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못 볼 것 같아서요…”
        2010년 08월 17일 03: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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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길산 수종사에서 내려다본 두물머리는 평화로웠다.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의 은빛 물결이 만나고, 광주에서 물줄기를 이어온 경안천이 흘러드는 곳이다. 세 물줄기는 이곳에서 비로소 ‘한강’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한강은 파괴와 개발로 세워진 비정한 도시를 향해 오늘도 말없이 흐르고 있다.

    조선의 문장가 서거정은 이 풍경을 ‘동방 사찰 중 전망이 제일’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가 보던 풍경은 1973년 이후 사라졌다. 나루터가 있던 두물머리의 옛 풍경과 농민들의 삶은 팔당댐 건설 이후 강물 속에 수몰되어 있다. 인간의 탐욕은 1973년 한 차례 수술대에 놓였던 이 땅에 다시 메스를 가할 준비를 마쳤다.

    나는 팔당 지역 역사의 산 증인으로 알려진 송촌리에 사는 정정수(41년생) 씨의 밭을 찾아갔다. ‘팔당공대위’의 방춘배 사무국장으로부터 그를 만나는 일이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를 미리 들었다. 언론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근래 그는 <조선일보>의 취재에 수차례 응했지만 한 번도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날은 처음으로 상추를 수확하는 날이었다. 하우스 안에서 부인 심정옥 씨와 일손을 도우러 온 지춘자 씨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상추를 뜯어 종이상자에 넣고 있었다. 심정옥 씨는 20년 넘게 그와 함께 유기농을 하고 있다.

       
      ▲ 정정수, 심정옥, 지춘자 씨가 유기농 상추를 수확하고 있다 (사진=송기역 시인)

    “일반 농사보다 손이 더 많이 가요. 말도 못해요. 맨날 풀하고 전쟁이에요. 풀 전쟁. 풀 전쟁 하다가 요새는 물 전쟁하고 있어. 사는 게 전쟁이지 뭐.”

    풀과의 전쟁, 물과의 전쟁

    정정수 씨는 대를 이어 50년 넘게 농사를 짓고 있다. 그가 농사짓는 땅의 상당 부분은 아버지가 농사짓던 땅이다. 그의 큰아들도 서울에서 출퇴근하며 함께 유기농업을 한 지 10년이 넘었다.

    4대강 사업으로 잃게 될 그의 땅은 2500평 남짓 된다. 어린시절 그는 마을 강가에서 저녁이면 주낙을 늘어뜨리고 새벽이면 물고기를 거둬들였다. 열 살이 되었을 때 전쟁을 겪었다. 피난을 떠나기 전 아버지는 평생 모은 재산을 담장 아래 묻어두었다. 피난에서 돌아왔을 때 돈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돈은 땅을 사기 위한 돈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어린 소년의 두 눈에 비춰진 인간의 모습은 폭력과 살육의 광기에 어려 있었다. 마을에 낯선 사람들이 끌려왔다. 가까운 옥천면에서 인민군에 복역한 사람들이었다. 어린 소년은 그들이 총살되는 모습을 숱하게 목격했다. 비극은 그에게도 찾아왔다.

    “중공군 패잔병들이 한창 후퇴할 땐데, 미군이 우리 마을을 집중적으로 밤새도록 폭격했어. 그때 마을 분들이 저녁 먹다 돌아간 분도 있고, 많이 돌아가셨지. 우리 어머니는 저녁 잡수시고 방공호라고 집 뒤꼍에 땅굴 파놓은 데 들어오시다가 포탄이 떨어져서……돌아가셨어요.”

    전란이 지나간 후 그는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비극이 되풀이되었다. 1968년 팔당 댐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일제시대 때부터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되는 이 지역에 댐을 만든다는 소문이 돌았고 몇 차례 시도가 있었다. 강을 가둔 건 박정희 군사정권이었다.

    팔당 지역은 댐 공사로 인해 수도권 인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수몰지가 되었다. 박정희 정권 시기 3백만 명 가량의 수몰민이 양산됐다. 정정수 씨는 4천 평 가량의 땅을 헐값에 국가에 빼앗겼다.

    “그때도 보상대책위원회라는 게 있었어요. 보상협의위원이 정씨였는데, 가톨릭 신자이고 똑똑한 분에요. 근데 그 사람이 공사 편에 섰어요.”

    댐이 들어서고 마을은 그린벨트 지역이 되면서 규제가 시작됐다.

