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폭탄은 아시아로, 맥아더는 집으로
        2010년 07월 21일 09:1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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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년 1월, 중국군을 상대로 맹폭을 가하고 있는 미국의 B-29 폭격기 (출처=미국국립문서보관소)

    1950년 11월, 중국의 참전으로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했던 트루먼 행정부는 공개적으로 원자폭탄 사용 가능성을 시사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 할만 군사적인 준비에는 신중했다. 북한이나 중국을 상대로 원폭을 투하하기 위해서는 전략 폭격기를 아시아에 배치해야 하는데, 이를 계속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중론에는 핵심적인 동맹국인 영국의 만류, 맥아더의 모험주의에 대한 경계, 핵 공격시 확전의 위험성 등이 종합적으로 반영되어 있었다. 

    한편, 한반도의 전세는 유엔군에게 더욱 절망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중국군과 북한군에게 패퇴를 거듭하면서 12월 4일에는 평양에서, 12월 24일에는 흥남에서 철수했고, 연말에는 38선 이남까지 밀려났다. 연전연승에 고무된 마오쩌둥은 “호기를 놓치지 말라”며, 38선 남진을 명령했고 공산군은 1월 4일에 서울을 다시 점령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결정은 트루먼의 북진 명령에 비견될 만큼의 역사적 실책이었다. 

    전세가 악화되자 영국을 비롯한 여러 서방국가들은 즉각적인 휴전을 제안했고 미국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러나 중국의 유엔 가입 승인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휴전 협상이 있어서야 할 자리에는 유엔군과 북한-중국군 사이의 길고도 피비린내 나는 교전이 차지하고 말았다. 서울을 빼앗긴 유엔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에 나섰고 3월 18일 서울을 다시 탈환했다. 

    맥아더 해임 결심한 트루먼, 핵 카드로 불만 달래 

    서울 탈환 직후 트루먼과 맥아더 사이의 정면충돌이 벌어졌다. 트루먼은 38선을 회복한 이상 유엔군은 임무를 다했다며 중국과의 휴전협상에 나설 뜻을 밝혔다. 그러나 맥아더는 “위협에 처한 한국을 방위하여 통일시키겠다던 대통령의 단호한 결의는 어디로 가고 패배주의로 전락해버렸는가”라며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3월 24일에는 “유엔이 유엔군에게 부과하고 있는 제한사항을 철폐하면 중국을 군사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확전을 우려한 트루먼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영국도 맥아더를 “미친 태수(the mad satrap)”라고 부르면서 중국과의 확전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공화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맥아더는 확전론을 고수했고, 맥아더의 인기 상승과 트루먼의 지지율 하락이 교차되면서 트루먼 행정부는 궁지에 몰렸다. 이제 트루먼과 맥아더의 관계는 더 이상 최고 군통수권자와 현지 사령관의 관계가 아니라, 숙명의 정치적 라이벌로 바뀌고 말았다. 

    맥아더를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 간주한 공화당의 지도부는 “승리를 대체할 것은 없다”며 맥아더의 강경론을 적극 지지했다. 바로 이 시기에 트루먼은 맥아더 해임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맥아더의 인기와 공화당 주도의 강경론을 고려할 때, 그를 해임할 명분과 미국의 힘을 과시한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핵 카드는 이 때 다시 나오게 된다. 맥아더를 미국으로 불러드리면서 이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핵폭탄을 아시아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이즈음 전쟁의 양상도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유엔군의 반격에 막힌 중국군과 북한군은 ‘춘계공세’에 나섰다. 또한 당시 미국은 소련이 3개 사단과 공군기를 만주로 이동시키고 잠수함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하고 있는 것을 포착했는데, 이에 따라 미국 내에서는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특히 소련군이 일본을 공격하고 나올 가능성을 경계했다. 

    결국 트루먼은 또 다시 B-29 전폭기를 태평양에 파견해 미국의 힘을 과시하기로 했다. 4월 6일에 결정된 이 명령은 즉각적인 투하가 가능한 핵폭탄을 탑재한 전폭기를 파견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미국 본토 밖으로 핵폭탄을 탑재한 전폭기를 배치한 것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한국전쟁이 핵전쟁과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위험성도 높아졌다. 

    트루먼의 자신의 결정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백악관 집무실에 핵심 참모들을 불러들여 소련 공군기가 만주에 배치되고, 잠수함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하고 있으며, 상당수의 소련군이 사할린 남부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달했다. 소련군이 한반도에 있는 유엔군을 공격하거나 동해를 봉쇄해 유엔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할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이를 억제하기 위해 전략공군사령부의 전폭기를 태평양에 파견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핵폭탄 투하를 실제로 강행하기 이전에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원자력 특별 위원회와 상의할 것이라고 밝혀, 핵전쟁에 신중론을 펼쳤던 일부 관리들의 불안감을 달래려고 했다. 

    트루먼이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완제품 핵폭탄’을 해외에 배치한 데에는 맥아더 해임 결정에 대한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한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 당시 미국 합참은 맥아더 해임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트루먼의 핵폭탄 배치 결정에 고무돼 맥아더 해임을 지지하기로 했다. 또한 트루먼 행정부는 4월 10일 핵폭탄 배치 결정을 공화당 매파 의원들을 비롯한 18명의 의원들에게 사전 브리핑해줌으로써, 미국 내부를 상대로 한 ‘핵 외교’에 나섰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11일 트루먼은 맥아더가 미국을 또 다시 확전으로 몰아넣는 “비극적인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난하면서 그의 해임 방침을 발표했다. 맥아더의 후임으로는 리지웨이 8군사령관을 임명했다. 동시에 소련과 중국에게 유엔군을 상대로 공습을 가해 한국전쟁을 확대시키면 “그러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해 미국의 단호한 의지를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핵폭탄을 탑재한 B-29를 괌에 파견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한국전쟁 연구의 권위자인 커밍스는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한 것은 단순히 그의 거듭되는 불복종 때문만이 아니라 워싱턴이 핵무기를 사용하기로 결정을 내릴 경우 현장에 믿을 만한 사령관이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트루먼은 자신의 핵무기 정책을 위해 맥아더를 방출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트루먼의 세 가지 조치 

