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로 혼자 걷고, 혼자 사는 '길, 삶'
        2010년 07월 28일 06:1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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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면서 때로 혼자 걸어야 하는 때가 있듯 길도 혼자서 걸을 수밖에 없는 좁은 길이 있다. 다음 날 도착한 창녕의 작은 마을 영아지에서 용산리까지 이어지는 도보길이 그랬다.

    혼자 걷는 길

    한때 트랙터가 드나들었던 이 길 위에서 마을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학교와 남지장이 서는 남지읍까지 왕래했다. 그러다 서서히 넓고 편리한 길을 이용하게 되면서 인적 드문 길이 되었고, 길의 폭은 점점 좁아졌다. 두 사람이 손 잡고 걸을 수 없는 좁고 가파른 길이지만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보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환경운동가 감병만 씨(마창 환경연합)는 7년 전부터 이 길을 걸었다. 그에겐 남다른 길이다.

    “저 길은 낙동강이 품고 키운 길입니다. 저희는 그냥 편하게 개비리길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개비리길은 우리가 나중에 넘어가게 될 청학로에 있습니다. 마을 분들은 이 길을 2차선 도로로 내달라고 합니다.

    공사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많이 모시고 오고 있습니다. 길 오른쪽은 낭떠러지입니다. 아름다우면서 위험한 길입니다. 아픔의 현장을 보는 것이 구원의 힘도 성장시킨다고 믿고 있습니다.”

       
      ▲ 개비리길 (사진=이상엽 작가)

       
      ▲ 개비리길 (사진=이상엽 작가)

       
      ▲ 개비리길 (사진=이상엽 작가)

    개비리길의 ‘개’는 물가, 강가를 뜻하고, ‘비리’는 벼랑, 절벽을 뜻하는 이곳 말이다. 숲으로 들어서자 어제 걸었던 길보다 훨씬 더 작은 소로길이 나온다. 이곳 역시 그동안 만난 강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포클레인이 있고, 산처럼 쌓인 모래무덤이 있다. 다만 낯선 풍경 하나가 우리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마을의 뱃사공이 나룻배를 띄우고 노를 저으며 강심으로 나아가고 있다. 옛적엔 나룻배가 드나드는 창아지 나루가 있었다는데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뿌연 흙탕물에 아직 물고기가 살고 있는 걸까? 살아남은 것들은 형극의 시간을 무슨 수로 견디고 있는 걸까?

    한편에서는 강을 파헤치고 있고, 한편에서는 사공이 노를 젓고 있다.

       
      ▲ 노를 젓고 있는 낙동강의 한 어부 (사진=이상엽 작가)

    생채기가 아물기 전에 들이대는 삽날

    이 강변 일대는 4대강과 무관하게 창녕군에서 준설을 허가한 곳으로 이미 몇 달 전부터 준설이 이뤄지고 있었다. 2주 전까지 공사중이었고, 이제 다시 4대강 사업으로 재차 준설 작업이 시작되고 있다. 생채기가 아물기도 전에 강에 삽날을 들이대는 것이다.

    10여 년 전부터 모래를 약탈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던 여주의 여강처럼 이곳 역시 강의 모래를 골재로 대하는 개발주의자들의 욕망이 뿌연 흙탕물로 흐르고 있다. 준설선 앞에서부터 강을 가로지르며 설치된 주황색 오탁방지막이 보인다. 감병만 씨가 오탁방지막의 허술한 기능을 꼬집는다.

