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정치적으로, 더 인간적으로"
    치명적 편견, 잘못된 도덕론을 넘어
        2010년 08월 07일 05: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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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보적이되 정치적이어야 하고 인간적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진보적인 것을 위해 개인 삶을 희생해야 한다고 보거나, 정치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진보의 훼손 내지 도덕적 타락으로 이해하는 한, 진보정치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진보를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과거 차티스트 운동 당시 노동자 대표들이 세비(歲費)를 요구한 것에 대해 귀족정치가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공익에 봉사하고 그러기 위해 개인 이익을 희생하는 것에 가치를 두어야지 돈이나 사적 이익을 추구하려 한다.”고 비난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진보정치에 대한 잘못된 주장

    진보정치의 길을 개척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정치적’이라고 비난하고 “정치적이 아니라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하기 쉬운 옳은 말”을 강변함으로써, 진보가 “제대로 정치적”일 수 있는 기회나 공간을 제약하려는 잘못된 주장은 절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인간과 정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그 바탕 위에서 진보의 성취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바로 이런 생각을 지금부터 여러 방식으로 말해보고자 한다.

    2.

    정치학을 전공했고 정치의 문제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계속 말하게 되는 본 필자의 입장에서는, 언제든 누군가가 “정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상황을 가정하게 된다. 그때마다 이렇게 답하곤 한다.

    기본적으로 정치는 설명도 예측도 잘 안 되는 분야이다. 경험 분석의 대상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실천적 영역이다. 그 특징을 비유적으로 말하라면, “교과서가 없는 분야”라고 하고 싶다. 경제학의 경우 교과서 없는 상황을 생각하기 어려운데, 그와 비교해보면 정치학이 얼마나 대조적인지를 알 수 있다.

    그 어떤 이론으로도 정치의 현실을 전체적으로 다 말할 수 없다. 정치에 대해 뭔가 포착했고 알게 됐다 싶으면 “마치 손에 쥔 모래”처럼 쓱 빠져 나간다. 제 아무리 뛰어난 정치학자도 정치 현상의 일부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정치학자 출신으로 성공한 정치가 모델을 찾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유능한 정치가가 뛰어난 정치학자를 거느리거나 자문을 구할 수는 있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있기 어렵다고 본다. 좋은 정치가가 되는 것이 좋은 정치학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위대한 일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한마디로 말해 정치란 정치학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배우고 가르치기 어려운, 인간이 실제로 움직여서 성취를 이뤄내야 할 매우 실천적인 분야라 할 수 있다.

    정치란 불확정적이고 불가예측적인 힘과 에너지, 열정이 표출하고 충돌하는 세계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복잡함을 가장 풍부하게 표출하고 있는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정치가 갖고 있는 이런 특징 때문에, 정치 행위의 윤리적 기초 역시 다른 영역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종교나 도덕 운동처럼 절대적 선과 옳음을 정치의 윤리적 기초로 삼는다면 십자군전쟁의 비극이나 전체주의의 길을 피할 수 없다.

    정치, 매우 무서운 영역

    정치는 확실한 진리가 지배하는 곳이 아닌 불확실성의 세계이다. 틀릴 수 있다고 가정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지혜로부터 배울 수 있어야 하며, 오늘은 어제보다 더 낳은 실천을 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 나날이 진보할 수 있기를 희망해야 하는 곳이 정치이다. 동시에 좋은 선택과 그렇지 않은 선택 사이의 결과가 거의 재난에 가까운 차이가 있는 곳도 정치이다.

    정치 없는 인간 공동체를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정치의 역할과 기능 없이 인간 사회가 평화와 안전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필시 거짓말쟁이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갖고 있는 영향력이 충분해서, 있는 현실을 초월해 말해도 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인간사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정치이지만, 그것이 매우 무서운 영역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정치 행위란 위험한 선택을 감수해야 하는데, 바로 그 때문에 이념적으로나 규범적으로 옳은 선택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정치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늘 생각해야 한다.

    정치 행위 내지 정치적 선택의 윤리성은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하는 측면만이 아니라, 바람직한 성과를 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결과의 측면’에서도 고려되어야 하고, 이 양자의 균형을 만들어가는 것이 정치가에게 부여된 ‘책임성’ 혹은 ‘책임윤리’라고 할 수 있다.

    3.

