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처입은 이들을 위로하던 그 노래”
        2010년 08월 20일 04:0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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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낸 민중운동 진영에서는 대선 때 백기완 후보를 밀었습니다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다시 5년이 지나 92년 다시 대선을 맞아 민중운동 각진영에서는 87년 평가를 근거로 대선정국에 대한 여러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서 후보단일화, 비판적지지, 민중후보 등으로 입장이 나뉘게 됩니다.

    뭐 예전부터 한국사회를 분석하고, 규정짓는 시각에 따라 여러 이론들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정파들이 분리되기 시작한 건 아시다시피 86년 즈음으로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정파들의 갈등이 증폭된 건 아마도 92년 대선 때였던 것 같습니다.

    92년 대선과 정파의 분화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결국 대중관과 예술관의 차이로도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대중실천의 방식과 문화도 당연히 다를 수밖엔 없습니다. 운동이 급성장하던 87년에서 90년대 초반까지는 주요한 당면 사안에 단일한 대오로 집결해서 투쟁했기 때문에 이 부분이 크게 문제로 대두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92년 대선은 조직을 분열시키기도 했고, 많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각 단체들은 대선을 맞아 내부 토론을 치열하게 진행했습니다. 어떤 단체는 양쪽으로 다 이름을 걸고 양쪽 문선에 다 결합하고 대선 후에 다시 모여 평가하자하여 양쪽으로 바쁘게 뛰어다니기도 했습니다.

    어떤 단체는 공식적으로는 어떤 정치적 선택도 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알아서 각자 선택하고 실천하기로 했고, 또 어떤 단체는 내부에서 한쪽으로 입장 통일을 하고 공식적으로 결합해서 활동을 하기도 했고요.

    어떤 입장이었든, 한 단체가 동일한 입장으로 함께 움직이고, 그 선택이 승리한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조직은 대선 이후 한쪽 입장을 선택한 사람들이 대거 탈퇴를 하거나, 아예 단체를 해산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노래로 보면 대학생들이 주로 부르던 노래와 노동자들이 주로 부르던 노래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고, 시기와 사안에 따라, 그리고 불러지던 시공간에 따라서 노래들이 선택되어지던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왜 이 노래를 부르면 안되나"

    90년 전대협이 출범하고 대학생들이 주로 부르는 전술가요들이 급격히 많아지면서 더욱 그 차이가 드러나긴 했지만, 대규모 집회나 연합공연에서 애창되던 노래들은 또 같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당시에도 가사만 보면 ‘아, 이건 어떤 정파의 노래구나’하는 것이 뚜렷이 드러나는 노래도 있었고, 또 애초에 의도적으로 창작된 노래도 있었지만 그렇게 구분 짓던 많은 노래들은 정파적 입장이나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노래는 집단의 문화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게 당연할 경우도 있지만, 이미 많은 대중들에게 정파를 뛰어넘어 불러지던 노래들조차도 어떤 시기를 만나 색깔 논쟁에 휘말리게 되면서 결국 어떤 집단에게는 외면당하고 말았던 것 이지요.

    반미나 민족, 통일이라는 가사가 들어간 노래는 NL쪽 노래로, 민중, 노동자, 노동해방이라는 가사가 들어간 노래는 PD쪽 노래로 무조건 구분하던 때였습니다. 그 즈음 대학 초청공연을 갔는데, 대학 노래패에 갓 들어왔다는 신입생이 뒤풀이 때 저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더군요.

    노래책을 펴놓고 노래를 배우고 부르던 중에 자기는 <서울에서 평양까지>란 노래가 참 좋아서 자주 동아리 방에서 불렀더니 선배들이 그 노래를 다시는 부르지 말라고 했다며, 왜 이 노래를 부르면 안 되냐고 말입니다. 결국 그 친구는 노래패를 그만두었더군요.

    "노래가 불쌍해"

    그 뒤로 몇 년간 대학 공연을 갈 때마다 어떤 노래를 꼭 불러달라거나, 어떤 노래는 절대로 부르면 안 된다는 요구를 받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심지어 <동지>라는 노래도 부르지 말라는 곳이 있을 정도로 -그 노래가 뭐 어떻다는 것인지- 노래 하나하나에 대해 색깔을 입히고 선곡안을 사전 검열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 지난 13일 상상마당 LIVE HALL에서 열린 꽃다지 콘서트 (사진=오명록)

    그럼에도 꽃다지는 한총련 출범식 초청공연 때도 <가자 노동해방>과 <하나의 민족, 하나의 조국>을 같이 부르곤 했습니다. 물론 꽃다지에 대해서도 예울림은 NL이었고, 노동자노래단은 PD여서 두 단체가 통합된 곳이니까 중립(?)이거나 양다리라고 평가한 분들도 계셨겠지만요.

    통합 이전에도 노동자노래단의 어떤 노래를 놓고, 1절은 PD, 2절은 NL이라고 했던 분들도 계셨구요. 아주 심하게는 통일 싫어? 노동해방 싫어? 이렇게 표현하면서 비아냥거리기도 했으니, 이쯤 되면 정파가 정치적 입장과 정책, 전술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수준이 되어 버리지요.

    재밌는 실화로, 집회 때 마스크나 김밥을 파시는 분들까지도 무엇으로 집단을 구분하는 지 파악을 하셔서는 한쪽 집단에 가서는 “노동해방 마스크(혹은 김밥)있어요”라고 하고, 그 집단을 지나 다른 집단에 가서는 “조국통일 마스크(혹은 김밥)있어요”라고 하셨답니다.

    마스크나 김밥도 그 때 그 때 색깔을 입게 되던 때가 있었다니까요. 그래서 그 당시 노래들이 이리 불려지고, 저리 불러지다 누군가에 의해 외면당하는 것을 보고 노래평론가 이영미 선배가 “노래가 불쌍해”라고 표현했답니다.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던 그 노래

    다시 돌아와서, 이 시기에 꽃다지도 30명 가까운 이들 중, 10여명이 탈퇴를 하거나 잠적을 하였고, 남은 이들도 상처투성이로 스스로를 추스르기도 어려웠습니다. 당시 대표를 맡았던 조민하 선배도 책임을 느끼고 사임하고, 조직의 지도부라 했던 이들도 파견을 명목으로 밖으로 나가있거나 휴가라는 이름으로 잠수를 타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그 해의 계획도 목표도 쉽게 세워지지 않았고, 모두가 의기소침해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민하 선배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옛 동지로부터 얼굴 표정이 안 좋다며, 언제든지 힘들면 전화하라고 건네받은 전화카드를 들고 들어와 밤새 노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바로 <전화카드 한 장>입니다.

    대선 이 후 상처받은 많은 이들을 위로했던 노래, 서로 부둥켜안고 울면서 부르던 노래, 그리고 스스로를 반성하게 했던 노래, 전화카드를 선물하는 운동권의 유행을 만들었던 노래 <전화카드 한 장>을 들어보겠습니다.

    노조나 단체 활동가들은 대부분 상처투성이이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겠지요. 내 마음의 상처를 보듬으며, 내 동지의 아픔을 마음으로 느끼면서 같이 따라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전화카드 한 장
    조민하 작사, 작곡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때 내게 전화를 하라고
    내손에 꼭 쥐어준 너의 전화카드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고
    고맙다는 말 그말 한마디 다못하고 돌아섰네
    나는 그저 나의 아픔만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 입으로 나는 늘 동지라 말했는데
    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 전화카드도 사야겠어
    그리고 네게 전화를 해야지 줄 것이 있노라고

    *음원 출처 : 꽃다지 비합음반 2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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