    “오늘같이 바람 없는 날이나 유속 느린 날은 그나마 낫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고 유속이 빨라지면 오탁방지막 아래 그물 같은 하얀 천이 들립니다. 힘을 못 받는 거죠. 그러면 오탁물은 다 흘러나가요. 저게 소용이 없습니다. 오탁을 다 막는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강에 준설선이 투입되면 빠른 속도로 스크류를 돌려 강바닥의 흙과 모래, 자갈을 동시에 빨아들인다. 그때 발생한 오탁물은 1킬로미터에 걸쳐 흘러간다. 창녕군에서 모래를 퍼가기 위해 사용한 준설선과 4대강 공사에 사용하는 준설선은 규모에 있어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함안보에만도 다섯 대의 준설선이 투입된다고 하니 5킬로미터 가량의 강물이 죽은 물이 되는 것이다.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숲의 풍경이 바뀐다. 공사장에서 들리는 소음은 점점 크게 들려오고, 낭떠러지 아래 흙탕물도 짙어지고 있다. 낙동강 경치가 한눈에 보이는 너럭바위에서 걸음을 멈췄다. 감병만 씨가 식물 하나를 가리킨다.

    보상의 끝

    “이 길에 들어서면 가장 많이 보이는 게 부처선이에요. 바위손이라고도 하죠. 쟤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물이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면 금방 살아납니다. 굉장히 생명력이 강한 식물입니다. 맞은편에 보이는 저곳은 둔치 농업을 하던 곳입니다. 저곳에 친수공간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 시작된 것 같아요.”

    이 길은 부처손, 마삭 등 야생 식물들이 많다. 공사장 너머 시골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강가에서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의 마을이다.

    “농민들은 농지 잃고 농사 못 지으니까 일자리를 잃죠. 일부 보상받긴 하지만 멀리 봐야 하고 자신들의 삶의 지속성을 봐야 하는데 당장의 것만 보게 돼요. 농민들은 보상 받고 나가도 할 게 없어요. 그분들은 평생 농사꾼이니까. 그래서 다시 농지를 임대받는 거예요. 농지가 줄어들면 농지값은 오르죠.”

    일행은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무성한 나무와 나무 사이 낙동강 푸른 물이 스치듯 잠깐씩 모습을 드러냈고 벼랑길은 쉬임 없이 이어지고 있다. 절벽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수천수만 년의 세월과 바람에 깎인 바위 모습이 변화무쌍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절벽길이 끝나고 울창한 대숲길이 펼쳐진다. 인적 없는 곳에서 대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 낙동강의 절벽 (사진=이상엽 작가)
       
      ▲ 개비리길의 대나무 숲 (사진=이상엽 작가)

    주인이 떠나고 없는 폐가 한 채가 대나무 그늘 아래 웅크리고 있다. 우리는 작은 문을 지나 폐가에 들어갔다. 금이 간 담벼락 사이로 가느다란 빛 한 줄기가 사람 없는 집을 방문하고 있다. 부엌엔 녹슨 솥단지가 남아 있고, 마당엔 마른 댓잎이 수북하다.

    방문도 열어보고 작은 화장실도 들여다봤다. 사람이 떠난 집은 휑하고 쓸쓸하다. 한기마저 느껴진다. 한밤중에 찾아왔으면 칠흑의 어둠과 가까이서 들리는 강물소리, 대숲 서걱이는 소리에 오싹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가가 없는 외떨어진 곳에 살림을 꾸린 집주인의 삶을 헤아린다. 대나무로 바구니를 짜고 가까운 강가에 나가 물고기를 잡으며 생활했을 것이다. 인적 드문 곳에 살던 가족은 혹시 대숲 울타리 집을 떠나 도시의 빌딩 숲 사이 작은 방 두세 칸을 얻어 살고 있진 않을까?

    ‘사이’ 공간을 걷다

    산길을 다 빠져나오자 낙동강이 훤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강변에 키 큰 미루나무 두 그루가 오롯하게 서 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마을엔 미루나무 몇 그루가 나란히 개울가에 서 있었다. 마을 어디에서 바라봐도 한 눈에 보이던 그 나무는 잎이 무성했다.

    산들바람에 잎을 뒤채며 반짝이는 미루나무를 보면 마음이 씻기는 듯했다. 동네에서 제일 키가 컸던 그 나무를 한 자리에 서서 마냥 바라보는 날이 많았다. 가을 어느 날부터 우수수 떨어지는 이파리들은 눈부셨다. 수십 년이 지나 고향에 다시 찾아갔을 때 그 나무를 먼저 찾았다.

