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4년 5월, 한반도 핵투하 D-day였다"
        2010년 08월 12일 10: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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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년 5월 23일 네바다 주에서 실시된 핵 대포 실험 장면. 미국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술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출처: 미국국립문서보관소

    한국전쟁이 미국의 핵 전략에 미친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전술 핵무기’ 개발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핵폭탄은 주로 소련의 대도시와 전략 시설을 대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와 같이 영토도 좁고 대규모의 군사·산업 시설도 거의 없으며, 미국이 “제한적인 목표”로 벌이는 전쟁 지역에서는 사용이 여의치 않았다. 이처럼 작은 나라와의 전쟁에서 새로운 핵폭탄 개발의 필요성을 느낀 미국은 52년 여름 핵 대포(nuclear canon) 개발에 성공했다.

     미국이 ‘전술용’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서 원자폭탄 사용에 신중했던 분위기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는 육군참모총장인 콜린스(Joseph Collins)가 있었다. 그는 이전까지는 치열한 교전으로 자국 병사의 일정 정도 희생이 불가피하더라도,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은 보류되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미국이 전술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자국군 방어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며 공격적인 자세로 변했다. 전술 핵무기가 기존 핵무기에 비해 파괴력이 적어 정치적 부담을 덜 수 있고, 중국군에 대한 수적인 열세를 만회할 수 있으며, 적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유용하고,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적의 공군 기지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52년은 미국 대선이 있는 해였다. 미국 군부도 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대선 결과가 나오기 전에 확전 계획인 OPLAN 8-52나 핵무기 사용을 승인하기는 어려웠다. 11월 7일 콜린스는 클라크에게 “지금 시점에서 귀하에게 새로운 작전을 지시할 수 없다”며,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 기다려야 하고, 새로운 행정부의 정책을 봐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클라크는 54년 펴낸 저서 <다뉴브 강에서 압록강까지>에서 “우리가 신속하고 강력한 자세를 취했다면 더 좋은 휴전 조건을 확보하고 많은 생명들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며, “나는 한국군의 급격한 증강, (대만의) 장제츠 군대의 활용, 그리고 미국 정부가 승리하기로 결심했을 때 필요한 핵무기 사용을 권고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미국 대선과 확전시 야기될 경제적 부담에 대한 워싱턴의 신중론에 막혀 클라크의 확전론과 핵 사용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이젠하워의 등장과 미국 핵 전력의 강화

     1953년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핵정책과 관련해 두 가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트루먼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로의 정권교체가 미국의 핵무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수반했다는 것이다. 최초의 핵무기 사용자로서 트루먼은 군사적 관점 못지않게 도덕적·정치적 관점에서도 핵무기를 바라봤다. 그는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했을 때에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자화자찬했지만, 한국전쟁에서는 달랐다.

    이미 핵폭탄의 엄청난 파괴력과 부도덕성이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 비핵국가인 북한이나 중국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 뒤따르는 선택이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핵문제 권위자인 로렌스 위트너는 “트루먼의 군사적 고려보다 정치적 고려에 압도되어 맥아더와 같은 군부 인사들의 핵무기 사용 요구를 거절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달랐다. 한국전쟁 개전 당시 나토 총사령관에 있었던 아이젠하워는 1950년 6월 트루먼 행정부의 우유부담함을 비난하면서 사임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며, “나는 여러 차례에 걸쳐 그것이 결국 원자폭탄의 사용에 의존하더라도 단호한 행동을 요구했었다”고 말했다. 리지웨이 장군 역시 아이젠하워가 트루먼의 전쟁 수행 방식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적절한 목표물이 있다면, 한반도에서 1-2개의 핵무기 사용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확인해주었다.