     정치와 정치가 아닌 것 사이에 여러 차이가 있지만, 그 핵심은 권력의 문제에 있다. 대부분 진보적 인사들의 사고에서 진보적인 것을 말하면서 그것을 정치적이지 않고 권력적이지 않은 어떤 것으로 상정할 때가 많으나, 그런 생각이 진보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이었다 할 만큼 매우 유해했다.

    권력과 통치의 기능 없이 인간 사회가 뭔가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다면 사실 정치란 필요 없을 것이다. 권력이라는 중심 요소 때문에 정치는 앞서 말한 대로 두렵고 무서운 영역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권위와 복종, 폭력과 강제의 효과를 통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치명적 편견 또는 잘못된 도덕론

    정치 없이 인간 사회를 말할 수 없고 권력의 기능 없이 정치를 말할 수 없다면, 진보 역시 정치와 권력에 대한 현실적 이해를 가져야 할 것이다. 권력의 문제를 끌고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진보라면 운동이나 사회봉사 내지 종교적 헌신의 실천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권력의 기능과 역할이 선한 방향으로 발휘되어 정치적 성과를 내야 하고 그와 동시에 그것의 행사가 자의적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고민이 있어야 하지, 자신은 반권력적이라는 것을 자랑하거나 권력에 물들지 않고 낮은 곳에 임하는 ‘아름다운 진보’만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으로 진보의 영역에서 권세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한가한 습속도 자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까지 말한 정치의 특성 때문에, 정치가 혹은 정치를 직업으로 선택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폭력과 강제를 본질로 하는 권력의 기능을 선용할 수 있는 담대함과 그만한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권력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면해야 할 도전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정치적이지 않고 권력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잘못된 도덕론에 위축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성과를 내고 권력을 선한 목적에 사용할 강한 의지를 가졌으면 한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4.

     현대 민주주의에서 권력 문제의 핵심은 대표 내지 정치가의 결정에 일정한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시민이 직접 통치에 참여했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정치는, (내적으로) ‘노예와 여성에게 생산과 재생산을 전담시킨 시민 집단의 여가’에 기초를 둔 아주 작고 동질적인 통치 단위에서 실천될 수 있는 것이었다. 동시에 (외적으로는) 도시공동체 외부의 강력한 적들과 거의 일상화되다시피 했던 전쟁의 환경에서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규모 영토와 인구, 사회적 기능 분화, 보편적 시민권 등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 이후의 정치변화 내지 현대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를 놓고 볼 때, 시민의 직접통치 내지 집회민주주의, 광장민주주의를 대안으로 말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동시에 위험한 일이다.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정치학자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는 학문적으로 게으른 사람이고, 정치가가 그렇게 주장한다면 실천적으로 게으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렇게나 말하고 주장하는 정치학자의 게으름이 가져오는 유해 효과는 사회적으로 그리 치명적이지 않으나, 정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그가 영향력을 크게 가질수록 심각할 수밖에 없다.

    직접 민주주의 강조, 진보 과시 욕구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제와 보통선거권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정치체제보다도 대규모의 사회구성원에게 정치적 평등의 권리를 부여할 수 있었다. 계급, 성, 출생, 신분의 차이와 시민권 사이의 관계라는 기준으로 보면, 현대 민주주의는 근대 이전 그 어떤 민주주의보다도 진보적이다.

    민주주의를 이상적으로만 생각하면서 직접 민주주의의 가상적 실현을 꿈꿀 수는 있겠지만, 인간이 진공상태에서 살 수 없듯이 민주주의 역시 모든 차이와 갈등이 사라진 광장의 집회장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문제의 핵심은 “대의제를 제대로 하고 투표를 중요하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직접성’의 가치는 다양한 시민 참여의 실험과 제도를 창조적으로 모색하고 보완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접근해야지, “대의제와 선거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고 직접 민주주의와 추첨제가 진짜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뭔가 진보적인 것을 과시하려는 욕구를 표출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5.

    현대 민주주의는 ‘인민의 직접 지배’ 체제가 아니라 ‘인민의 동의에 의한 지배’ 체제를 특징으로 한다. 냉정하게 말해 “일반 시민의 지지에 정당성의 기초를 둔 정당과 정치가들의 경쟁체제”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이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는 “대중과 정치엘리트가 협력하는 체제”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좋은 정당이라면 지지자와 정치가 사이의 좋은 협력의 체계를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고, 진보 정당 또한 나름의 좋은 협력 체제를 발전시켜서 성과를 내야 할 것이다.

