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주의', 금칙어가 되다
        2010년 07월 24일 11: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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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 초에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한 번 했습니다. 일본에서 학계의 주목을 두루 받은 학술서를 내고, 국내에서도 책 몇 권이 번역돼 나온 적이 있는, 꽤나 유명세를 타는 중국 인문학자 한 분을 모셔 강연을 들은 바 있었습니다.

    제가 상당한 기대를 갖고 그 강연장에 갔는데, 역시 기대대로 아주 예리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중국의 학생이란 시험의 노예, 무엇에 부딪치든 정답만 찾는, 창조성이 없는 시험 기계다", "중국 학자는 기술자가 되어 논문 생산 노동에 동원돼 그 논문들의 품질이 내용도 아닌 게재지의 급으로 일률적으로 평가되는 등 대학은 영혼이 없는 논문 제조 업체로 전락된다", "중국 교수들의 관심사는 신분상승에 집중되며, 황금 만능주의가 팽배해 심지어 논문 심사 시에도 돈으로 심사자들을 매수해 게재 판정을 얻어내곤 한다"…. 수많은 고발성 발언이 나오기에 제가 이와 같은 예리함에 용기를 얻어 강의가 끝난 뒤에 손을 들어 질문했습니다:

    자본가들의 기둥서방된 공산당?

    "자본주의가 꼭 공간적으로만 확산되는 게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의 삶에도 계속, 보다 깊이 파고들어 그 삶을 식민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이미 관련 학계의 주지의 사실인데, 혹시 ‘학자의 기술자화’를 ‘학자의 무산계급화’, 즉 비교적으로 독립적 신분의 계층이었던 학자를 자본주의적 생산의 논리에 복속시키는 일로 봐야 하지 않는지, 그리고 대학의 ‘공장화’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논리에 따른 ‘학술 자본’의 형성 과정으로 볼 여지가 없는지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점에 대한 해답도 단순히 인문학적 논리에서 찾는 것보다는 반자본주의적 사회 개입의 논리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시지 않으십니까?"

    그 이야기가 통역되자 연사의 얼굴이 왠지 굳어져 종전의 외교적(?) 미소도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답변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자본화 과정과 상기한 학자의 창조성, 독립성 상실 과정의 연관 관계가 분명하지만, 자본주의적 전구화(세계화)가 본 강연의 취지가 아닌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고 자르듯이 답하시고 만 것이었습니다.

    연사의 강연노트 텍스트를 나중에 쭉 읽어봤지만, 실제로 거기에서 ‘자본’과 ‘자본주의’는 언급된 바 없었습니다. 약 3시간 동안 중국 학계 자본화에 따른 각종 부작용과 그 대응 방법을 열심히 이야기하신 분은, ‘자본주의’라는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걸 보니 정말 고도의 묘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참, 1979년 이전의 중국에서는 ‘계급 투쟁’ 등의 단어들이 아주 남용, 악용됐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제는 그 반대로 ‘자본’에 대한 비판은 그리 쉽지 않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한 유일 집권당이 자본화의 주체이자 자본가들의 ‘기둥서방’이 된다면 정말 ‘자본’을 대놓고 논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이겠죠?

    자본주의,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

    중국의 문제야 남의 일이라고 치더라도 대한민국 지식인들에게도 최근에 보면 ‘자본/자본주의’라는 말이 요즘 점차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 도저히 입에 올리기가 어려운 ‘금칙어’가 돼가는 것 같습니다.

    이미 ‘마르크스주의자’로 찍혀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극소수의 ‘학계 공룡’들이나, 극소수 활동가들이야 <진보평론> 등에서 아직도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들을 비교적으로 자유롭게 논하지만, 이 학술적 ‘게토’ 밖으로 나오면 자본주의에 대한 본격적 문제 제기는 정말 ‘철의 노동자’ 같은 과거의 민중 가요만큼이나 아주 드물게 들립니다.

    MB 욕하거나 反한나라당 언설을 사용하면 문제도 없고 아주 흔한 일이지만 자연파괴적 ‘4대강 죽이기’가 건설경기 부양의 단기적 효과를 잘 내는 것임으로 단기적 이윤 제고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전형적 발상이라는 말을 들어보기가 훨씬 더 힘듭니다.

    마찬가지로, 지난 정권과 이번 정권은 서로 바통을 이어받으면서 정교수 이하 교수의 경쟁적 재임용 심사를 제도화하는 등 고등교육 종사자들의 ‘철밥통’을 거의 없애고 ‘HK연구교수’ 등등 여러 미명 하에서 맹목적 논문 생산에 옭매여 그 어떤 장기적, 주체적 연구나 대중화 프로젝트를 해내기가 매우 힘든 광범위한 ‘academic proletariat'(학계 무산계급. http://media.www.thetriangle.org/media/storage/paper689/news/2005/04/15/EdOp/The-New.Academic.Proletariat.Part.I.The.Making.Of.An.Underclass-926359.shtml)을 형성시켰다는 것을 "학교의 자본화와 대다수 학자의 노동자화"로 본 사람들을 제가 많이 못봤어요.

    주류 신문에 ‘칼럼질’하는 게 대개 아직도 귀족성이 남아 있어 ‘사회과학적 분석’보다 뜻이 다소 불분명한 에세이적 ‘아름다운 말’을 더 선호하는 정규직 교수들의 신분적 특권으로 돼 있어서 이렇게 무관심한 것인지도 모르죠.

    주류 신문에 칼럼질 하는 특권 교수들

    삼년 후에 실업자가 되지 않게 위해 ‘무방’하거나 위에서 주어진 주제에 대해, 주어진 형식의, 주어진 편 수의 논문을 생산해, 주어진 명단에 등재돼 있는 학술지에 무조건 기고해야 하는, 생산 계획 목표치에 미달하면 관리자에게 ‘찍혀’ 고용예비군으로 밀려나는 학계 무산자에게 발언권이 충분히 주어졌다면 좀 더 험한 이야가 조금 더 많이 나올 법도 했을 터인데…

    그런데 ‘선건(先建) 사상’의 위대한 가르침에 입각하여 선진화돼가는 세계 일류 국가인 스파클링 코리아는, 당연히 험한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역시 일류의 고품격이란…

    노예가 해방을 꿈이라도 꾸기 위해서 일단 먼저 자신의 노예성부터 깨닫는 게 순서일 것입니다. 20년 동안 월급 전체를 저축해도 집 한 채 살 수 없는 월급쟁이가 비정상적 부동산 가격이 단순히 ‘투기 세력’의 문제가 아닌, 토건 자본과 소수의 ‘부동산 부자’, 그리고 그들의 최고 조절기관으로서의 국가의 문제라는 점부터 깨닫는다면, 적어도 다음 선거 때에 엉뚱한 데에 표를 던질 일이라도 생길 확률이 낮아지지 않습니까?

    학자를 무조건적 논문 생산 기술공으로 만든 게 행정 오류도, 단순히 오도된 정책도 아니고 국가와 학교 자본의 주도면밀한, 일관성이 있는 정책이고, 앞으로는 최소한의 독립성이 보장된 인문학자 등이 이 나라에서 (자본과 국가의) 원칙상 공룡처럼 멸종돼야 된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일단 누구를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 보다 분명한 인식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곳 노예들이 대체로 자기 노예성을 부정하는 경향은 심하죠. 주인님이 마름이라도 시켜줄 것을 많이들 기대들 하시고요. 시켜주면 본인에게 축하를 드릴 일이고 가문의 영광이지만, 노예 농장의 마름도 결국 노예일 뿐이라는 사실을 부디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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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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