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신은 없다, 질병만 있을 뿐"
        2010년 08월 09일 08:5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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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독방이었거든요. 그런데 저녁마다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누가 구석에 앉아 저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계속 드는 거예요. 하루는 자고 있는데 그 여자가 제 얼굴을 만지는 겁니다. 너무 무서워 눈을 뜰 수가 없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전날 먹던 빵이 반쯤 없어져 있고….”

    귀신 이야기

       
      ▲ 2007년 개봉된 영화 <전설의 고향>의 한 장면

    시국사범으로 구속되었던 한 후배의 체험담입니다. 주변에서 한두 번쯤 들어봤음직한 이야기인가요? 그렇죠. 비슷비슷한 귀신 이야기 참 많습니다. 여름에는 더욱 그렇고요. 귀신도 대목이 있는 거죠. 무척 바쁜 모양입니다. 안 나타나는 데가 없어요. 국회에도 처녀귀신이 나타났다고 하고, ‘소녀시대’의 뮤직비디오에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다고 하고. 하긴 연예인들의 귀신 이야기는 더 이상 신기하지도 않을 정도지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런 이야기들이 대개 그럴듯한 배경을 갖고 있단 말이죠. 가령 후배의 그 독방에선 바로 며칠 전 임신한 여죄수가 숨지는 일이 있었다네요. 글고 처녀귀신이 나타났다는 국회터는 조선시대에 궁녀들의 공동묘지였답니다. 그럼 귀신이라는 게 정말 있기는 있는 겁니까?

    홍승기님의 글 ‘김시습, 기일원론의 개척’(레디앙, 2010.4.1.)에 유학자들의 귀신 이야기가 잘 정리되어 있기에 인용을 해보겠습니다. 김시습은 『금오신화』중 <남염부주지> 편에서 염왕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있으면 사람 혹은 사물이라 하고 죽으면 귀신이라 한다.” 『성호사설』을 쓴 이익은 또 “영(靈)이 물(物)을 떠나면 귀신이 된다”고 했습니다. 귀신이 있다는 소리 같죠?

    근데 김시습은 또 이런 말을 합니다. “귀신은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다. 죽으면 정기가 흩어지고…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소리도 형체도 없으니 없는 거 아닌가요? 그러면 『금오신화』에 등장하는 그 많은 귀신들은 다 어떻게 설명할건지 궁금해집니다.

    『금오신화』에는 사람 죽은 귀신 말고도 물귀신, 바위귀신, 계곡귀신, 나무귀신 등 온갖 요괴들이 등장하거든요. 서경덕은 <귀신생사론>에서 “사람과 귀신은 기(氣)가 모이고 흩어지는데 지나지 않는다. 죽으면 몸도 혼도 흩어져버려 귀신은 없다.”고 했습니다. 성리학에선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게 원칙이었으니 이해는 갑니다만, 글쎄요.

    동의보감과 귀신

    아시다시피 한국의 민간신앙은 귀신이 있다는 쪽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된 귀신은 4대에 걸쳐 제사를 받으면 소멸된다고 합니다. 제사를 받지 못한 귀신은 원귀가 되는데 한이 많은 귀신이 특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진오귀 굿이란 걸 지냅니다. 그런데 고조 할아버지까지 제사를 지내야 후환이 없다는 건 아무래도 성리학의 이데올로기가 스며든 것 같지 않습니까?

    한의학에선 어떨까요? 귀신이니 요괴니 하는 표현이 보이지만 그것은 명백히 질병으로 해석됩니다. 동의보감의 설명입니다.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다 요망한 것을 ‘사수(邪祟)’라 한다. 심하면 평생 보지 못한 일과 온갖 귀신의 일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혈(氣血)이 극히 허약하고 신광(神光)이 부족한데다 담화(痰火)가 끼어 생긴 것이지 진짜 귀신이 있어 생긴 것은 아니다."

    허준 선생의 후예인 저는 마땅히 앞에서 말한 후배의 경험을 병리 현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옆구리가 자주 결리지 않느냐, 기름기 있는 음식 싫어하지 않느냐, 어깨가 잘 뭉치지 않느냐, 평소에 겁이 많지 않느냐…. ” 모든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모두 담(膽)이 허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거든요. 담이 허하면 심(心)도 허합니다. 심과 담이 허하면 잘 놀라고 무서움이 많습니다.

    주사(朱砂)라는 약이 있습니다. 진사(珍砂)라고도 하는데 황화수은이 주성분인 붉은 가루입니다. 아이들 경기 들린 데 입술에 바르기도 하고 시집갈 때 연지곤지로 쓰기도 하지요. 삿된 기운을 물리친다고 하는데 약리적으로는 흐트러진 정신을 바르게 하고 심장을 강하게 합니다. 후배에겐 옆구리를 자주 문질러주고 옆으로 쭉 펴주라고 했습니다. 담을 강하게 해주는 동작이거든요.

    동의보감에는 이밖에도 담병(痰病)이나 부인의 열입혈실(자궁에 열이 침범한 병), 노채(결핵), 온역(열성 전염병)등에 걸렸을 때에도 귀신들린 것 같은 증상을 보인다고 적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귀신들린 자도 대개 질병과 관련이 있고요.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의 귀신』이란 책을 쓴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도 귀신과 결부된 여러 가지 질병의 퇴치법을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곧 질병이고 질병이 귀신인거죠.

    사실 한의학은 실용학문인지라 귀신의 작용을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성리학은 또 인간의 이성을 중요시하므로 귀신에 얽매이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겠고요. 그러나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귀신현상을 의학이나 이성이란 말로 다 재단할 수 없다는 건 저도 알고 여러분도 압니다. 그럼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다음 주엔 좀 다른 각도로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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