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꼴, 좌빨 그리고 잉여만 있다"
    2010년 08월 06일 08:07 오전

Print Friendly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90년대 중반, 초중생 신분이었던 지금의 88만원 세대는 당시 최고의 인기그룹이던 듀스의 ‘우리는’이란 노래의 후렴구인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란 유사-실존주의적 절규를 잊지 못한다.

전주가 꺼진 상태에서 외롭게 울부짖던 듀스 김성재의 솔로 파트는 가사의 그 키치성에도 불구하고 학교가 그냥 싫고 인생이 그냥 심심하던 사춘기 소년들의 가슴에 ‘무언가’를 생생하게 각인시켰다. 딱히 꼬집어서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뭔가 폼 나고 멋스러워 촌스러운 ‘꼰대 녀석’들과 자신을 뚜렷이 구별시켜주던(이것은 다른 가수들과 뚜렷이 구별됐던 듀스를 내면화한 결과다), 그 ‘무언가’를.

‘무언가’란 무언가?

과학자 정재승과 미학자 진중권은 『크로스』라는 300여 페이지짜리 책 한권에서 21세기 탈근대 사회의 21가지 미시 문화 요소를 펼쳐서 (듀스는 해체되고 김성재는 죽었지만) 여전히 20~30대의 현재 삶을 지배하는 그 ‘무언가’를 폭로한다.

커피 한 잔에 낭만과 신비를 파는 스타벅스(12~25쪽), 디지털 시대의 구루 스티브 잡스(26~41쪽), 삶의 기록이 아닌 나르시시즘적 욕망의 기록 셀카(120~135쪽), 현대 여성의 할례 의식이 된 쌍꺼풀 수술(136~151쪽), 쓰임보다 특정한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흉내 내기 위해 구입되는 프라다(168~183쪽), 사실은 웃기지 않지만 그래도 웃기는 유재석과 강호동(230~245쪽) 등.

이들 문화 요소들이 일관되게 발설하는 것은 원본적 가치의 종언과 이미지 시대의 도래. 보드리야르라면 ‘파노플리 효과’라고, 부르디외라면 ‘구별 짓기’라고, 그리고 우리네 보통내기들이라면 흔히 ‘가오’ 혹은 ‘가다’라 부를 그 무엇의 시대. 이제 쓰임이나 필요 혹은 원본의 아우라 대신 복제본의 특정한 분위기나 상징 혹은 기호가 중시되는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한마디로 실체 없는 것들이 지배하는 시대, ‘무언가’란 ‘무언가’ 자체인 세상.

사실 이 같은 지적은 정재승과 진중권의 독창적 발견은 아니다. 이미 20세기 초반 벤야민에게서 선취된 사상의 씨앗이, 일군의 프랑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게 이식된 후, 20세기 후반 보드리야르에게서 요란스럽게 개화했던 것이다.

정재승과 진중권의 성과라면 이 유럽산 해석의 틀에 현대과학과 디지털미학을 버무려 21세기 한국 문화의 지형도를 새로 그린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보드리야르 복제본은 어떤 이상한 독자(필자)를 만나 복제본의 복제본, 즉 시뮬라크르로 새롭게 분화되는데…

종언의 시대

우스갯소리로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을 ‘수꼴(수구꼴통의 줄임말)’, ‘좌빨(좌익빨갱이의 줄임말)’, ‘잉여’의 삼분법으로 구분하곤 한다. 여기서 ‘수꼴’과 ‘좌빨’은 비상식적 수준으로 한쪽으로 경도된 자들. 물론 상식적 수준의 우파와 좌파는 ‘수꼴’과 ‘좌빨’의 카테고리에 포함되지 않을 터.

문제는 우리나라에, 필자에 의해 비상식으로 분류되는 ‘수꼴’과 ‘좌빨’의 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이념적 경화 현상은 분명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관련 있을 듯하다. 신념이란 때로 분노와 상처를 먹고 단단해지기도 하니까.

