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감은 무섭고 현실은 서글퍼"
    By 나난
        2010년 08월 26일 09: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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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게는 몇십 권에서부터 많게는 수백만 권씩 팔리는 책.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저자만을 기억할 뿐, 그 책에 들어간 수많은 노동은 알지 못한다. ‘출판.’ 그 중에서도 외주출판 노동자들의 근로실태는 열악하기 그지없다. 편집자, 디자이너, 번역가, 대필가, 글작가, 그림작가 등.

    이에 <출판노동자협의회>는 ‘외주출판, 노동을 말하다’를 통해 책 뒤에 감춰진 외주출판 노동자들의 노동에 주목하고, 그들 스스로 자신의 노동을 말하고자 한다. 노동시간과 노동강도, 통제방식 등 불연속적 노동환경에 처한 그들이 스스로 ‘권리찾기’에 나선 것이다.

    <출판노동자협의회는>는 이번 기획을 바탕으로 외주출판 노동자와 유사한 형태로 일하는 가내노동자의 노동권 확보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 향후 법적․제도적 권리보장을 위한 입법안을 확정한다는 계획이다.

    이번 연재는 상대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외주출판 노동자들의 처지를 고려해 모든 글은 익명으로 처리될 예정이다. 이번 연재는 <출판노동자협의회>가 기획했으며 <레디앙>이 전한다. <편집자주>

    출판편집자는 책의 기획부터 전체 진행, 저자‧역자 관리, 교정교열, 그리고 보도자료 작성이나 홍보까지 모두 총괄한다. 이 중 책 내용을 확인하고,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고,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맞춰 수정하는 ‘교정교열’만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부분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이들은 다시 ‘단행본 교열자’와 ‘잡지 교열자’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단행본 교열자도 책 출간 날짜에 맞춰 작업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크지만, 그래도 책 교열 작업은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석 달 이상의 시간이 주어진다(물론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만드는 책들도 있다).

    ‘빨리’와 ‘꼼꼼히’ 사이의 줄타기

    하지만 잡지는 이 ‘마감’의 압력이 훨씬 크다. 오죽하면 ‘데드라인’이라 하겠는가. 발행 날짜가 정해져 있고, 그 날짜에는 어김없이 잡지가 나와야 하기 때문에 몸이 아파도, 집안에 큰일이 생겨도 어떻게든 일은 끝내야 한다. 그래서 주로 집에서 일하는 단행본 작업과는 달리, 잡지는 마감 때면 잡지사 사무실로 출근해 작업한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잡지들을 생각해보라. 만만치 않은 분량의 이 잡지들을 짧게는 이틀(주간지)에서 길게는 보름(월간지) 내에 모두 훑어보고 교열해야 한다. ‘빨리’와 ‘꼼꼼히’ 사이에서 어려운 줄타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작업해야 하니 노동 강도가 무척 세다. 마감이 끝나고 나면 녹초가 되어 한동안 다른 일은 맡지 못할 정도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컴퓨터 화면과 인쇄된 교정지를 들여다보며 교열 작업을 하다 보면 목, 어깨, 허리, 손목 통증에 시달린다.

    한창 바쁠 때는 화장실 가거나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자리를 떠나지 못할 때도 있다. 당연히 입맛도 없고, 밥을 먹고 쉬질 못하니 소화도 안 된다. 밤을 새는 일이 다반사다 보니 졸음을 쫓기 위해 커피를 물 마시듯 마시고, 밤에는 출출하니 군것질을 해댄다.

    그래서 잡지 교열자들은 속병을 달고 다닌다. 게다가 밤 한 번 새고 나면 며칠 동안 수면 패턴이 엉망이 되어 불면증도 고질병 중 하나다. 잡지 일을 그만둘 때 가장 큰 사유가 ‘건강 악화’다.

    4대 보험은 남의 나라 얘기

    하지만 이처럼 일 때문에 건강을 해쳐도 의료보험이나 산재보험 등의 혜택은 전혀 받을 수 없다. 계약직도 아닌 아르바이트 신분이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마감 때 출근하고 달마다 꼬박꼬박 돈을 받는 등 준직원이나 마찬가지지만, 잡지 교열자들은 대부분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다.

    당연히 4대 보험은 남의 나라 얘기다. 물론 퇴직금도 없다. 내 경우를 예로 들면, 창간부터 휴간까지 2년 동안 일한 잡지가 있었다. ‘휴간’이라는 회사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게 되었지만, 나는 퇴직금도 실업 급여도 받을 수 없었다. 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아무런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근로계약서를 쓰자고 요구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행이 쓰지 않는 쪽으로 굳어져 있는데, 홀로 계약서를 쓰자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저희와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소리밖에 더 듣겠는가?

    실제로 계약서 얘기를 꺼낸 적도 있지만, 잡지사 측에서 난색을 표했다. 일이 없으면 백수 신세나 마찬가지인 프리랜서는 일할 기회가 생기면 어떻게든 일해야 한다. 이것저것 조건을 따질 여유 따윈 없다.

    법적인 신분 보장이 안 되니 작업비 체불 등의 문제가 생겼을 때도 대응하기 어렵다. 지금은 없어져버린 모 영화잡지 교열 작업을 두 달간 한 적이 있었다. 일할 때부터 분위기가 뒤숭숭하더니 작업비가 나오지 않았다.

    관행 관행 관행

    두 달 작업한 후 ‘여긴 아니다’ 싶어 그만두었다. 그만둘 때 한 달 일한 작업비를 받았고, 나머지 작업비는 무려 6개월 후에 받았다. 결재 담당자에게 끈질기게 전화한 결과였다. 마지막엔 내용증명 보낸다고 협박(?)까지 한 끝에 내게는 큰돈인 120만 원을 겨우 받을 수 있었다.

    노동부에 어떻게 도움을 청할지도 알지 못하고(도움을 청한다 해도 해결될 거라는 보장도 없고), 법적 지식도 없는 나는 귀찮게 전화해대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래도 돈을 받은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영영 받지 못한 사람들도 부지기수니.

    설상가상으로 교열 작업비는 몇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아니, 내려가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 문을 닫는 잡지사는 늘어나고, 인터넷 등의 영향으로 잡지 판매 부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 피해가 고스란히 약자인 잡지 교열자들에게 미치고 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육체적으로 힘들고 수입도 적은 잡지 일을 하는가? 일이 언제 들어올지 몰라 불안정한 단행본에 비해 매달 일과 수입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단행본의 요상한(?) 결제 시스템도 잡지 일을 선호하게 만든다.

    단행본 작업은 일을 마친 후 책이 출간되어야 돈을 받는 일종의 도급 시스템이다. 불합리하지만 관행이 그렇다. 심한 경우 작업한 지 1년이 넘어 돈을 받기도 한다. 반면 잡지는 월급처럼 작업이 끝난 후 바로바로 돈을 받는다. 잡지의 열악한 근로 환경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더 열악한 환경(단행본)이 있으니까.

    오늘도 어디에선가 마감을 앞둔 잡지 교열자들이 밤을 새우며 일하고 있을 것이다. 마감은 무섭고, 현실은 서글픈 상황에서도 묵묵히 일하고 있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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