    진보도 집권해서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권력을 선용할 수 있는 정치 이론도 발전시켜야 한다. 유능한 정치 엘리트를 배출해야 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지지자를 대규모로 결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정당들은 바로 이 과제를 개척하고 실현하는 데 다른 무엇보다도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앞서도 여러 번 강조했듯이, 인간 사회에서 지배와 통치, 폭력의 요소를 부정한다면 그건 인간 사회의 정치가 아닐 것이다. 천사가 아닌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정치는 필요하고, 그 위험한 분야를 담대하게 다룰 사람도 필요하고, 그만한 기술과 역량 그리고 전문적인 지식도 필요하다.

    민중적인 것, 진보적인 것의 가치만 앞세우면서 정치적인 것의 중요성을 소홀히 하는 사람을 신뢰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정치적 이성을 갖추지 못한 진보파들이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말하게 될 “진보적이기만 하면 된다.”고 강변하는 소리를 계속 듣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대중과 정치엘리트가 협력하는 체제

    정치가들에게 적극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리더십의 순기능이 정당 안에서 어떻게 자리잡게 할지를 고민하고, 우리의 현실에 맞는 정당 민주주의 모델을 개척해 갈 수 있어야 한다.

    그간 전체적인 시민 여론과 단절된 채 자신들만의 게토를 구축해 왔던 진보정당들, 그마저도 몇 개의 소문화주의로 분열되어 대립해 온 진보정당들이 스스로의 폐쇄적 악순환 구조를 끊을 수 있는 길은 더 넓고 광활한 정치의 세계로 과감하게 나서는 것밖에는 없다.

    정치가다운 정치가가 없는 정당이라면, 리더십의 적극적 역할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정당이라면, 그건 진보연하는 호사가들의 서클이지 진보적 가치를 대중적으로 실천하는 제대로 된 정당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대규모 대중정치의 영역에서 성과를 내는 것을 바탕으로 당내의 여러 문제와 분열의 요소들을 개선해가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잠재력 있는 정치 엘리트들을 덕아웃에 가두어 놓고 폐쇄적인 다툼만을 계속하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넓은 경기장으로 달려 나가 자신들의 기량을 경쟁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치엘리트 없는 민주주의, 리더십 없는 민주주의에서는 일반 대중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붕당과 정파의 권력이 커진다는 것, 이는 적어도 필자가 정치학을 통해 배운 가장 기초적인 이론 가운데 하나다.

    ‘통치의 정치학’을 진보가 발전시키지 않은 채, 지금까지 그랬듯이 ‘저항의 정치학’만 고수한다면 끊임없이 제기될 이슈들과 요구들 사이에서 분열만 계속하게 될 것이다. 받아들이기 괴로울 수도 있겠지만, 이게 인간이 대면할 수밖에 없는 정치의 현실이고 이런 측면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서 진보정치가 성장해 가야 할 것이다.

    6.

    ① 지금까지 인간의 정치에 대한 나름의 이해방법을 이야기했는데, 마지막으로 그런 방식의 정치적 이성을 갖추는 것이 인간적인 풍모를 갖는 것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말해보겠다.

    ② 한마디로 말해 정치적 이성을 갖춘 정치가 내지 활동가들은 겸손하고 신중해 진다는 것, 이제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과도한 확신과 비타협적 이상주의는 비정치적 사고의 산물일 때가 많으며, 결국 현실의 복잡함과 갈등적 혼재 속에서 성과를 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비난하는 논리를 제공하는 것 이상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정치적인 것의 가치를 이해할수록, 정치적인 것의 위험성을 깊이 수긍할수록, 권력과 지배 등 정치 현상의 불가피한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할수록, 그는 반드시 인간적이 되고 신중해지며 그가 말하는 내용도 더 풍부해진다.

    그렇지 않고 운동과 이념의 논리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조건 옳고 진보적이고 뭔가 역사 발전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례하고 공격적이다. 주장이 강하고 비타협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끼리 폐쇄적 의견집단을 형성해 그들만의 세계 속에서 살고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한다.

    이에 반해 정치적 이성을 갖춘 사람들은, 앞서 끊임없이 강조했듯이 늘 내가 틀릴 수 있고, 그래서 타인으로부터도 배워야 하고, 내가 다루는 무기들이 위험함을 책임감 있게 자각하는 사람들이다. 협력과 공존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도 이들이다.

