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의 분노와 김일성의 프로파간다
        2010년 07월 27일 02:4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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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세계대전 이후 주요 강대국들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한국전쟁은 핵무기와 관련해서도 특별한 지위를 차지한다.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 성공으로 미국의 핵 독점체제는 무너졌고 이에 따라 한국전쟁을 둘러싼 미소간의 충돌은 핵전쟁의 위험을 어느 때보다 높였다. 미국은 불리한 전세를 역전시키고 소련 및 중국의 개입을 억제하기 위해 수시로 핵 공격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미국의 핵공격이 3차 세계대전의 문을 두드릴 것을 우려한 영국은 미국을 만류하기에 바빴다. 

    커다란 핵무기로는 북한과 같은 작은 나라를 공격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느낀 미국은 작고 실전에서 사용이 용이한, 즉 전술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소련도 뒤질세라 핵 전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전쟁 이전까지 핵폭탄을 ‘종이호랑이’에 비유했던 중국도 핵개발에 대한 인식을 바꾼 계기가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핵무기의 역사의 결정적 사건으로 작용했다. 

    북한 주민의 피난이 핵 위협 때문? 

    그렇다면, 당시 남북한의 지도자들이었던 이승만과 김일성의 핵폭탄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을까? 후술하겠지만, 이승만은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데에도 트루먼이 원자폭탄 투하를 망설이고 있는 데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반면 김일성은 미국의 핵공격 움직임을 선전전에 적극 활용했다. ‘1·4 후퇴’ 직후부터 북한 주민의 월남이 급증하면서 남한은 피난민으로 넘쳐났다. 그러자 “북한은 미군과 국군이 ‘원자탄을 사용한다’는 기만전선으로 인민들을 끌고 갔다고 비난하였다.” 북한은 전후에 “원자탄 위협에 따른 월남의 증가”를 주장했는데, “이미 전시 때부터 (이러한 선전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북한의 선전전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조선반도와 핵>이라는 제목으로 2010년 4월 21일 발표한 외무성 비망록에는 이러한 내용이 상세히 담겨 있다. 당시는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가 대북 선제공격을 유지하기로 한 핵 정책을 발표하면서 북한의 반발이 거세지던 때였다. 원문의 일부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원자탄의 끔찍한 참화를 직접 체험한 인민에게 있어서 미국이 조선전쟁시기 감행한 원자탄공갈은 말그대로 악몽이였다. 1950년 11월 30일 미국대통령 트루맨이 조선전선에서의 원자탄사용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데 이어 같은 날 미전략항공대에《극동에 즉시적인 원자탄투하를 위해 폭격기들을 날려보낼수 있도록 대기》할 데 대한 지시가 하달되었다. 그해 12월 미극동군 사령관 맥아더는 《조선북부에 동해로부터 서해에 이르는 방사능복도지대를 형성할 것이다. 그 지대안에서는 60년 혹은 120년 동안 생명체가 소생하지 못 할 것이다.》고 폭언하였다. 

    미국의 원자탄공갈로 하여 전쟁기간 조선반도에서는 북으로부터 남으로 흐르는 《원자탄피난민》행렬이 생겨났다. 가족이 함께 움직일수 없는 많은 집들에서 가문의 대를 이으려는 일념으로 남편이나 아들만이라도 남쪽으로 피난보냈다. 이렇게 되어 생겨난 수백만에 달하는 《흩어진 가족》이 오늘도 조선반도의 북과 남에 갈라져 살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로도, 특히 핵문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할 때마다, 북한은 미국의 핵 위협을 전가의 보도처럼 거론해오고 있다. 북한이 주장하는 “미국의 핵 위협”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대체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로도, 자신의 “핵 억제력 강화” 노선을 정당화시키는 기재로도, 북한에게 쏠리는 국제사회의 비난에 대한 무마책으로도 이용된다. 

    이승만의 분노, ‘왜 핵폭탄 안 쓰나’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에게 미국의 핵 위협이 정치선전전의 도구였다면, 이승만에게 핵폭탄은 ‘통일의 무기’로 간주됐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육군참모총장으로 기용된 정일권의 회고록에는 이승만의 핵무기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눈앞에 다가온 북진통일이 중국군의 개입으로 물거품이 되고 유엔군이 패퇴를 거듭하던 1950년 초겨울, 이승만은 트루먼의 발표에 크게 고무됐다. 트루먼이 11월 30일 기자회견을 통해 원폭 투하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나서자, “이 빅뉴스를 이승만 대통령은 비장한 각오로 환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원폭이 가공스럽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또한 그 죄악스러운 점도 알고 있다. 하나, 침략을 일삼는 사악한 무리에 대해 사용할 때에는 오히려 인류의 평화를 지킨다는 점에서 이기(利器)가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사용해선 안된다면, 우선 나의 머리 위에 떨구어 주기 바란다… 우리 한국민이 사랑해 마지않는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산하(山河)의 어느 한 구석이라도 공산당 한 놈이라도 남겨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승만의 기대와는 달리 트루먼이 원폭 투하 결심을 내리지 않자, 이승만은 “왜 원자폭탄을 쓰지 않는가!”라며 “워싱턴을 향해 질타하곤 했다.” 이승만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원폭 투하를 단언했던 맥아더는 정일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원폭을 그토록 바라고 있는 이 대통령께 말할 수 없이 미안하오. 만날 때마다 원폭도 불사한다고 했던 약속이 이처럼 허사가 될 줄은 몰랐다고, 노인에게 말씀 전해 주시오.” 

