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인지상 영의정, 설설 기는 여야
        2010년 08월 23일 07:1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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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잡아 100명 안팎. 23일 오전 10시, 특임장관 후보자 이재오의 인사청문회에 몰린 기자 숫자다. 그 중 취재기자는 열 명 남짓. ‘실세’ 이재오의 일거수일투족 그림을 잡기 위해 몰린 사진기자와 카메라기자는 엄청난 숫자였지만, 정작 청문회 내용을 취재할 취재기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청문회에서 새로 나올 뉴스거리가 없다는 언론사 데스크의 짐작이 엿보였다.

    목소리 크면 야당, 점잖으면 여당

    역시 아무 것도 없었다. 으레 그렇듯이 “제대로 하세요”라고 호통 치면 그건 야당 의원이고, “훌륭하십니다”라고 아부하면 그건 여당 의원이다. 이재오 후보자는 각각의 경우에 맞추어 “잘 하겠습니다”라거나 “고치겠습니다”라거나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만이었다. 그 이상의 난이도를 요하는 질문이나 추궁은 거의 없었다.

       
      ▲ 청문회 자리에 선 이재오 후보자

    야당 의원들이 던지는 대부분의 질의는 제대로 된 답변을 듣고 새로운 내용을 캐자는 것도, 추궁이나 질타를 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목소리를 한껏 높인 야당 의원의 질의 사이 사이에 이재오 후보자는 단답하는 것으로 충분했고, 각 의원마다에게 할당된 질의시간 마무리에 가서는 의장이 “답변할 시간이 없으시지요?”라고 이재오에게 되묻곤 했다. 이재오는 “허허~”하며 너털웃음.

    간혹 아주 약간의 긴장이 흐르기도 했지만, 야당 의원이 “후보자가 성실하게 답변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의사진행 발언을 하면, 의장이 “후보자는 성실하게 답변해주십시오”라고 주문하고, 이재오는 “네”라고 아주 성실하게 답했다. 그걸로 끝.

    이날 청문회를 다룬 속보에서 이재오 후보자에게 호통을 치며 ‘군기반장’ 노릇을 했다는 박지원 민주당 비대위 대표의 목소리가 크기는 컸다. “여기 사진 보면 검찰총장보다 앞서 걸어가시는데, 같은 장관급끼리 그러시면 안 됩니다. … 월권하지 마십시오. … 이 어려운 때에 정권 재창출이라니요? 대통령이 그렇게 말씀하셨더라도 청와대 참모들이 그런 걸 발표하면 안 됩니다. … 성공하셔야 합니다.”

    인사청문회에 나온 장관 후보자에게 던지는 야당 대표의 질의가 꼭 이런 수준이어야 하나? 기껏 한다는 주문이 ‘나대지 말라’는 것이어야 하나? 이명박 정권이 민생을 챙기지 않는 게 문제인가, 참모들이 그걸 잘 숨기지 못하는 게 문제인가?

    “사진 찍을 때는 뒤에 계세요”

    “나도 한때 실세”였던 전임자가 애정을 듬뿍 담아 후임자에게 주는 훈시였다. 거나하게 취한 동업자끼리 “그러면 안 되지”라고 소란 떠는 꼴 이상은 아니었다. 다른 야당 국회의원들의 질의도 대동소이한 수준. 역시 ‘야권연대’의 토대는 굳건했다.

    이날 청문회에서 구체적인 질문과 비판은 민주당 전현희 의원이 거의 유일했다. 전현희 의원은 이재오 후보자가 운영하던 여의도 사무실의 자금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날카롭게 추궁했지만, 이재오는 “당시 미국에 있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며 넘어갔고, 전현희 의원의 추가 자료 요청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한나라당이 민주당을 이기고 여당 노릇을 하는 건 한국 정치의 ‘기준’에서 뭐가 나아도 낫기 때문일 것이다. “현장을 중시하시던데, 문제 해결하러 현장에는 몇 차례나 가셨습니까?” “네, 470차례 갔습니다.” …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인생 자체가 우리 근대사입니다.” …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더 많이 고민해주십시오.”

    지난 10년 동안 권력의 ‘힘’에 맛들기 시작한 민주당은 실세 특임장관에게 정면도전하지 않는 정도였지만, 여당을 하든 야당을 하든 불철주야 ‘힘’만을 섬겨온 한나라당은 행정부와 입법부의 상호견제 같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은 건 애당초에 관심도 없다는 듯이, ‘저도 기억해주세요’라는 청원의 시간으로 청문회를 활용했다. 어떤 국회의원은 청문회 시작 한 시간 반이 훨씬 넘어서 자기 질문 5분 전에 입장했다가 ‘아부’라는 제 용무를 마치자마자 퇴장했다.

    민주당, 이재오 낙마 포기했나?

    청문회가 열리기 전의 여야 논쟁 대부분, 그리고 청문회 시간의 상당 부분은 이재오의 학력과 병력에 맞추어졌다. 시위를 주동하여 중앙대에서 제적된 후 중앙농민학교를 졸업한 이재오가 중앙농민학교를 합병한 국민대를 졸업했다고 서류 제출한 것이 ‘허위학력’이라는 것이었고, 군복무시 파견교사로 일했던 경력에 대한 의문 제기였다.

    한국 보수정치는 학력, 병력, 납세, 부동산 등의 이슈를 통해 스스로를 자정하고 나름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번에 청문회를 거치고 있는 후보자들 대부분이 그런 ‘최저 시민 자격’에서 결격이다. 문제는 언제까지 여기 멈춰있어야 하는가이다. 지난 대선 결과는 ‘청렴’이라는 보수정치식 답보가 아니라 먹고 사는 입이 급박하다는 민중들의 저항이기도 했다. 오늘 청문에서 이재오는 “저는 광부의 아들입니다”라고 답했다.

    “제적… 수배… 투옥… 고문… 가난… 서민들이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이 저의 소임입니다. 학력이나 빈부의 차이 때문에 억울함이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과거에 민중이었던’ 이재오와 ‘과거에 실세였던’ 박지원의 싸움, 아주 많이 싱거웠다. ‘그놈이 그놈이지’라거나 ‘그딴 짓 해봐야 다 쓸모없다’는 정치혐오성 주장을 하기는 싫지만, 보수정치권에서 이루어지는 청문회 등이 ‘약속대련’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약속대련은 청중의 흥미를 끌만큼 화려해야 하면서도 서로를 진짜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두 가지 룰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민중주의자’ 이재오

    특임장관 후보자 이재오에 대한 청문회도 마찬가지였다. 청문회장이 떠나갈 만큼 빽빽 소리 지르다가도, “시간 다 됐습니다”라고 의장이 한 마디 하면 “네~”하고 금방 꼬리 내리는 가짜 싸움이었다. 프로레슬링이 가짜인 건 세상이 다 알고 있으니 범죄가 아니지만, 서로 잡아먹을듯 으르렁대다가도 카메라 멈추면 “☓의원, 수고하셨어요”라고 서로 어깨를 툭툭 쳐주는 보수여당과 보수야당의 드잡이질은 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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