     이러한 에피소드를 반영하듯 아이젠하워는 “핵무기 사용의 도덕적 문제와 금지”는 제거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원자폭탄도 수많은 미국 무기 가운데 하나”라는 관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이면에는 재래식 군사력에 의존하는 것이 엄청난 경제적 부담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핵무기를 통해 “군사적 요구와 경제적 건전함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고도 깔려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저렴한 것은 분명하다”는 그의 발언은 이러한 인식을 잘 보여줬다. 포로 송환 문제로 정전협상이 결렬된 시기에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52년 12월 한국을 방문한 이후 두 가지 결정을 내리게 된다. 하나는 더 이상의 정전협상 지연은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핵무기 사용도 적극 고려하겠다는 것이었다.

     1953년 들어 또 하나는 중대한 변화는 미국 핵전력이 양적·질적으로 크게 증강되면서 한국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해도 유럽 및 미국 본토 방어와 같은 사활적인 이해를 지킬 수 있는 여분의 핵무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 초기에는 핵무기의 숫자도 많지 않았고 공격태세로의 전환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 역할도 소련 위협 대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며, 한반도와 같은 좁은 지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술 핵무기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 핵무기 보유고는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전쟁 발발 당시 292개였던 핵무기는 1953년 7월 정전협정 즈음에는 1천개까지 치솟았다. 또한 52년 여름에 핵 대포를 비롯한 전술 핵무기 개발·생산에도 성공했으며, 표적 식별 훈련 및 모의 핵공격 훈련을 비롯한 핵공격 준비태세도 크게 강화해 신속한 핵공격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핵무기 사용에 훨씬 적극적인 행정부가 등장했고, 전술 핵무기 개발과 함께 유럽과 미국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억제하면서도 핵무기를 한반도나 중국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을 확보했으며, 정전협상이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한국전쟁이 핵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성을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이를 반영하듯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에서 핵무기 사용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맥아더의 조언도 한몫했다. 아이젠하워는 당선자 신분이었던 52년 12월 맥아더를 만나 한국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유엔군 사령관 때 주장했던 군사작전을 다시 강조했다.

    여기에는 북한을 두 동강 내기 위한 대규모의 상륙작전과 함께, 북한 및 중국의 군사 및 산업 시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 그리고 중국군의 보급로인 압록강 유역의 방사능 오염 작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전쟁 비용을 줄이기 위해 우리는 핵무기를 사용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당선자 시절에 만난 맥아더 장군도 이렇게 권고했다. 합참은 중국군이 광범위한 지하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술 핵무기 사용의 유용성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핵무기는 분명 북한과 만주, 그리고 중국 연안의 전략적 목표를 파괴하는데 효과적인 무기였다.

    물론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최소한 소련군의 참전 가능성을 높였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핵전쟁에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소련이 이미 상당량의 핵무기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곧 수소 폭탄 실험도 실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언컨대 핵무기 사용을 금기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전세계적인 신사협정에 구애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원폭 투하를 강행하는 데에는 몇 가지 걸림돌과 고려 사항이 있었다. 우선 한국전쟁 참전국가들은 조속한 종전을 희망했는데, 미국의 원폭 투하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소지가 컸다. 아이젠하워도 한국전쟁 종식을 핵심적인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원폭 투하가 조속한 전쟁 종식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를 먼저 고려해야 했다.

    둘째, 육군 참모차장인 헐(John E. Hull)의 지적처럼, “북한에는 원폭을 투하할 만큼 전략적으로 가치가 있는 목표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전 이전부터 북한에는 대규모의 군사 및 산업 시설이 미비했고, 개전 이후에는 미국의 대규모 공습으로 이마저도 초토화되었던 것이다.

    맥아더의 권고처럼 만주나 북중경계 지역에 원폭을 투하하면, 중국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지만, 이는 미국의 핵심적인 개입 목적인 “세계 3차 대전을 회피하기 위한 예방적 제한 전쟁”을 넘어서는 조치였다. 전선이 중국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련군의 직접 개입까지 야기해 ‘제한전’이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 1952년 5월 1일 미국 네바다 주에서 실시된 핵실험. 이 실험에는 무려 2천1백명의 해병대가 동원되었고, 그 주된 목적은 5.5km 거리에서 터진 원자폭탄이 참호와 지하에 숨은 적군에게 어떤 피해를 입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출처: 미국국립문서보관소

    셋째는 53년 들어 전선이 38선 인근으로 고착되면서 원폭 투하의 실효성이 크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참호와 지하시설을 파고 진지전에 돌입한 공산군을 상대로 원폭을 투하하더라도 지하로 피신한 적군들의 살상 효과는 크게 반감된다는 것이 미국의 실험 결과였다.

