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이나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
By mywank
    2010년 08월 12일 02: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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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위험에 빠졌다. 아이는 원래부터 사랑과 보호를 받는 형편이 아니었다. 엄마가 있기는 하지만 살갑고 책임감 강한 보호자 노릇은커녕 사내랑 정 대신 악다구니를 나누거나 아이를 집안에 들여야 할 밤에 어린 딸을 집밖에 몰아내고 마약에 취해 정신줄 놓는 무책임한 어미라서 아이를 서럽게 만든다.

현실적인, 너무도 현실적인

   
  ▲ 영화 <아저씨> 포스터

‘쓰레기통’ 소리를 들으며 학교나 이웃에서 꺼려지는 아이와 그나마 소시지 반찬에 더운 밥 한 그릇 나누는 사람이래야 이웃에게 ‘전당포 귀신’ 소리 들으며 외톨이로 지내는 무뚝뚝한 옆집 아저씨가 고작이다.

그러나 아이가 유일하게 말도 트고, 웃음도 나누고, MP3에 음악 담아주는 대가로 푼돈 나누는 핑계로나마 정을 주는 상대를 아이 엄마는 잠재적 아동 성추행범 내지는 아이 핑계로 자기와 관계할 성적 대상으로 취급한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어쩌다 범죄조직에 휘말려 장기를 적출당할 처지가 되기 전부터 이미 위태로운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청소년 관람불가등급 영화인 <아저씨>를 소름 돋는 범죄와 폭력의 세계로 이끄는 어린아이 소미(김새론)의 처지는 영화를 위해 설정된 허구적 상황이 아니다.

가정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범죄에 휩쓸린다든가, 승합차 세워 두고 사람을 납치하는 노인 범죄라든가, 옆집 아저씨가 한순간에 악마로 돌변한다든가 하는 경우는 굳이 영화가 아니라도 이미 사건사고 뉴스에 차고 넘치는 이야기다.

길을 묻는 할머니를 친절하게 목적지까지 안내했다가 다리 절단 당하고 범죄조직의 앵벌이 미끼가 된 소녀, 살인적인 고리대 사채 잘못 썼다가 장기 적출 당한 소시민, 친절하게 건네는 음료수 한 모금에 정신 잃고 깨어나 보니 집창촌 쪽방이더라는 아가씨 등등의 살벌한 이야기들이 그저 떠도는 도시 괴담이 아니라 누구나 방심하다 맞닥뜨릴 수도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정범 감독은 <아저씨>를 리얼리즘 사회 드라마가 아니라 액션 장르 영화로 만들어도 충분했던 것이다.

원빈이 빚어내는 판타지

장르 영화는 일정한 주제나 소재, 형식상의 특징, 표현방식 등이 반복되거나 변주되는 특정한 양식이 대중의 지지를 받아 반복되면서 성립된다. 관객에게 기대감과 익숙함을 통해 영화를 즐길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잘되면 안전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식상할 수도 있다. <아저씨>는 이런 장르의 기본적 성격을 감독과 관객 모두가 잘 알고 있으며 그 안에서 펼쳐지는 반복과 변주의 요소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는 영화다.

세상과 담을 쌓은 괴짜 외톨이 이웃 아저씨가 마약 범죄에 휘말려 위기에 처한 이웃집 소녀를 구하기 위해 다시 총을 잡는 <레옹>이나 전직 특수 정보 요원 아버지가 인신매매 조직에게 납치된 딸을 구하기 위해 범죄조직을 박살내는 <테이큰> 같은 영화들은 <아저씨>의 설정을 익숙하지만 식상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저씨>는 그런 익숙함을 애써 가리고 변형하는 대신 최대한 경제적으로 활용한다.

