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저임금 시급 1만원, 이 정도는 요구하자"
        2010년 08월 23일 07:36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지난 7월, 2011년 한국의 ‘내셔널 미니멈’을 볼 수 있는 지표의 하나인 최저임금은 시간당 4,320원으로 결정됐다. 인상액은 210원으로 인상률은 5.1%. 매월 209시간을 일할 경우 인상 전보다 43,890원을 더 받는다. 협상과정에서 노동계의 요구는 거의 묵살되다시피 했으며, 이에 민주노총은 결정 직후 불만을 표시하면서 향후 국회를 통해 관련법제도를 개선하는 투쟁을 전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1천원 더 받으면 괜찮나?

    협상에 들어갈 때, 최저임금연대가 주장한 금액은 5,180원으로 이는 2009년 노동자 평균임금의 5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최저임금을 비율제로 정하는 OECD나 EU 가맹국들의 기준을 근거로 한 건데,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양극화의 심화를 방지하기 위해 각국의 최저임금을 노동자 평균임금의 50%이나 중위임금의 2/3 수준으로 최저임금을 정하는 원칙을 도입한 것이다.

       
      ▲ 사진=이은영 기자

    최저임금연대는 이와 함께 ‘생활임금쟁취’라는 슬로건을 들고 최저임금 인상액을 홍보하고 나섰고, 경영계의 ‘동결 선언’이나 ’10원 인상안’ 등에 강하게 반발했다.

    최저임금연대가 제기한 생활임금으로 최저임금을 현실화하자는 주장이나, ‘1천원만 더’ 라는 슬로건으로 올해 최저임금 투쟁이 주목받은 것은 상당한 성과를 낸 것은 분명하다. 이는 2002년 양대 노총과 20여 시민사회단체로 결성된 최저임금연대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저임금위원회에서 협상력의 차이로 결정되는 현행 최저임금제의 구조와 양극화가 이미 상당히 진행된 한국사회의 특성을 놓고 볼 때 여전히 최저임금연대의 5,180원 협상안은 과연 적절했는지 의문이다.

    내 또래의 친구들은 대부분 비정규직 무계약 상태로 노동한다. 대부분 최저임금 액수가 곧 소득이고, 그 조차도 받지 못하는 경우도 태반이다.

    청년유니온이 조사한 편의점 알바 실태를 보면, 전국 주요도시의 편의점 66%가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을 지급했고, 심지어 3천원 미만을 지급한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번 돈으로 독립 주거생활을 해야 하는 경우, 『4천원 인생』(안수찬 외 지음, 한겨레출판)에 나온 사례가 곧 삶이라고 보면 된다. 4천원 인생의 현장, 그러나 한국 사회가 그 실상에 무지해서 문제인 걸까?

    차라리 안 벌고 말지, ‘최저임금의 함정’

    친구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종합하면 젊은 비정규직에게 임금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살려고 번다"는 것과 "안 벌고 안 쓴다"는 태도가 바로 그거다. 후자를 귓등으로 들으면 살만한 놈의 허세 정도로 들리기도 하는데, 사실 그 말에는 아주 적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상황에 따라 달리 반응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드러나 있다.

    "안 벌고 안 쓴다"는 태도는 살기 위해서는 임금을 벌어야 하지만, 직장으로 이동하는 교통비나 식대 등을 고려할 때 일하지 않는 편이 손해가 적은 불균형 때문에 발생하는 ‘최저임금의 함정’이다. 통계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임금수준이 낮은 상황에서 한시적 고용이나 이직률이 잦은 저임금 비정규직에 주로 종사하는 청년층의 경우 이처럼 저임금에 의한 만성실업 상태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벌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은 사실상 ‘느릿한 사회적 자살’ 상태에 있는 셈이고, 어쩔 수 없이 한계상황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우리보다 먼저 젊은 세대의 자살이란 홍역을 앓았던 일본은 저임금에 몰려 PC방 등지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된 ‘넷카페 난민’의 조사를 통해 불안정 노동이 야기하는 빈곤과 자살의 관계를 밝힌 바 있다. 한국은 현재 자살률 1위 국가이고, 20대는 교통사고의 두 배 수치로 자신의 생명을 끊는다.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의 원리까지 흔드는 현행 최저임금

    원래 임금이란 자본주의에서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노동시장의 가격을 말한다. 이론적으로 임금은 복지형태로 나타나는 사회적 부의 분배와도 관련이 없고, 오로지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비용으로 지급되는 금액을 말한다.

    따라서 모든 임금은 각각의 기업이 최대 효율을 내기 위한 최저지출비용으로 근본적으로 기업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항목이다. 최저임금은 이렇게 자본주의적 경제 환경 속에서 기업의 횡포를 막기 위한 제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1시간 노동의 대가로 패스트푸드 햄버거 하나조차 사먹을 수 없는 현실은 자본주의의 원리까지 흔들어 놓는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가치를 기업의 최저지출비용으로 산출되는 금액으로 인지하게 된다는 거다.

    청년유니온의 편의점 알바 조사 중에는 한 지역의 편의점 노동자들이 대답한 희망최저임금이 평균 5천 원 가량이라는 결과도 있었다. 정말 5천 원이면 괜찮단 말일까? 당연한 말이지만, 자신의 노동력을 싸게 내놓는 노동자가 많으면 임금은 적은 액수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 4천원을 받는다고 ‘4천원 인생’을 수긍해선 안되는 것 아닌가.

