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문학에도 정파가 있었다"
        2010년 07월 21일 05:1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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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어떤 무모함도 용서가 되던 그 시절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그냥 자신을 시대와 역사의 희생양으로 내던져도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던, 그런 시절 말이다. 노래 말 그대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과 권력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죽었다 깨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무모함 속으로 자청해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에겐 모든 것을! 나에겐 아무 것도!” 하는 싸파티스타의 구호처럼 말이다.

       
      ▲ 필자가 쓴 <내사랑 마창노련> 표지

    1991년 2월, 그해 겨울 마지막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동숭동 ‘학림’에서였다. 노동문학의 길을 걷는 문우들에게 제안했다. 전국노동자신문(이후 약칭 ‘전노신’)에 꽁트를 연재하자고.

    그런데 모두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연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에서부터, "현장 취재해서 그대로 써내기도 바쁜데, 언제 그걸 다시 꽁트로 재구성해서 마감시간에 쫒겨가며 완성하겠냐"까지. 한마디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큰소리 칠 수 있었던 건, 과거의 연재 경험 때문이었다. 교사 재직 중이던 1976년부터 1년 동안, 해직기자들이 편집진으로 있던 <주간시민>에, 매주 한 번씩 교육현장에 대한 칼럼을 연재했다. 또한 1978~1980년 약 3년 동안은 방송작가로 하루도 ‘빵꾸’ 안 내고 원고를 써댔다.

    연재라면 몸으로 때울 자신이 있었다. 물론 꽁트는 처음이라 나도 반신반의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이럴 땐 누구든 먼저 총대를 메는 게 중요했다. 누군가 먼저 시작해서 좋다는 소리를 들으면 따라오지 않겠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좋아. 아무도 안 쓰겠다면, 나 혼자 쓰지 뭐.”

    노동문학, 다시 출발점에 서다

    소설 <그해 여름>으로 전태일 문학상을 받은 1990년 11월부터 책이 출판된 1991년 5월까지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낯 뜨거운 시간이었다.

    처음 출판하기로 했던 출판사는 아무 이유 없이 차일피일 미루더니 덜컥 부도가 나 자빠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불황을 맞아 노동소설 출판을 꺼린다고 했다. 출판이 불투명하다는 말을 들으니 실연당한 듯 자존심도 상하고 쪽도 팔렸다.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을까. 출판이 무슨 장난인가. 한두 달 앞 일도 모르면서 그럼 약속은 왜 했나.

    나중에 알고 보니 단순한 돈 문제만도 아니었다. 그때까지 나는 ‘노동문학판’에 대해 무지했다. 정파도 인맥도 아무 것도 몰랐다. 작가, 독자, 출판사, 이 세 가지가 다 제 각각의 정파와 인맥으로 갈린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정파도 인맥도 없던 내 소설 원고는 축구공처럼 이 발 저 발에 채여서 굴러다닐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노협은 결성하자마자 극심한 탄압을 받고 구속자 해고자가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감옥에서 대표자회의를 열 정도로 지도부는 공백상태였고, 전노협 탈퇴 압력으로 노조업무가 마비될 만큼 현장 분위기도 아슬아슬했다.

    이런 위기상황에 노동문학판은 멍석을 걷고 막을 내리는 둥 파장분위기였다.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사회주의 이념은 폐기되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돌아다녔다. 전망이 없다, 길이 안 보인다는 목소리에는 ‘노동문학의 폐기 처분’이라는 암묵적 동의가 숨겨져 있었다. 곧 이어 누구는 복학했고, 누구는 교수가 되겠다고 대학원에 진학했고, 누구는 유학을 떠났다는 소문이 들렸다.

    사실 우리 ‘노동문학’은 역사도 짧거니와 역량 또한 일천하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빈약하기 짝이 없다. 1920년대 출범한 카프(KAPF)는 10년 남짓 활동하다가, 일제의 극심한 탄압과 분단비극이라는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중단되었다.

    반면에 남한의 노동문학은 1971년 전태일 열사의 죽음과 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거쳐 자생적으로 움트기 시작해 1987년 이후 본격화되었다고나 할까. 시간적으로도 10년이 넘을까 말까고, 성과라 해봤자 장편소설 한두 편이 나오기 시작하는,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다.

    이런 시점에 타의도 아니고 자의로 용도폐기를 선언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노동자와 노동현장을 두 눈 뜨고 보면서도, 마치 없는 존재인 양 부정하거나 시신 취급할 수가 있을까. 원래 시대를 앞질러 사는 사람들, 시대의 첨단을 걷는 사람들은 다 그런 건가? 나 혼자만의 오해인지 모르겠지만 그땐 야속하고 서운했다.

    물론 훗날 어림짐작으로 안 거지만, 그들과 나는 입으로는 같은 ‘노동문학’이라고 말하면서도, 머리속으로는 서로 다른 의미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같은 ‘노동문학’이지만 그 단어가 가리키는 방향은 전혀 달랐던 모양이다. 언젠가 그 정확한 의미를 들을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당시 나는 신인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당연히 노동문학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도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 말이 맞고 틀리고,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인의 말이기 때문에 귀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 정파의 리더급이나, 하다못해 저명한 교수나 평론가, 인기 작가였다면 달랐을 것이다.

    그때 생각했다. 작품을 써서 보여줄 수밖에 없다. 작품을 통해서 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완성된 장편소설의 출판 여부는 오리무중 상태니 빨리 새로운 작품을 써야만 했다. 그때 꽁트가 떠올랐다. 그런데 참 묘한 일이었다. 꽁트를 연재할 새로운 구상에 한참 빠져있는데 뜻밖에도 <청년사>와의 출판계약 소식이 전해졌다. 덕분에 묵은 숙제를 해결하고 홀가분하게 새로운 의욕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꽁트냐고? (계속)

                                                     * * *

    필자소개

    김하경 / 소설가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78년 교육시평집 《여교사일기》를 펴냈으며, 1988년 계간 《실천문학》에 단편 〈전령〉으로 등단했다. 1990년 〈합포만의 8월〉(《그해 여름》으로 출간)로 제3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99년 한국 민주노동사 연구의 소중한 모범이자 치열한 보고문학인 《내 사랑 마창노련》(전2권)을 출간했다. 그밖에도 장편 《눈 뜨는 사람》, 콩트집 《숭어의 꿈》, 소설집 《속된 인생》, 편역본 《아라비안나이트》(전5권) 등을 펴냈다. 2008년 10월부터 인터넷 다음카페 ‘리얼리스트100’에 〈아침입니다〉를 연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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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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