    “사람 사는 데는 자유로워야 되는데 주거에 제한 받으니까 불편해졌죠. 허수간 하나 맘대로 못 지었으니까. 돌멩이 하나도 못 옮겨놨어요. 엄청나게 무서웠어요. 육이오 때 포탄 맞고 부서진 초가집을 헐고 양옥집을 지은 거야. 허가를 스무 평을 냈는데 짓다보니까 조금 늘어나가지고 스물한 평이 됐어. 그린벨트 감시하는 애가 와가지고 한 평을 깎으라는 거야. 오바됐다고. 다 지어놨는데. 그렇게 엄했어요.”

       
      ▲ 사진=이상엽 작가

    농민들이 이러한 규제와 생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활로로 찾은 것은 유기농업이었다. 질울 고래실 마을에 사는 노국환 씨도 유기농업이라는 희망의 개척자였다.

    휴대폰 화면 속의 들녘

    다음 날, 노국환 씨를 만나기 위해 질울 고래실 마을로 향했다. 마을 입구 큰길가 중앙선 철길과 경강국도 사이에 노국환 씨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 있었다. 중앙선 철길이 생기면서 면 소재지였던 마을은 두 동강이 났다. 면 소재지와 그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그때 양수리로 옮기게 됐다. 마을회관에서, 38년 동안 농사꾼으로 살아온 그를 만났다. 그는 나를 만나자 ‘현재까지 살아있는 게 용하다’며 말머리를 연다.

    “동네 사람들이 철길에서 기차에 치여 죽었어요. 어릴 때만 해도 적어도 다섯 명이 철길에서 죽었어요. 다섯 살 때였어요. 친구 아버지가 나무짐을 하고 우리 동네 쪽으로 내려오는데 내가 철길에서 놀고 있더래요. 그래서 잡아당겨서 내려놓자마자 기차가 지나갔대요. 행길에서도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 흔하죠. 강에 빠져죽은 사람보다 훨씬 더 많아요.”

    그는 강의 품속에서 헤엄치고 낚시를 하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샛강에서 우렁이며 고동, 구두조개를 주웠고, 한여울 자갈밭 가에서 메기며 빠가사리를 잡고 조약돌을 가지고 놀았다. 달이 뜬 밤이면 학교 선생님과 손을 잡고 모래사장을 거닐며 조약돌을 주웠다.

    마을 사람들은 뱃사공에게 1년에 몇 말의 곡식을 배삯으로 주고 강을 오갔다. 팔당 댐이 생기고 물이 차면서 그런 일들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댐이 생긴 후 강이 변했고, 농사짓던 땅은 물속에 잠겼다. 땅을 잃은 사람들은 대도시로 떠났다.

    그는 1985년 풀무원 농장에서 열린 정농회 동절기 교육에 참여하면서 유기농을 알게 됐다. 당시엔 유기농업이 선뜻 납득되지 않았다고 한다.

    “농산물을 이렇게 지으면 비싸서 먹고 살만한 사람 좋은 일 시켜주는 거 아니냐. 그땐 식량도 넉넉지 않았던 때라 ‘내가 이런 것 지어야 돼?’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식물에 농약을 주는 일이 썩 내키지 않아 서서히 줄이고, 유기농을 시작했다. 인위적인 농사 방식을 피해 옛 농사 방식을 찾고 배우고 실천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처음부터 유기농 철학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시나브로 몸과 마음에 배어가는 과정이었다.

    몸과 마음에 배어든 유기농

    그가 12명의 농민들과 함께 만든 ‘팔당유기농업운동본부’는 농협 2층 가건물에서 시작했다. 남의 땅을 빌려 집하장으로 사용하며 불모지인 유기농 유통의 길을 개척했다.

    “한여름 찜통더위에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있어요. 힘들었지만 의지로 만들어갔고 길이 생겼어요. 근데 정착된 모습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아요. 지금은 경쟁이 치열해서 경쟁력으로 모든 게 판단되니까.”

    그동안 친환경 유기농업을 하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다. 그는 농민들이 어렵게 개척하고 기울인 노력을 인정하고 지원하던 정부의 태도가 4대강 개발로 뒤돌아선 것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개발논리에 따라서 편의적으로 다른 땅 줄 테니 떠나서 농사지으라는 건데 농민들의 삶과 생활 기반을 이해하지 못하고, 소련이 조선인들을 우즈베키스탄에 강제 이주시키듯이 ‘느네, 저리 가서 살아’ 이런 것 자체가 황당한 거죠.”

    나는 그의 휴대폰 바탕화면에서 그가 38년 동안 농사지어 온 논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다시 못 볼 것 같아서요.”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두물머리 끝엔 나무십자가가 있다 ②]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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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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