    모의 핵공격 돌입한 미국 

    한편 1951년 7월 8일에 정전협상이 시작되자, 미국의 핵 사용 계획은 정전협정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종결짓는 카드로 이용된다. 미 육군은 정전협정 실패시 한반도에서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원자폭탄 사용이 필요할 것이라는 요지의 메모를 작성해 회람시켰다. 이 메모에서는 “공산군이 우리의 기술적 우위를 상쇄할 인적 투입에 나섬으로써 한반도에서 교착상태가 지속되면 살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원자탄의 사용이 바람직하다. 일본 방어를 포함함 전면적인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원자폭탄의 적용은 필수적이다”고 말했다. 

       
      ▲ 1952년 2월, 미국의 공습으로 파괴된 평양 철도와 화물기차 (출처: 미국국립문서보관소)

    그리고 9월 들어 미국은 북한을 상대로 모의 핵공격 훈련에 돌입했다. 코드네임 ‘허드슨 항구 작전(Operation Hudson Harbor)’로 명명된 이 훈련은 극도의 비밀을 유지한 상태에서 북한 땅에 네 차례에 걸쳐 모조 핵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폭탄은 재래식 폭탄이었지만, 최대한 원자폭탄 투하와 흡사하게 훈련을 전개하기 위해 핵공격 절차에 따라 진행됐다.

    그러나 훈련 평가를 통해 당시에는 북한에 핵폭탄을 투하할 만큼의 군사적 가치가 있는 목표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시 북한에는 대규모의 군사시설이나 산업시설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는 것들은 이미 미국의 재래식 무기를 통한 대규모 공습으로 파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전협상이 시작되자 트루먼은 조속한 한국전쟁의 종식을 원했지만, 스탈린의 생각은 달랐다. 미국을 한반도에 잡아두면 유럽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미국의 극동사령부와 펜타곤은 협상 실패시의 군사적 대응책 마련에 착수했다. 10월 16일 클라크(Mark Clark) 육군 장군은 작전계획 8-52(OPLAN 8-52)를 합참에 보고했는데, 이는 “미국이 승리를 결심할 경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군사계획을 담고 있었다. 

    대규모의 상륙작전과 만주를 비롯한 중국 본토에 대한 공습, 중국 해상 봉쇄 등이 포함된 이 계획에는 일단 핵공격 작전은 제외됐다. 그러나 클라크는 중국을 제압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핵공격에 있다며, 필요할 경우 핵공격 옵션도 검토되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중국의 영토와 인구를 고려할 때, 완전한 군사적 승리를 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며, 중국을 “미국의 조건에 맞는” 정전협정에 동의하게 만드는 것이 군사작전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트루먼의 기대와는 달리 정전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포로송환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지만, 김일성과 마오쩌둥 뒤에서 정전 협상을 지휘했던 스탈린이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탓이 컸다. 이 사이에 미국은 전술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기존 핵무기가 소련을 상정으로 한 것이어서 북한과 같은 작은 나라에는 별 소용이 없게 되자, 작으면서도 실전에서 사용 가능한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미국은 전술 핵무기를 손에 넣었고, 핵무기를 다른 무기와 구분하는 것을 거부한, 그래서 핵무기 사용에 훨씬 적극적이었던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등장한 것이다.

    주요 참고 자료 

    정일권, 『정일권 회고록』(고려서적, 1996년),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나남, 2002),
    Paul G. Peirpaoli, Truman and Korea(Missouri Publishers, 1999),
    Roger Dingman, "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 International Security (Winter, 1988-1989),
    Trent A. Pickering, “A Nuclear Dilemma-Korean War Deja Vu," U.S. Army War College March 2006
    Rosemary J. Foot, “Nuclear Coercion and the Ending of the Korean Conflict," International Security(Winter, 1988-1989), p. 100.
    인용한 미국의 비밀해제문서 사이트: http://www.gwu.edu/~nsarchiv/; http://www.trumanlibrary.org/oralhist

     

    *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 이 연재는 정욱식의 블로그 ‘뚜벅뚜벅’에서도 함께 진행됩니다.(http://blog.ohmynews.com/wooksik) 최근에 쓴 책으로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가 있습니다. 다음에 이어질 글은 ‘아이젠하워의 등장과 고조되는 핵전쟁 위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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