    게다가 한국은 노동자 중위임금의 2/3 이하의 임금을 받는 저임금 노동자가 25.6%(2008년 OECD 고용전망)에 달하는 심각한 양극화 사회다. 이 수치는 OECD 평균 17.9%를 을 우습게 넘어선다. 통계만 보면 한국사회 전체가 진통하는 것 같지만 한국의 상하 10%의 소득격차는 증가 추세이며, 국제경쟁력도 올해 24위로 상승해 27위로 밀려난 일본의 주목을 받고 있다. 1분기 경제성장률도 8.1%를 기록해서 최저임금 협상이 진행되던 올 상반기에는 역대 최대 수준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너무나 전통적인 노동계의 대응

    이런 상황에서 겨우 210원 오른 4,320원으로 사실상 최저임금이 동결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일단, 기업이 장악한 헤게모니가 여전히 강세라는 것이 확인된다. 신자유주의 10년 간 급격히 무너진 코포라티즘 위에, 정부는 기업의 크기에 따라 세제 혜택을 주었다.

    경제개혁연구소는 2004년 이후 정부의 조세정책이 중소기업보다 재벌의 주력 사업에 몰려있다고 발표했다. 세제혜택과 고환율로 벌어들인 국가의 부는 기업주에게 돌아갔다. 정부는 계속해서 부자감세를 주장하고 있다. 노골적이지만 특별할 것 없는 광경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문제는 최저임금연대의 전략 실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코포라티즘이 무너진 상황에서 노동계가 이를 사회운동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제시하지 못하고, 노조의 전통적 단체교섭이라는 관성을 따른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

    양극화된 한국에서 ‘1천원만 더’라거나 경제성장률이나 물가상승률에 비례하는 최저임금 인상 요구는 오히려 부당하다. 노동자 평균임금의 50%라는 수치도 목적으로 상정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하다. 설사 현대 자본주의에서 한 번도 달성된 적 없는 완전고용이 성공하더라도 양극화가 극복되지는 않는다.

    올해 최저임금위원회에서 경영계는 가진 돈이 없다며 물건 값을 후려쳐 흥정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비정규직과 저임금의 현실이 그 어느 해보다도 주목을 받은 올해에도, 헤게모니를 장악한 강자의 패는 배짱 두둑했다.

    노름판의 ‘뻥카’

    최저임금이라는 사회안전망의 기준이 ‘뻥카’로 정해지는 노름판 수준이라는 것을 노동계가 몰랐을 리 만무하고, 그렇다면 노동계도 노동자의 입장에서 금액을 제시하고 총파업이라는 카드로 응수하는 것이 마땅했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애초에 싸게 책정된 가격을 두고 폭이 좁은 논의를 하면 결과는 빤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안 벌고 말겠다’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참여를 위해서도 생활임금 액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최근 최저생계비를 체험하는 여러 시도가 있었는데, 이를 응용해 노동계가 ‘희망임금’을 역제안하는 형태가 임금에 대한 수세적 위치를 벗어나는 효과적일 수 있다.

    노동계가 관성화된 몸을 바꿀 수 있을까? 이 질문 때문에라도 이번에 최저임금연대에 참여한 청년유니온의 역할이 내내 아쉬웠다. 신생노조로서 청년유니온은 취업난과 세대차별이라는 중첩적 억압에 대항하려면 ‘젊은 세대에게 필요한 임금’을 제시하면서 새 노조의 요구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예컨대 ‘세끼를 라면과 삼각김밥을 먹더라도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은 보고 싶다’는 젊은 노동자 특유의 정서를 드러내며 최저임금 투쟁에 참여했더라면 청년유니온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기존 노동계를 자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대의 문화가 다르면, 원하는 노동과 임금이 다른 것은 자연스럽다. 어쩌면 앞으로 기존 노동계와의 연대에서 청년유니온이 담당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요구의 존재를 알리는 역할일 것이다.

    그리고 진보정당. 수년 전부터 일본의 야당은 노조의 ‘시급 1천 엔’ 슬로건에 결합해 큰 이슈를 만들었고, 지속적인 인상을 쟁취해왔다. 최근 일본 후생노동성이 발표한 새로운 최저임금은 전국평균 728엔(2010년 기준)이고, 작년 정권교체에 성공한 민주당은 계속해서 1천 엔까지 인상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저임금 노동자 비중이 15.1%(OECD 통계, 2006년)로 한국보다 양극화와 빈곤문제가 월등히 양호한 일본이 논의하는 정책이 이렇다.

    각 진보정당이 ‘최저임금 1만원’이라는 슬로건으로 최저임금연대를 지원하고 정책 입안을 추진했더라면 어땠을까. 한 번에 올리자고 하기 부담스럽다면, 세제 혜택과 정책지원을 골고루 받는 대기업이나, 일자리 늘리겠다고 헛짓거리 하는 정부 사업, 공기업 파견직과 노동부 사회적 일자리부터라도 1만원으로 올리고 시작하는 건? 최저임금 1만원, 우리사회에서 요구할 수 있는 슬로건이 아닌가.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