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한 '사회귀족', 놀라운 단결력과 흡수력
        2010년 08월 29일 10: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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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27일) 가을 학기의 첫 한국사회/정치사 수업을 했습니다.(http://www.uio.no/studier/emner/hf/ikos/KOR1504/index.xml) 학생들이 평소보다 훨씬 많이 수강 신청해 정원이 일찍 차는 바람에 신청이 마감돼버렸습니다.

    한국정치사를 왜 듣습니까?

    그런데, 수강신청자 중에서는 약 30% 가까이 국내에서 온 교환학생들이었는데, 그 첫수업에는 그들과 관련이 있는 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보통 저는 개강 직후의 첫 수업에는 학생들에게 ‘수강신청의 동기’를 꼭 묻습니다. 그걸 알아야 뭘 어떻게 가르치는 게 가장 효율적 방편인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르웨이 학생 다수의 수강신청 동기는 "한-일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고 싶다", "한국 정치문화는 너무 궁금하다", "북한에 대해서 신문에서 악선전만 하는데, 진리를 알고 싶다", 심지어 "고교 시절에 한국에 1년 교환학생으로 갔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 정도였는데, 국내에서 온 교환학생 몇 명이 주저없이 "교수가 한국에서 유명한 사람이니 그 수업에 들어왔다"는 동기(?)를 밝혔습니다. 노르웨이 급우들의 상당한 몰이해를 일으키면서요.

    노르웨이 같이 ‘동등함'(likhet)이 절대적 가치인 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비해 "이름이 더 났다"는 언급을 공개적으로, 본인과 타자 앞에서 잘 안하거든요. 위화감이 조성되고 경쟁이라는, 노르웨이 사회가 가장 혐오하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죠.

    저는 그 ‘동기’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실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 특히 한국과 같은 ‘超자본주의적’ 사회에서는 – "이름이 났다"는 게 "당신이 타락될 가능성은 99.9%"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명리(名利)를 피해야 한다"던 옛 선비들은 ‘이름’을 ‘수양의 방해물’로쯤으로 관념적으로 알았는데, 그 사고를 요즘 사람의 눈으로 보면 참 가상하죠.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특징이란, 자연이나 제품만이 상품화되는 게 아니고 인간 각자가 다 자기 스스로를 팔아야 하는 ‘인간 상품’이 된다는 것입니다.

    명품 인재의 조건

    대량생산 시대의 자본주의 하에서는 노무자는 일일 8시간의 노동을 팔았으며 기술자나 전문가는 그 기술이나 전문지식을 팔았지만, 모든 것이 다 상품이자 경쟁 대상이 되는 후기 자본주의는 ‘인간 그 전체’를 아주 총체적으로 팔고 사는 것입니다.

    몇십 명과의 경쟁을 뚫고 재벌에의 입사에 성공하는 ‘명품 인재'(참, 사람을 ‘명품’으로 호명하는 그 관행 자체를 잘 고찰해보시기 바랍니다!)는 단순히 회계학과 영어를 잘해서, 북한인이 ‘수령님’의 배지를 달듯이, 그 무슨 ‘글로벌 기업’의 배지를 자랑스럽게 달 권리를 받습니까?

    천문의 말씀에요! 일단 성격부터 ‘원만쾌활’해야 하며, 윗사람에게 잘 ‘맞추어줄’ 줄 알아야 하며, 집단의 규율을 쉽게 내면화할 것이라는 보장이 있어야 하며, 기업이 상품화시킬 수 있는 그 어떤 ‘끼’라 할까 특기라 할까, 그런 것들이 좀 있어보여야 합니다.

    가령 협상할 때에 상대방의 기분을 잘 맞추어가면서 설득을 잘 한다든가, 남들보다 자신의 부하 사이에서의 경쟁을 더 잘 부추긴다든가 이런 것입니다. 이 ‘특별한 사항’을 또 면접 때에 고용주에게 잘 ‘팔아야’ 당신은 자신의 노동력을 고가에 팔 수 있는 ‘특권’을 얻는 것인데, 그것이야말로 바로 인간의 ‘전체적 상품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술과 노동시간만을 파는 게 아니고 기업과 ‘안성맞춤’될 나의 인격, 성격, 나의 모든 것을 다 팔아야 대한민국이 알아줄 만한 ‘명품 인간’이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단순노무직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한데, 유럽 같으면 ‘바깥’ 출신의 이민자들이 보통 차지할 청소업, 건설업 등에서의 일자리들을, 국내에서는 대개 신분상승에 대한 아무런 희망이 없는 세습적 빈민들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현대판 노비에 대한 경멸

