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고름이 터지고 있다”
    2010년 08월 18일 09: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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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를 다 뜯게 돼 있어요”

팔당 지역 유기농업의 시작은 두물머리에서 시작되었다. 1976년 첫 씨앗을 뿌린 이는 정농회 창립회원인 정상묵 씨다. 그와 형제인 정상일, 한솔공동체를 꾸린 김병수 등의 주민이 유기농업의 길을 열었다.

국가의 일방적인 폭력에 침묵하고 살아온 지역 주민들이 자각하기 시작한 것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였다. 1993년 양평, 광주, 남양주 3개 군민들이 모여 ‘팔당상수원피해주민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당시 농민들 사이에서 ‘우리는 서울의 식민지 백성이다’, ‘물이 빨리 오염돼야 한다’는 말이 떠돌았다. 강은 원망의 대상이었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은 취수원을 북한강으로 옮기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대책위원회에 두 가지 생각이 부딪혔다. 취수원을 옮기고 규제를 풀어 지역 개발을 통해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주장과 자연을 살리고 유기농업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주민들 사이의 갈등으로 대책위원회는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대책위원회에서 실무를 맡은 정상묵과 김병수는 의견을 같이했다. 유기농업을 확대하는 것이 지역 농민을 살리고, 땅을 살리고, 물을 살리고, 경제도 살리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1995년 ‘팔당유기농업운동본부’를 만들었다.

   
  ▲ 운길산역에서 본 세계유기농대회 광고 (사진=송기역)

방춘배 사무국장은 1993년의 지역 갈등이 오늘날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재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역 여론은 4대강 사업과 개발을 요구하고 있다.

“4대강 사업하면 개발돼서 좋을 텐데 유기 농업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역 경제가 안 된다는 거죠. 개발의 욕구가 강한 분들이 많아요. 특히 양수리는 한쪽은 관광지화 되었고 한 쪽은 농업 그대로 있잖아요. 양수리 상인들이나 지역 토호들은 두물머리 몇 농가 때문에 다 망치고 있다, 우리만 손해보고 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요.”

정상묵 씨는 몇 년 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외국의 많은 농촌 지역-독일, 캐나다, 스위스, 일본, 쿠바 등-을 탐방하면서 갖게 된 생각을 털어놓았다.

“세계적으로 두물머리만한 경관을 갖춘 곳이 없어요. ‘월광 소나타’의 배경이 된 스위스의 루체른 호반 정도죠. 지형적으로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델타지역이 세계적으로 드물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데가 없어요. 특히 대도시 근교에 이런 데가 없어요. ‘여기 가만두지 않는다.’ 동물적인 육감이 드는 거예요.

누가 손을 댈 것 같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 바꿔보자, 그랬던 거예요. 4대강 문제 터지기 전이라고요. 독일 라인강도 그렇고 외국은 잘못된 걸 아는 데 백년 걸렸어요. 지금은 콘크리트를 다 뜯어냈어요. 선진국 중에 콘크리트로 이렇게 하는 나라는 거의 없어요. 지금은 공사하지만 나중에 바꿀 겁니다. 바꾸게 돼 있어요. 필요한 구간 외에는 콘크리트를 다 뜯게 돼 있어요.”

몇 해 전부터 팔당생명살림에서는 유기농 단지 본래의 기능을 살리고 확장하는 계획안을 마련하고 지자체와 논의하고 있었다. 팔당 지역 하천부지 점용권을 유기농업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내주는 문제점 등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2008년 6월엔 팔당대책위와 지자체가 함께 관리하는 ‘유기생태공원’을 제안했다. 계획안에는 생태 탐방로 등을 만드는 것 등이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이를 현실화하기 전에 느닷없이 4대강 사업이 고개를 내밀었다.

“농민은 농사짓는 게 싸우는 거죠.”

두물머리에서 신부와 수사들이 107일째 단식을 이어가던 날,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생명평화미사가 열렸다. 나는 농민들과 함께 중앙선 기차를 타고 명동으로 향했다. 함께 자리에 앉은 최요왕 씨는 2004년 두물머리에 귀농했다.

유기농을 하는 농민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판로를 확보하는 일이다. 팔당생명살림은 이르게 판로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도농공동체를 만들어왔다. 이런 환경 때문에 젊은 귀농인들이 많이 찾아왔다. 지역적으로 서울에서 가까운 이점도 작용했다.

타향 사람들에게 배타적이지 않은 두물머리 공동체엔 젊은 귀농인들이 원주민들과 함께 더불어 살고 있다. 최요왕 씨 같은 젊은 귀농인들은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귀농인들이 주도해 만든 것 중 하나가 방과후 학교다. 소비자 조직인 생협과 함께 만든 방과후 학교는 현재 지역아동센터로 전환해 복지기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환경농업단체연합회’에서 실무자로 일하던 최요왕 씨는 귀농에 실패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숙고한 후 귀농지로 두물머리를 선택했다. 흙을 볼 수 없고, 자동차와 매연에 갇힌 서울을 떠나고 싶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익명의 도시보다 공동체가 있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는 주로 닭을 방사해서 키우는 자연양계를 하고 있다. 귀농 후 1년 동안은 일을 배우고 공동체에 동화되는 시간이었다. 이같은 연착륙 기간을 거친 후 농지를 얻고 집을 구했다.