    진보에 정치와 인간 종속시켜선 안돼

    인간은 천사가 아니고, 천사에서 정치를 맡길 수도 없다. 모든 시민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될 수도 없다. 보통의 시민, 평균적 인간의 한계 위에서 현실의 정치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정치적 판단의 대부분은 해소할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 이익과 열정을 달리 하는 집단적 이견들 속에서 이루어진다.

    아무리 설득하고 차이를 좁히려 해도 완벽한 일치를 이룰 수 없는 차이와 갈등도 많다.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이런 사실을 인정할 때 현실에 가깝고 뭔가 실천 가능한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인간적 삶을 풍부하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 진보적이어야 하고, 민주주의의 정치적 내용이 가난한 서민들에게도 공정하게 실천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진보적이어야 하지, 거꾸로 진보적인 것에 정치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를 종속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럴 경우 폭넓은 시민 대중의 지지를 조직하기는커녕 진보파 스스로 자기소진적 결과만을 가져올 것이다. 인간과 정치의 현실을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기초 위에서 진보의 길을 깊고 넓게 개척해 가야 할 것이다.

     진보적인 것만을 앞세우는 접근은 과도한 자기 확신을 강요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을 분열과 상처로 얼룩지게 하고, 인격적인 요소를 경시하게 만들어 진보정치를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며, 정치적 냉소주의와 허무주의를 확산시키는 부작용을 낳는다.

    진보파, 아름다움에 대한 자각 있어야

    민주주의 하에서는 진보도 여러 정치 세력의 하나이고 스스로의 권위와 영향력은 다른 정파와의 민주적 경쟁을 통해 성취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보수 없는 진보 세상’을 꿈꾸는 것은 진보적일지는 몰라도 민주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전체주의에 가까운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보수 등 다른 정파의 사람들과는 정치적으로 경쟁해야지 이념적으로 공존 불가한 것으로 적대하거나 인격적으로 배척, 무시하는 식이면 곤란하다. 그건 진보적인 태도라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인간적인 가치와는 양립하기 어려운 일이다.

    ⑤ 정치가 파당성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누군가 파당적인 것과는 무관하게 누구나 따를 수 있는 판단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 정치가나 정치학자가 있다면, 필자는 그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파당적으로 말하고 글을 쓸 수밖에 없다 하다라도 최대한 보편적이고 아름답게 표현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파당적이기 위해서는 공격적이고 전투적이어야 한다는 듯이 말하고 글을 쓰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자각이 없는 진보파라면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다. 근본적으로 진보는 지금 현실을 개조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인위적 노력을 최대한으로 실천하려는 힘이기 때문에 그 힘이 인간미의 풍부함 없이 추구된다면 그건 보수보다 더 위험할 것이다. 아름다운 삶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경시하지 않는 진보파가 많아지길 진심으로 기대한다.

    7.

    지금까지 말한 것을 요약하면 이렇다.

    정치적 이성이란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에 대한 존중, 무지의 가능성에 대한 자각, 진보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이념과 가치의 다원주의, 누구든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의 존중, 타인에 대한 인간적 정중함과 관용 등등을 내용으로 한다. 그 기초 위에서 진보가 진보다워야 하지, 거꾸로 진보적인 것을 위해 정치를 부정하면 안 된다. 지금의 진보는 보다 더 그리고 제대로 정치적이어야 한다.

    진보의 열정이 정치적 이성과 만나고 그것이 보다 넓고 풍부한 인간적인 기초 위에서 성장해갈 때 진보 정치는 매력을 갖게 될 것이다. 또 그런 매력을 갖게 될 때 진보는 한국 정치의 주변을 박차고 나와 민주주의 발전에 중심적 기여자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 * *

    * 이 글은 지난 7월 23~24일 진보신당 지방의회 당선자 워크숍에서 필자가 강의했던 내용을 수정 보완한 것이며, 오는 8월 14~15일 진보신당의 6.2 지방선거 출마자 워크숍 강연 자료다. 필자의 강의와  관련 당시 참석했던 사람들 사이에 "인상적이고 도움이 됐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으며, 일부 참석자들은 트윗에도 관련 내용을 올리기도 했다. 

    또한 이 글에서 필자가 강조한 대목은, 최근 심상정 전 대표가 경기도 당기위 결정에 대한 이의 신청을 하면서 당원들에게 보내는 글에서도 일부 인용되기도 했다. <레디앙> 독자들도 일독할 만하다는 판단에 따라 전재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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