가령 ‘수꼴’의 내면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200만여 명의 죽음이, ‘좌빨’의 내면엔 1980년 5․18 민주항쟁 당시 500여 명의 죽음이 살고 있을 것이다. 이 동지들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의 신체에 강렬한 트라우마로 육화되었을 게다. 그것이 ‘수꼴’들에겐 분노 혹은 패배감으로, ‘좌빨’들에게 역시 분노와 패배감으로, 다시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로 인한 자신감 혹은 승리 뒤의 허무감으로 자리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우리, 88만원 세대들에겐 그것이 없다. 이들이 여분의 존재, ‘잉여’인 이유는 상처가 없기 때문이다. 상처가 없기에 분노도 적도 이념도 뭐도 없다. 심지어 우리는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현실사회주의 체제 붕괴 후, 허무감에 빠진 386세대(소수의 ‘좌빨’이 포함된)의 지적 위안이었던 포스트모던의 풍토 위에서 자랐다. 가치와 이념들이 해체되고 붕괴된 허허벌판에서. 그렇게 우리는 묘지에서 컸다.(1997년 IMF체제는 확인사살이었다.)

이미 죽은 곳에서 태어난 우리들은 기억할만한 동지의 죽음을 갖고 있지 않다. 트라우마가 없다. 기껏해야 수능이나 연애에서의 초라하고 부끄러운 실패의 경험 따위가 가슴 깊이 감춰져 있을 뿐. 해서, 연대 역시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저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모니터 속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소통을 가장한 독백을 배설할 뿐.

해방의 시대

하지만 이 상처를 모르는 ‘잉여’의 탄생은 이념의 종언에 대한 진혼곡이자 실존의 해방을 알리는 전주곡이기도 하다. 집단적 상처가 없기에 집단적 수준의 윤리적 강제 역시 없다. 게다가 개인주의의 심화는 집단주의가 부과하는 윤리의 당위, 그 윤리를 내면화시키는 아버지 체제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이제 집단이 강제하는 윤리는 힘을 잃었다. 윤리는 다른 사람이나 사회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 입법도 사법도 모두 일개인이 스스로 처리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크로스』에 묘사된 안젤리나 졸리의 사례(152~167쪽)처럼.

해방의 징조는 윤리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감지된다. 어디서? 전술한 것처럼, 불어나고 있는 상징가치와 기호가치의 홍수 속에서. 이제 중요한 것은 사용가치도 교환가치도 아닌 기호가치다. 유한한 자원에 비해 기호는 무한하다.

기호는 자원처럼 누가 선점하는가의 문제 대신, 누가 창조하는가란 고민만을 요구한다. 게다가 기호를 창조하고 팔아먹으며 창조자는 중세시대 신의 권능을 맛본다. IT문화의 구루로 칭송받는 스티브 잡스(26~41쪽)처럼.

기호의 창조는 자원의 선점 투쟁에 비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여기서 근대적 위계질서의 붕괴 가능성도 함께 열린다. 물론 잡스를 정말로 신처럼 섬기는 일부 아이폰 마니아처럼 중세적 예속과 위계 역시 여전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탈주할 수도 전복할 수도 있는 것. (내가 읽은) 정재승 ․ 진중권 구루(?)들은 그들의 복음서(?) 『크로스』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여기 종언과 해방이 교차하는 서광이 밝았노라. 우리 일상을 가로지르고 세로지르는 가치는 이념도 윤리도 아닌 기호의 창조와 선취의 끝없는 놀이에 있나니, 오만과 편견으로 시퍼렇고 시뻘겋게 물든 ‘수꼴’과 ‘좌빨’들이여, 속히 ‘잉여’로 개종하라!”

하지만…

뱀발을 덧붙이자면, 여전히 남는 문제는 ‘이게 다 뭔가’하는 푸념. 원자화된 개인이 느낄 고립감. 유일신(원본)이 죽었다는 선언에서 맛볼 허무감. 다신(복제본)이 창궐하는 세상에서 겪을 혼란. 해서, 다시 실존적 불안. 다시,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