“2005년 12월부터 내 농사를 시작했죠. 그때부터 농사의 틀을 만드는 데 2~3년 정도 걸렸어요. 이제 본격으로 하면 되겠다 했는데 정부에서 농지를 뺏어가네요.”

전라도 순천이 고향인 그는 도시생활보다 농사짓는 일이 더 좋단다. 어릴 때 집안일을 많이 도우며 자랐기 때문인지 일이 몸에 배인 편이다. 두물머리 땅 끝에 서 있는 나무십자가는 미술에 재능이 많은 최요왕 씨가 작년 11월에 세운 작품이다. 대책위의 김영훈 대표가 그를 대놓고 칭찬하기 멋쩍은지 “농사 빼고 다 잘한다”고 농담을 던졌다.

서규섭 씨는 10년 전 귀농했다. 그의 터전인 두물머리와 함께 고향인 경북 영주 지역도 4대강 사업 대상지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가 다닌 평은초등학교는 수몰지로 지정되었다.

“수몰지에서 친구가 연락와요. 형편이 어떠냐고 물어보니까 친구 말이, 답이 없대요. ‘이명박이가 죽어야지’ 그래요.”

극단적인 표현에서 나는 농부들에게 4대강 싸움이 얼마나 힘겨운 싸움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서규섭 씨는 농민들의 조합인 ‘영농팔당생명살림’엔 상업적 목적으로 유기농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한다.

“유기농업은 반드시 철학과 운동성이 있어야 해요.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면 땅을 수탈하게 돼요. 어떻게든 땅을 통해서 이익만 얻으면 된다는 목적만 남게 되니깐요. 비싼 품목만 계속 재배한다거나 농약을 몰래 쓰는 거죠. 사람하고 똑같아요. 한 가지 음식만 편식하면 균형이 깨지듯 한 가지만 계속해서 심으면 땅이 대답을 해줘요.”

   
  ▲ 사진=이상엽 사진작가

두물머리에 농사를 지으러 온 서규섭 씨는 지난 1년 동안 농사짓는 일보다 대책위를 만들고, 국회며 정부청사 등을 찾아다니는 일을 더 많이 했다. 요즘은 두물머리보다 서울을 더 자주 간다고 푸념한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일은 항상 뒷전이었고 농사 시기를 놓치곤 했다. 3월 말에 심어야 할 감자도 시기를 놓쳤고, 노지에 퇴비 주는 일도 때를 맞추지 못했다. 이 지역 농민들의 주요 수입원인 딸기밭 체험객을 모집하는 일도 포기했다.

그럼에도 그는 농사를 짓고 있다. 채소 농사를 한 가지씩 마칠 때마다 공무원들이 농사를 금지하는 공문을 보내고 방해하고 있지만 꾸준히 밭을 찾아간다. 언제 철거될 지 모르는 밭이다. 나는 물었다.

“수확을 못할 수도 있잖아요.”

농민 서규섭의 대답은 그다웠다.

“농민은 농사짓는 게 싸우는 거죠.”

자연의 수탈과 착취

팔당 지역을 떠나기 전날, 4대강 사업으로 인한 유기농업 공동체와 지역의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 방춘배 사무국장을 만났다. 그는 4대강 사업이 아니어도 팔당에 큰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다고 말한다. 팔당 지역이 4대강 사업 대상지가 되자 팔당생명살림 구성원들은 공동체의 아픔이 아무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우리 공동체 안에 있던 문제점과 상처들이 부딪혀서 아물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묻혀 있던 것들이 전면으로 올라오면서 서로 더 갈라진 것들이 많아요. 4대강 사업이 외부에서 왔지만 우리 안에 곪았던 부분이 터진 것이죠.”

4대강 사업 문제가 불거지자 팔당생명살림 농민들의 반응은 한결같지 않았다. 모든 땅을 빼앗기는 한이 있어도 저항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영농조합이 4대강 싸움에 집중하느라 유통을 소홀히 하는 점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농지가 수용되지 않는 조합원들이었다. 형님 아우로 지내던 이웃이었지만 4대강 사업으로 피해를 입는 농민과 입지 않는 농민 사이에 뚜렷한 견해차가 발생한 것이다.

한 번은 시민단체의 방문을 앞두고 필요한 공간을 빌리려는 계획이 ‘딸기 체험객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유기농지 보존 문구를 적은 현수막이 딸기 체험 홍보 현수막을 가리는 일로 이웃 사이에 심하게 다툰 일도 있었다.

