았다.

사과나무가 얼마나 영리한지…

꽃눈 하나에서 하나의 꽃만 틔우고 수정하여 한 개의 열매를 맺는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한 꽃눈으로 6개의 꽃을 피우고 수정이되면 [그림2]처럼 6개의 화방이 생기고 열매를 매달 준비를 마치는것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8월 중순 필자가 농장을 방문한 날이다. 다른 지역에서 사과농장을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합석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올해는 ‘3번과’가 대세라서 씨알이 굵은 게 별로 나오질 않고 중간크기가 주종을 이룰 것이다”는 이야기를 한다. “3번과?” 사과의 크기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궁금해서 물었고 그 신기한 사과나무의 생명짓에 푹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유통 일을 하면서 사과를 참 많이 다루고 판매하고 구매하는 일을 했건만 정작 사과나무가 풀어내는 그들의 이야기를 전혀 살펴보질 못했다.

사과나무 입장에서는 다음 대를 이을 후사를 생산하는 것이 첫번째 임무일 터, 모든 생명의 에너지를 다하여 다음 대를 생산한다. 거기다가 더 정확하게 이어가기 위하여 6개의 꽃을 한 꽃눈에 달리게 하여 만일의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안목도 지니게 된것이다.
 

   
  ▲ 4월에 가운데 조금 큰 꽃몽우리 1개와 5개의 꽃몽우리가 모여있다.
각 몽우리들이 활짝 꽃을 피우면 벌들이 날아와 수정이 된다. 수정이 이루어진 꽃들은 꽃잎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고 마침내 화방 6개가 생겨난다. 여기에서 사과가 익어가는 것이다. 역시 가운데 있는 1번과가 제일 크다.

자연이 정해준대로 1번 꽃봉오리가 세자책봉을 받은 것이다. 제일 크게 진보라색을 띄고 가운데 우뚝 솟아올라 햇살을 받고 영양을 받아 다음을 준비하는 영광의 자리다. 그런데 아뿔사! 냉해가 오거나 태풍이 부는등 예기치 못한 상황(기상이변, 외부충격)이 오면 그만 도태되어 위축되어 떨어지고 만다. 그러면 사과나무는 2번 화방을 자연스럽게 올려서 그 역할을 대신하게 한다.

그런데 올해처럼 그 두번째 화방 마저 냉해로 인해 낭패를 보게 되면 3번과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안정적으로 셋째가 자리를 잡으면 나머지는 적과작업을 거쳐 일일이 손으로 제거한다. 그 시점부터 나무는 최선을 다해 영양물질을 공급하기 시작하여 빨갛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사과나무는 대를 잇기 위한 안전판으로 6개의 꽃을 피우고 6개의 화방을 이루게 하고는 거기다 한술 더 떠 문제가 생기는 경우 6형제가 차례대로 그 일을 수행하도록 안배한 것이다.

"야! 이거 옛날 왕세자 책봉하는 거하고 똑같네^^"
"맞아요! 딱 그거에요"

사과나무의 경이로운 매력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사람들처럼 권모술수로 서로 해하지 않고 자연의 섭리대로, 순서대로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과의 크기는 1번과가 그대로 진행이 되었을 경우에 대과가 많이 나오고 2번이 그 다음으로 크고 3번과가 대세인 올해는 중간크기가 90%정도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상은농장 전체적으로 보면 달려있는 과수의 숫자는 예년보다 더 달렸다.

작년에는 ‘뺀질이와 멍텅구리’ 사과로 이야기를 더했고 올해는 인간사 세자책봉처럼 나름대로의 ‘생명잇기’, ‘삶의 방편’을 펼치는 사과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여름사과 하양과 홍로

   
  ▲ 9월 상순이지만 수확은 8월 하순부터 가능하다. 무게는 300~350g으로 중간 정도이고 형태는 긴 원형이다. 껍질은 짙은 홍색에 줄무늬가 있다. 속살은 흰색이며, 조직이 치밀하고 과즙이 많아 맛이 매우 좋다.

푸른색깔의 아오리 사과가 새해 첫 사과로 여름철에 세상에 나오지만 사과고유의 깊은 맛을 느끼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그 해 첫 사과 맛은 역시 9월초순경 제 맛이 드는 하양, 홍로부터 시작한다고 보면 맞다. 다른 과일들과 구별되는 아삭아삭한 식감과 신맛이 가미된 단맛은 무주 상은농장 사과 홍로의 비결중의 하나다. 일반적으로 홍로는 단맛에 방점을 찍는데 신맛이 가미되면 햇 사과의 그윽하고 깊은 맛은 나무랄 데가 없게 된다.