    미국은 52년 5월 네바다주에서 원폭 투하 지점으로부터 5.5km 떨어진 지역에 1.5m 깊이의 참호에 피신한 군인들에게 어떤 피해가 있는지를 실험했다. 결과는 살상 효과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적군과 아군이 근접 전투를 벌이는 지역에 원자탄이 떨어지면 아군의 피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핵무기 사용에 주저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원폭 투하의 전략적 가치를 자신할 수 없었다는 점에 있었다.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 최선의 결과는 원폭 투하가 확전을 야기하지 않고 조속한 종전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으로 원폭 투하에도 불구하고 전세가 크게 달라지지 않으면, 핵무기의 전략적 가치는 크게 반감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유럽 동맹국들도 바로 이 점을 제기하고 나섰다. 당시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핵 억제 전략에 자국의 안보를 의존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에서 원폭 투하의 전략적 가치가 입증되지 않으면, 더욱 큰 안보 불안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이러한 유럽 국가들의 인식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원폭 투하의 효과를 입증한다면, 동맹국들도 사후에 미국의 조치에 동의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개성을 주목하라”

    대북 원폭 투하의 전략적 가치가 별로 없다는 일부 군 수뇌부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대북 핵공격 계획을 접지 않았다. 그러자 브래들리(Omar N. Bradley) 합참의장은 53년 2월 11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회의에서 북한의 수중으로 넘어간 개성을 주목할 것을 주문했다.

    이 도시가 “(공산군의) 병력과 물자가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브래들리는 “적군의 은신처인 개성을 파괴하는 문제를 동맹국들과 협의해야 한다”며, “다만 원자 폭탄 사용 문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에 대해 덜레스 국무장관은 국제적으로 핵무기 사용을 금기시하는 도덕적 문제가 있지만, 핵무기를 다른 무기와 구분하는 “그릇된 관행을 타파해야 한다”며, 원자 폭탄 사용에 동의했다. 그러나 미국은 영국 등 동맹국의 반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젠하워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53년 3월 31일 NSC 비밀회의에 초대된 민간 자문단과의 대화에서 “미국의 유럽 동맹국들은 (미국이 동북아에 핵무기를 투하하면 소련의) 보복으로 유럽이 핵전쟁터가 될 것이라는 공포심을 갖고 있다”며, “이에 따라 현재로서는 핵무기 사용 전술을 배제해놓고 있다”고 말했다.

