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당과 지옥이 교차됐던 그시절 글쓰기
        2010년 08월 09일 02: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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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꽁트 쓰기의 어려움

    말 그대로 노동문학은 ‘노동’과 ‘문학’의 결합이다. 전혀 성질이 다른 두 물질 ‘노동’과 ‘문학’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제3의 물질 ‘노동문학’으로 변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노동문학은 ‘노동’도 아니요 ‘문학’도 아니면서 동시에 ‘노동’이기도하고 ‘문학’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잘 하면 ‘노동문학’이지만, 잘못하면 죽도 밥도 아닌 어중잽이로 전락한다. 이 외줄타기 같은 노동문학의 신산함에 대해서는 김사인(시인겸 평론가)이 <호루라기> 서문에서 누구보다 탁월하게 분석해 놓았다.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만 보고할 요량이라면 글재간이 있는 기자나 르뽀 작가로 충분할 노릇이지 왜 하필 소설가를 들이대는 것이랴…… 문학은 불가피하게 상당한 기간의 발표 숙성의 과정을 내부에서 거칠 것을 요구한다…… 소재나 제재라는 이름의 이야기 거리가 곧바로 문학작품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이러할 때 당면한 단기적 상황에 대처하는 응급성은 문학의 지극히 부수적인 기능일 뿐이다. 상황의 급박함에 호응하여 이루어진 시나 소설들 가운데 걸작이 없으란 법이 없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평소 작가의 관심과 마음의 준비가 상황에 걸맞을 만큼 충분해야 하는 것이다.

    문학의 응급적 효용을 편협하게 관념적으로만 강요할 때 고유한 방식으로 해방에 기여한다는 문학의 이상은 그 깊이와 풍부함을 상실하고 천박한 예술 도구주의로 짜부라들고 만다.”

       
      ▲ 꽁트 첫 연재할 당시 인터뷰 사진. (사진=전노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전노신은 격주로 발행되니까, 정확히 2주일에 한 편씩 써야했다. 꾹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가? 시간에 쫒기다보면 속이 바짝바짝 탔다. 피가 말랐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꼭 좋은 작품을 썼을 거란 보장도 없지만, 그래도 시간제약이 없었다면 달라졌을 거란 미련을 버릴 수가 없다. 그만큼 아쉽고 성에 안 찼다.

    쓸 이야기들이 충분히 숙성될 때까지,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당위적으로는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익기도 전에 손을 대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억지스럽고 턱턱 어딘가에 걸렸다. 이리 붙였다 저리 뗐다 몇 번이나 바꾸는 사이에 작품은 작품대로 너덜너덜 망가져 버렸다. 나도 모르게 끙끙 앓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구상을 다 마쳐도, 순탄하게 글이 끝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10%도 안 되었다. 90%는 항상 중간에서 다시 구상단계로 되돌아가거나, 아님 처음부터 아예 새로 구상한 적도 비일비재했다. 문제는 이렇게 저렇게 몇 번이나 고쳐도 마음에 들지 않을 땐 정말 두 다리를 뻗고 울고 싶었다. ‘빵구’ 내고 싶은 유혹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청한 일이니 누굴 원망하겠나. 후회한들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앞으로 갈수도 없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매번 지옥 같은 형벌을 겪다보니, 그것도 3개월쯤 매를 맞다보니, 맷집이 생긴 모양이다. 처음보다 덜 아프다. 제법 뒤를 돌아볼 여유마저 생겼다.

    전국 노동자들의 호응

    3개월쯤 지나니 조금씩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좋다, 싫다, 재미있다, 없다, 무슨 말이든 좋았다. 듣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도 어떻다고 말하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꽉 다물었다. 궁금하다 못해 서운했다.

    내 입으로 어떠냐고 묻기가 쑥스러웠지만, 참다못해 내가 먼저 편집자들에게 넌지시 물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재미있다, 귀엽다,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실례가 될까봐 말을 못했다는 것이다. 비록 입에 바른 거짓말이라도 좋았다. 그 말 한마디에 그땐 용기백배 힘이 났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기뻤던 건, 현장에 취재하러 갔을 때다. 조합원들이 해동이네 이야기를 꺼내면 쥐구멍에라도 숨고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동시에 하늘을 날듯 신이 나기도 했다. 전국 노동자대회 때였다. 한 노동자가 불쑥 다가오더니 해동이 삼촌하고 이모하고 사귀게 되냐고 물었다. 그땐 정말이지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얼마나 반갑고 기쁘던지.

    이런 독자들의 호응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느 새 6개월이 훌쩍 지났다. 6개월 동안, 꼬박 한 달에 두 편씩, 혼자서 꽁트 13편을 완성했다. 작품의 질과 수준은 둘째고 한번도 ‘빵구’ 안 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뿌듯했다.

    그동안 복잡했던 개인적인 문제들이 해결되면서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창원으로의 이주를 단행했다. 어차피 선택한 거라면 제대로 해보자. 본격적으로 노동문학의 길을 찾아가보자. 답은 누가 찾아주는 것이 아니다. 혼자 찾는 수밖에 없다. 현장으로, 더 밑으로, 더 낮게 내려가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동문학의 화두를 붙들고 현장이 있는 창원으로 내려가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전노신 연재가 문제였다. 이제 좀 재미가 붙을 만한데 여기서 중단하기는 좀 아까웠다. 무책임하다는 기분도 들었다. 또 다시 노동문학 문우들을 찾았다. 나 혼자 되든 안 되든 용을 써서 좋은 싫은 성과를 보였으니 다시 한번 제안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안재성, 윤동수, 김응교가 합세하기로 했다. 네 사람이 돌아가면서 쓰면 한 사람이 두 달에 한 편씩 쓰면 된다. 두 달이면 작품 하나 완성할 시간으로 충분했다. 부담이 훨씬 적어져서 그런가? 그때부터는 작품 쓰는 일이 즐거웠다.

    이렇게해서, 1991년 11월 28일부터 네 명이 돌아가며 쓰기 시작하여 1992년 12월 3일까지 연재를 마쳤다. 그동안 연재된 꽁트는 나 17편, 윤동수 7편, 안재성 4편, 김응교 4편씩이다.

    지금 다시 하라면 못 할 것 같다. 과연 이런 작업이 개인의 모험이나 도전정신만으로 가능한 일인가? 아니다.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세계 어디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나 중국 등 어느 나라에서도, 노동자신문에 꽁트를 연재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참 대단한 시절이었다. 안 그런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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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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