    고향을 떠나 있는 동안 신작로 길은 아스팔트 길이 되어 있었고 미루나무는 사라지고 없었다. 낙동강가의 미루나무를 보면서 오래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이 나무도 곧 베어지고 뿌리 뽑힐 것이다. 미루나무는 강변이 아닌 백척간두에 서 있다.

    멀리 남강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용산리 창날의 합수지역이 보인다. 남덕유산 자락에서 발원한 남강이 낙동강을 만나는 곳이다. 커다란 알림판에 ‘낙동강 살리기 19공구 사업현장’이라고 적혀 있다. 합류지점 왼편은 버드나무 군락지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오른편은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공사장이다. 원래 그곳도 울창한 군락지였다고 한다.

    공사장에서 몇 대의 포클레인이 분주히 작업을 하고 있고 주변 적치장엔 모래가 쌓여 있다. 공사장에서 강쪽으로 이어지는 곳에 배수구 몇 개가 보인다. 모래를 쌓으면서 나오는 침출수를 강으로 빼내는 것 같다고 한다. 공사장에 가득 쌓인 모래 무덤의 규모를 보고 일행이 모두 놀란다. 감병만 씨가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시청에 전화하니 "환경단체에 하라"

    “적치장에 저렇게 쌓아두면 모래 먼지가 마을까지 날아가요. 마을 근처에 적치장을 두면 안 되죠. 얼마 전 10여 가구가 사는 낙동강 주변 마을에서 모래 먼지 때문에 못 살겠다고 전화가 왔어요. 마을 사람들이 시청에 전화했는데 자기들도 어쩔 수 없다며 환경단체에 전화하라고 하더랍니다.”

    두 강의 합수지역 맞은편에 이르렀다. 이곳은 드넓은 통밀밭이다. 하지만 밀농사를 짓고 있는 땅은 없다. 너른 밭을 차지한 것은 노란 유채꽃이다. 이 통밀밭은 공사장의 모래를 쌓아두는 적치장으로 사용될 것이다.

    낙동강 주변의 둔치 농업은 우리나라 채소 농업의 20%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4대강 사업이 부른 둔치 농업의 소멸로 인한 채소값 인상은 고스란히 서민들의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다. 한 시간 남짓한 도보길을 마친 후 감병만 씨가 공사 현장을 향해 손짓한다.

       
      ▲ 밀밭 사이로 핀 유채꽃. 그 너머 산처럼 쌓인 모래더미 (사진=이상엽 작가)

    “우리가 걸어온 길은 자동차를 타고 속력을 내며 달리는 삶을 반성하는 길입니다. 잘 닦인 길을 달리다보면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이’ 공간이 소멸됩니다. 우리가 걸으면 세밀하게 사이 사이의 공간들과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무엇이 되는데요. 잃어버린다는 것은 내가 변화될 수 여지도 함께 잃는 것을 뜻해요.”

    나는 목사인 친구 한문덕이 들려준 얘기를 떠올렸다. 그는 생명과 관련 있는 단어엔 자음 ‘시옷’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삶, 생명, 숨, 신, 사랑, 산, 숲……. 나는 ‘사이’라는 단어를 이 목록에 덧붙였다. 그리고 그 단어 옆에 이렇게 적었다. 생명은 사이가 있어야 한다고. 개발은 ‘사이’를 걷어내는 일이라고.
    ‘사이’ 공간을 걷는 일이, 아름다운 길을 걷는 일이 슬픈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미안한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 낙동강변의 선 송기역 시인 (사진=이상엽 작가)

    용산리를 떠나며 나는 준설작업으로 뿌연 흙탕물 아래 간신히 숨을 내뱉고 있는 생명들을 생각하고, 또 낙동강물 위에 쓰여 있는 문수스님의 유서를 생각했다.

    그리고 낙동강을 모시고, 아스팔트 위를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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