    브래들리 합참의장을 비롯한 미국 군부는 미국이 원폭 투하를 결심하면 확실하게 적들에게 군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최대한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원자폭탄의 광범위한 전략적·전술적 사용이 요구된다”고 아이젠하워에게 권고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는 53년 5월 20일 NSC 회의에서 한반도의 허리 부분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는 한편, 중국 본토에 대한 해공군 합동 작전을 승인했다. 여기에는 “저렴한 공격 작전을 위해 핵무기 사용도 포함”되었다. 북한에 적절한 핵공격 목표물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전비 부담을 줄이고 공산군의 결전 의지를 꺾을 수 있으며 미군 사상자 수를 줄일 수 있다면, 그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이젠하워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아이젠하워는 1년 후인 1954년 5월을 실행일(D-day)로 잡았다. 이처럼 즉각적인 핵 사용이 아니라 1년 후를 기약한 데에는, 대규모의 핵공격을 강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 기간이 필요했고, 소련군의 개입 등 확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핵무기를 비롯한 충분한 군사적 힘을 갖출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는 3차 세계대전을 불사한다는 선택이기 했다. 이와 관련해 아이젠하워는 소련이 일본 등을 상대로 보복 공격에 나설 것을 우려하면서도 “더 신속한 작전이 소련의 개입 위험을 낮추게 될 것”이라며, “소련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상황이 도래하더라도, 합참의 계획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매우 유용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이젠하워의 핵 공격 협박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 종식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갖고 있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핵무기 사용이 저렴하면서도 미국에게 유리하게 종전을 가져올 수 있는 유력한 수단으로 간주했지만, 영국 등 동맹국들은 오히려 확전을 야기할 수 있다며 신중론을 폈다. 이에 따라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선택한 카드는 1년 후를 세계대전을 불사하는 ‘D-day’로 잡으면서 중국에게 즉각적으로 ‘최후통첩’을 보내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트루먼 행정부가 중국에게 핵무기 사용과 관련해 모호한 신호를 보낸 것이 사태를 꼬이게 했다며,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로 했다. 53년 5월 20일 NSC 회의 직후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중국에게 사실상 ‘신사협정’ 파기를 통보했다. 유엔군이 압록강을 넘지 않고, 교량이나 강을 폭격하지 않으며, 원자 폭탄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철회하겠다는 것이었다. 중국이 유엔군이 제시한 정전협정안에 동의하지 않으면, “가공할 보복을 각오하라”는 의미였다.

    미국 정부는 4가지 경로를 통해 공산군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 우선 NSC 회의 다음날 덜레스는 인도를 방문해 네루 총리에게 “정전협상이 붕괴된다면, 더 강력한 군사적 조치를 취할 것이고 전선도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에게 협상 지침을 하달했다. 포로 문제에 대한 유엔군의 ‘최종안’을 공산군측에 전달하고 일주일간의 시간을 주면서 공산군측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협상은 일시 중지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종료될 것이라는 지침이었다.

    셋째는 클라크로 하여금 김일성과 팽더후이에게 서한을 전달케 했다. 5월 27일 전달된 이 서한에서 클라크는 “당신들이 휴전을 진심으로 원하면 이번 기회를 잡아야 할 것”이라고 권고했다. 끝으로 주소련 미국 대사인 볼렌(Charles Bohlen)이 6월 3일 소련의 몰로토프(V.M Molotov) 외무장관을 만나 유엔군이 제시한 최종 제안의 “심각성과 중요성”을 전달한 것이었다.

    이처럼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핵무기 사용에 공세적인 입장을 피력하면서 한국전쟁은 정전협상 타결이냐, 핵전쟁을 포함한 확전이냐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게 됐다. 아이젠하워는 트루먼 때 입안된 NSC-68 준비에 박차를 가했는데, 이는 소련과의 핵전쟁도 불사한다는 무시무시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즈음, 북-중-소 3국 동맹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북한의 남침 승인자이자 실질적인 최고사령관이었으며 정전협상 지연을 마다하지 않았던 스탈린이 사망한 것이다.

    주요 참고 자료

    Lawrence Wittner, “What Has Prevented Nuclear War?” The History News Network, July 7, 2009.
    Paul G. Peirpaoli, Truman and Korea(Missouri Publishers, 1999),
    Roger Dingman, "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 International Security (Winter, 1988-1989),
    Trent A. Pickering, “A Nuclear Dilemma-Korean War Deja Vu," U.S. Army War College March 2006
    Rosemary J. Foot, “Nuclear Coercion and the Ending of the Korean Conflict," International Security(Winter, 1988-1989), p. 100.
    인용한 미국의 비밀해제문서 사이트: http://www.gwu.edu/~nsarchiv/; http://www.trumanlibrary.org/oralhist

    *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 이 연재는 정욱식의 블로그 에서도 함께 진행됩니다.(http://blog.ohmynews.com/wooksik) 최근에 쓴 책으로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가 있습니다. 다음에 이어질 글은 ‘미국의 핵 위협이 총성을 멈추게 했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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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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