   
  ▲ 영화의 한 장면

그런 정면 돌파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은 절대악으로 암약하며 일상을 불안하게 만드는 범죄 조직에 대한 공포, 공권력은 엄청나게 흥분해서 설치지만 실속 없이 뒷북치는 무능한 기관이라는 것이 경험적으로 기정사실화 되어있다는 사회적 합의, 과잉된 동작과 슬로우 모션이 아니라 간결하면서도 사실적으로 가공된 액션, 그리고 아저씨라고 불리지만 전혀 평범한 아저씨일 수 없는 주연 배우 원빈이 빚어내는 판타지다.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이 충분히 현실적이니 구구절절하게 배경 설명할 필요 없이 영화에 몰입하는데 필요한 요소만 더하기로 한 이정범 감독의 전략은 충분히 효과적이다.

너무 아름다우면서 강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 태식과 영화가 장르적으로 선택한 잔혹 액션 말고는 <아저씨>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은 지독하게 사실적이거나 현실 그 자체다.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시점에서 벌어진 ‘부산 도끼사건’은 그래서 영화의 데자뷔가 된다.

아저씨와 부산 도끼사건

‘부산 도끼사건’은 소녀와 가족이 목숨을 위협받는 처절한 상황에 처했는데 폭력을 휘두르는 범인은 마약에 취해 있었으며, 심지어 그가 휘두른 흉기는 도끼였는데 경찰은 신고를 받고도 역할 제대로 못했고, 그나마 범인을 잡은 것도 소녀의 가족이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운 다음이며, 막상 잡아 놓고도 제대로 사건을 정리해 처벌할 의지도 능력도 보이지 않고 있다가 피해자 가족이 인터넷에 사정을 호소하면서 이슈가 된 사건이다.

딸 앞에서 청테이프로 묶인 어머니, 도끼로 사람을 찍어대고도 경찰서 안에서 외려 당당해지는 범죄자, 신고를 받고도 바로 출동하지 않고 주소지 타령하느라 참극을 키운 경찰. 이 끔찍한 현실세계에서 하나 빠진 건 딱 하나, 위기에서 구해줄, 그러나 현실에는 없는 그 누군가이다.

<아저씨>는 현실에서 간절히 원하지만 찾아볼 수 없는 그 누군가를 ‘옆집 아저씨’로 만들어준다. 손톱 하나만큼만이라도 마음을 전하면 위험에 맞닥뜨렸을 때 의지해도 좋을 존재가 이웃에 있다면, 그 이웃이 경찰보다 믿음직한 존재라면, 거기다 멋있으면서도 사심은 전혀 없었으면, 심지어 근사했으면.

<아저씨>는 가족 또는 유사가족의 범위를 이웃으로 넓힌다. 알고지내기 창피한 형편의 이웃, 가난하거나 불우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는 소소한 잘못을 저지르는, 그래서 모르는 척하게 되는 그런 이웃. 그리고 그런 이웃에게 닥치는 위험을 당장 ‘오늘만 사는’ 자세로 물리쳐 줄 옆집 아저씨.

   
  ▲ 영화의 한 장면

현실에서 그런 아저씨는 없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 그런 옆집 아저씨는 없다. 대부분의 옆집 아저씨는 전직 특수 정보요원은 아니었을지라도 대한민국 군대 출신이니 기본적인 총검술은 익혔을지 모르지만, 아이에게 믿고 따르라고 일러 줄 존재가 아니다. 아이의 도둑질을 마음 좋게 넘어가주는 허름한 문방구 할아버지라도 먼저 의심부터 하라고 가르쳐야 한다. 인심이 사나워서가 아니라 그러다 큰 사고 겪는 일이 하도 많으니까.

<아저씨>는 이렇게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된 세상에서 거저 오지 않을 도움에 대한 판타지다. 오늘 도와주었으면 내일 뭔가 요구하리라는 염려를 하지 않아도 좋은 아름답고 강한 존재,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지 않는 존재.

<아저씨>의 가장 큰 미덕은 영화라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갔을 때, 정말 그런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일깨워 줄만큼 주연배우가 근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느낀 카타르시스를 엄하게 현실로 확장해서 옆집 아저씨를 섣불리 믿도록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저씨 태식은 소미에게 모든 상황이 종료된 다음 말한다. 앞으로는 혼자 살아가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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