    쉽게 이야기하면, 오늘날 양극화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공사장 잡부고 어머니가 식당 노동자라면, 그 아들이 마트에서 칼을 잡아 고기를 썰면서 평생 이렇게 살 확률이 아주 높으며, ‘명품 대학’을 나와 ‘명품 인간’이 될 확률은 0%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들 현대판 천민층을 ‘명품인간 후보생’들이 대체로 어떻게 사고하는가를, 지난 번에 자기 어머니뻘인 청소 노동자에게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막 해버린 한 경희대 여학생의 사례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과거의 사회에서 노비의 자식이 양민이 되기가 힘들었듯이,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청소노동자의 딸이 경희대처럼 ‘명문’이라고 말하기는 뭐한 수도권 사립대에도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학생은 자신과 세습적 신분이 다른 사람을 당연하듯이 짓밟은 것이죠. 물론 국내처럼 남 앞에서 ‘체면’을 챙기면서 사는 사회에서 이와 같은 극단적 경우들은 적지만, 대체로 ‘명품인간 후보군’은 그들을 먹여살리는 현대판 노비에 대해 무관심하고 경멸적입니다.

    지난 번에 쌍용노동자들이 살인적 진압을 받으면서 죽고 다치고 불구자가 됐을 때에 전국 캠퍼스에서 무슨 동요라도 있었습니까? 극소수의 양심적 학생들이 연대하러 나갔지만, 절대 다수는 ‘스펙’ 쌓느라고 바빴죠. 본인이라도 노동자가 아닌 ‘명품 사원’이 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입니다.

    ‘명품 인재’ 사회에서는 "유명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경쟁에서 남을 눌러 ‘명품 인재’급에서 ‘명푼 천재’급으로 도약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만큼 일신의 상품적 가치(몸값)이 올랐으면 머지 않아 국가나 자본쪽에서 ‘구매 제안’이 들어오게 돼 있죠. 자신의 상품적 가치를 우리에게 팔아 우리의 가치 극대화에 일조하라는 의미의 제안입니다.

    남한 사회귀족 계층의 놀라운 단결력

    그리고 그 다음 일은 불문가지죠. ‘노동 문제’에 대한 통쾌한 글들을 써서 유명해진 한 교수가 노동부 장관이 되어서 비정규직 양산에 큰 기여를 하고, 인권 변호사로 ‘몸값’을 올린 ‘명품’ 법조인이 극우정당의 대표가 되어서 신자유주의 정책의 선봉이 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한 때에 ‘양심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참신한’ 학자로 유명했던 사람이 비정규직을 해고할 권리를 가진 대학교 관리자가 된다면 그 비졍규직들을 어루만지면서 그 양심적 행진을 계속할 줄 아십니까? 웃기지 마세요. 그 양심적 내지 학자적 과거와 관계없이, 대학교 관리자가 된 뒤에 비정규직들에게 인간답게 대해주는 사람을 저는 아직 국내에서 본 바 없습니다.

    유명세를 올리고 그 유명세를 팔아 현대판 노비에게 곤장을 칠 권한을 갖게 되면 다들 결국 같아집니다. 북한도 그런 특징은 있지만, 남한의 ‘사회 귀족’ 계층의 내부 단결과 생각, 언어의 동일화는 아주 놀로울 정도입니다.

    한국이라는 경쟁의 지옥에서는 "유명하다"는 건 ‘명품 인간화에의 성공’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남 위에 군림하고 남의 피땀을 짜는 ‘주인님’ 대열에 합류합니다. ‘유명해진’ 방법이 ‘진보적’ 주장과 관련됐든, 처음부터 보수적 주장을 기반으로 했든 하등의 차이는 없습니다. 오히려 ‘진보’를 팔아 출세한 이들을 보면 더 파렴치하고 악질적이죠.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흡혈귀가 돼버리는 일을 방지하는 방법은 있는가요? 한 가지 방법이라면, 한국 사회의 ‘주인님’들을 대할 때에 일단 처음부터 그들이 하는 말 한마디도 그대로 믿지 않고 그들이 비록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만 내면은 이미 ‘상품’이라는 걸 늘 스스로 기억 환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계급적 적대자라는 걸 늘 기억하는 것이죠. 고루한 스탈린주의라고요? 그런데 그러한 마음의 태도라도 없다면 한국 ‘귀족 사회’의 그 탁월한 흡수력을 이기기가 매우 어렵다는 게 객관적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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