돈독한 조합원의 관계가 하나둘 깨졌다. 돈벌이 앞에서 인심은 도시보다 싸늘했다. 한편에서 농사를 뒤로 미루고 4대강 싸움에 나서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여행객들이 보는 자리에서 퐁퐁을 사용해 그릇을 씻었다. 자리를 함께한 농민 한 분이 목소리를 높였다.

“한쪽은 유기농업 수질이 어쩌고 하는데 한쪽은 체험객들에게 닭을 고아 팔고 퐁퐁으로 그릇을 씻는 거예요. 타지 사람들이 보면 사기 친다고 생각할 거 아녜요.”

이 농민은 유기농지를 지킬 수 있게 되더라도 더 이상 두물머리에서 농사짓지 않기로 부인과 합의했다고 고백했다.

농지 보전 싸움이 길어지면서 대책위원회 활동을 하는 농민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어떤 농민은 4대강 사업이 넘어서기 힘든 벽이라고 판단하고 떠났고, 어떤 농민은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고 떠났다.

서규섭 씨는 팔당 지역의 싸움을 종교인들과 시민단체, 도시 소비자들이 지지하는 데에는, 이 싸움이 생존권 싸움의 차원을 넘어 유기농업의 생명 살림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농민들이 이를 잊어선 안 된다고 역설한다.

“유기농업을 왜 하는가? 그것은 명확하거든요. 농업 자체가 자연을 그대로 놔두지 않고 인위적으로 수탈하고 착취하는 것인데, 이것을 반성하면서 가급적이면 자연 그대로를 두면서 생산할 수는 없을까에 대한 고민에서 유기농업이 나왔어요.

4대강 사업은 자연에 대한 탐욕, 정치적 야망 등이 개입돼 있는 것이 불 보듯 뻔한데, 최소한 유기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그 시각이 흔들리진 않겠다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니에요. 경제논리, 개발로 인한 이익, 이런 달콤한 이야기들로 본질이 가려지고 있어요.”

“4대강 사업 막을 수 있습니다”

나는 며칠을 머문 대책위원회 상황실을 나서 다시 남한강을 따라 여주로 향했다. 버스 차창 밖으로 남한강과 주변의 농지가 파헤쳐지는 모습이 보였다.

   
  ▲ 2010년 4월 첫 답사에서 만난 여주 남한강. 강이 반 가까이 사라졌다. 원래 이곳은 모두 강이었다 (사진=송기역)

내가 4대강을 찾아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올해 4월 10일 첫 번째 답사길에서 만난 목소리 때문이었다. 외로운 싸움에 절망하며 북받치는 슬픔을 보인 어느 환경운동가의 눈물과, 매일 방황하고 있다는 한 스님의 고백과, 강으로부터 평생 받기만 하고 살아온 몰염치 때문이었다.

나는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지치고 실의에 빠질 때면 혼자 강으로 달려가 갈대밭을 거닐곤 했다. 사람들은 나를 떠밀곤 했지만 강은 한 번도 나를 모른 체하지 않았다. 강이 없었으면 나는 벌써 서울을 떠났을 지도 모른다(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강을 따라가고 사람들을 만나며 예상치 못한 우리 사회 공동체의 금이 간 모습을 만났고, 곤혹스러웠다. 떠나기 전날, 방춘배 사무국장은 나에게 4대강 사업을 접하고 놀라지 않았다고 했다.

“자본이나 인간이 저지른 문명은 파괴를 향해 한 발짝씩 가고 있었고 이런 큰 흐름에서 봤을 땐 개연성이 충분했던 자연스런 하나의 사건이었어요.”

여주에서 만난 수경스님은 4대강 사업과 이를 둘러싼 모습은 우리들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거울을 보는 일이 무서웠다.

금이 간 거울은 우리들의 얼굴을 몇 조각으로 분리해 기형적으로 보이게 했다. 우리는 너무 멀리 온 것이었다. 강물 아래 잠긴 수몰지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수몰되고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외롭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희생적인 노력과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성찰을 멈추지 않는 이들을 만났다. 환경운동가들의 사무실은 밤이 되어도 꺼지지 않았다. 나는 강의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저 미친 괴물’을 막긴 어렵다고 숱하게 들었다. 하지만 최병성 목사는 수십 번도 넘게 “4대강 사업 막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간직한 희망에 대한 의지는 경이로웠다.

그리고 싸울 수도 호소할 수도 없는 존재들의 안간힘을 보았다. 그토록 작은 씨앗들이 강을 살리고, 땅을 지키고, 인간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오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이날 저녁 여강선원에 도착해 잠들기 전, 나는 머리맡에 있는 수경 스님이 쓴 시 한 편을 읽었다. 그 시는 외로운 이들을 위한 기도였다. 그가 떠나고 없는 지금, 이 시를 스님을 위해 다시 읽어드리고 싶다.

오늘 우리들의 기도가
최선을 다한 사람의
마지막 한 방울
눈물이게 해 주시옵소서
– 「강을 위한 기도」 중에서

필자소개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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