게다가 여름사과의 큰 결점 중의 하나가 저장성이 아주 많이 떨어진다는 것인데 조금만 지나도 푸석푸석해져서 아차 싶으면 낭패를 보기 일쑤다. 필자도 서너 번 여름사과를 유통하면서 손해를 본적이 있다. 상은농장 홍로는 일반 홍로들에 비해 더 오랫동안 상온에서 저장이 가능하다. 아주 중요한 여름사과의 장점중의 하나가 되겠다.

   
  ▲ 무주상은 농장은 대덕산자락 해발 580여m높이에 위치하고 환경오염원이 없는 청정지대에 소재한다. 일교차의 폭이 크고 햇살이 과수원 전체를 늘 휘감아 돈다.

상은농장의 사과가 맛있는 이유는 사람과 나무 그리고 하늘의 합작품으로 이루어지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농사를 지으며 생각을 하고 또 생각해봐도 “자연에 가까워야 제 맛을 내더이다”는 농부의 확고한 원칙이 재배의 전과정과 수확의 과정에 걸쳐 반영이 되므로 맛있는 사과가 달리는 것으로 보인다.

사과를 사과답게 만들고 그 격을 높게 만드는 12가지 미량원소(붕소, 아연, 마그네슘, 철, 망간, 황…)를 소중하게 관리하고 사과나무와 관계 맺게 하여 다른 사과들과는 구별이 되는 맛을 구현하는 것이다.

 

   
  ▲ 농장의 부사가 8월 볕에 영글어 가고 있다. 두달여가 지나 첫서리가 내리면 이 친구들은 ‘뺀질이와 멍텅구리사과’로 제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는 존재들이 된다.

농장전체의 수세가 아주 건강해 보이고 달려있는 홍로, 양광, 감홍, 부사… 등등 싱그런 기운이 넘쳐난다. 깜깜한 밤에 들어가보면 사과과육의 이미지들이 은빛으로 뿌옇게 드러나 신비롭게 보여진다.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칠흑 같은 밤 흰색소복빛깔이 투영되는 으스스한 밤풍경(?)과 비슷해진다.

   
  ▲ 주인농부 양한오

8월 16일자 현장에서 살짝 빨간빛이 도는 홍로를 한 개 따서 입에 베어 물어 분다. 아직 보름여 이상을 더 있어야 제대로 익는 거지만 풋사과의 맛 그대로를 느끼고 싶었다. 신맛이 강하고 단맛은 아직이다. 그런데도 먹을만했다. 아 풋사과 맛은 이런거구나… ^^

농장을 둘러보고 올라오는 길 내내 나는 참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구나 싶어서 혼자 슬몃슬몃 웃었다. 사과 하나하나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이 숨어있고, 꺼내서 살피면 살필수록 꿈결을 거닐 듯 재미에 빠져들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부사가 나올 무렵에는 더 기가막힌 재미난 이야기가 또 있다고 하니 잔뜩 기다릴 수 밖에 없다.

농사를 잘 짓는 고수(高手)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정확하게 드러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자기가 키우는 작물들을 사람의 살림, 사람의 생각에 빗대어 설명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 대하듯 작물을 대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살아가는 보편적인 상식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하니 알아듣기가 얼마나 쉬운지….

그러고 보면 사람이나 작물이나 보통 영리한 존재들이 아니다. 아니지, 사람은 아주 개인적인 이익에 눈멀어 공생(共生)의 뜻을 저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작물들은 섭리(攝理)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또 다른 환경을 맞이하며 진화해 나가는 것이다.

꽃6개를 피우고 화방6개를 만들어 놓고는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순서대로 자기역할을 하도록 안배한 사과나무의 뜻 또한 곰곰이 곱씹을수록 정감이 간다.

그 경이로움에 마음이 가 닿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럼 왜 6개인지도 사과나무는 알고 있겠다. 지금까지는 6개 화방으로 대응하며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7개가 될지 8개가 될지 모르는 일이다. 혹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다음 생명을 이어가는 안전핀을 만들지 않을까?  

자연에 가까워야 제 맛을 낸다

격(格)이 높은 사과는
재배하는 농부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 마음 어디로 가겠는가?
사과나무로 옮겨간다

농장의 지리적 조건과 풍광
색다르게 도전하는 재배방식

단순한 단맛보다 아삭거림
약간의 신맛이 가미된 고유한 풍미

단단하고 야무져 보이는
색택과 장기저장성

저마다의 고유한 향이
정확하게 발현이 된다

대를 이으려는 나무의 본성에
우리들의 마음이 다가가고

자연에 가까울수록
제 맛을 내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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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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