    그러나 트루먼은 이러한 발표 이후 국내외에서 더욱 곤경에 처했다. 맥아더는 미국 전역을 돌면서 트루먼의 전쟁 수행을 맹비난하고 나섰고, 중국은 미국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엔군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선 것이다. 그러자 트루먼 행정부는 핵 사용 계획을 더욱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크게 세 가지 조치를 취했는데, 이는 실제 사용을 염두에 둔 군사적 조치, 중국에 대한 ‘강압 외교’, 미국 의회를 상대로 한 ‘설득 외교’로 이뤄졌다. 

    첫째는 핵폭탄 투하 준비태세 강화를 위한 군사적 조치였다. 핵전쟁을 담당하는 전략공군사령부의 지휘통제팀이 도쿄로 파견되었고, 맥아더의 후임자인 리지웨이 사령관에게 핵 사용 권한을 위임했으며, 미군 정찰기가 만주와 산둥반도를 비행하면서 공격 목표물을 물색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서 트루먼이 맥아더가 집요하게 요구했던 핵 사용 권한을 그의 해임 뒤에 리지웨이에게 부여한 것이 눈에 띤다. 대통령을 무시한 맥아더와는 달리 리지웨이는 자신의 명령에 충실히 따를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둘째는 중국을 상대로 핵위협을 이용한 ‘강압 외교’에 나섰다. 트루먼의 비밀 특사는 홍콩을 방문해 중국 지도부에게 맥아더의 해임이 미국의 나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미국의 인내심과 자제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전달했다. 특히 미국은 중국을 수십년 전으로 되돌릴 힘이 있다며 오판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그러나 그 힘이 핵폭탄에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셋째는 국내 정치를 상대로 한 ‘핵 외교’였다. 트루먼 행정부 고위 관료들은 의회 청문회에서 수차례에 걸쳐 적대국이 전선을 확대하면 핵무기를 이용한 가공할 보복에 나설 의지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맥아더 해임에 대한 강경파를 달래고, 트루먼 행정부가 결코 전쟁에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리지웨이, “핵 공격은 부도덕의 극치” 

    한편, 맥아더의 후임자로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된 리지웨이는 맥아더와 달리 핵공격 권한을 트루먼으로부터 위임받았지만, 원자폭탄 사용에는 대단히 신중했다. 그는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보복의 힘이 핵공격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핵 공격이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67년에 펴낸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론 미국 내에는 교착상태가 지속되면 적의 본토를 잿더미로 만들어 적을 석기 시대로 돌려놓아야 한다며 즉각적인 핵무기 사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이러한 주장을 부도덕의 극치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핵공격은 보복 차원에서 고려할 수 있다. 국가의 생존 수단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이유가 부족한 상태에서 그러한 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중략) 만약 우리가 인간의 존엄 앞에 어떤 비용을 치러서라도 승리를 추구한다면, 신은 우리의 대의명분에 신의 축복을 요청할 권리에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중국을 상대로 한 ‘핵 외교’가 성과를 거뒀는지도 미지수이다. 우선 미국의 비밀 특사를 통해 협박을 받은 중국 지도부가 미국이 핵폭탄을 탑재한 B-29 전폭기를 동아시아에 배치한 사실을 알았는지부터가 불확실하다. 또한 중국은 5월 중순 들어 방어적 태세로 전환했는데, 이는 미국의 핵 위협 때문이라기보다는 두 차례에 걸친 공격 작전이 실패로 끝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미국의 핵무기 배치가 소련을 휴전협상으로 유도했던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소련의 유엔 대표인 야코프 말리크는 1951년 6월 23일에 휴전 협상을 전격적으로 제안했는데, 이러한 제안은 괌에 배치됐던 B-29 전폭기가 미국 본토로 돌아간 직후였다. 실제로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의 발표를 듣고 핵무기 배치가 적대국을 협상 테이블로 유도했다는 자신감보다는 갑작스러운 휴전 협상 제의에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소련의 휴전협상 제의는 미국의 핵 시위의 결과라기보다는 6월 들어 유엔과 미국이 휴전 의사를 피력하고, 마오쩌둥과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휴전을 요청한 데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요 참고 자료 

    윌리엄 스툭 지음, 김남균 외 옮김, 『한국전쟁의 국제사』 (푸른역사, 2001년),
    브루스 커밍스 지음·김동노 등 옮김, 『한국현대사』(창비, 2003),
    강준식, “6.25는 국제전이었다,” 『월간중앙』2010년 7월호.
    Paul G. Peirpaoli, Truman and Korea(Missouri Publishers, 1999),
    Roger Dingman, "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 International Security (Winter, 1988-1989),
    Trent A. Pickering, “A Nuclear Dilemma-Korean War Deja Vu," U.S. Army War College March 2006
    Rosemary J. Foot, “Nuclear Coercion and the Ending of the Korean Conflict," International Security(Winter, 1988-1989), p. 100.
    인용한 미국의 비밀해제문서 사이트: http://www.gwu.edu/~nsarchiv/; http://www.trumanlibrary.org/oralhist
     

    *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 이 연재는 정욱식의 블로그 ‘뚜벅뚜벅’에서도 함께 진행됩니다.(http://blog.ohmynews.com/wooksik) 최근에 쓴 책으로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가 있습니다. 다음에 이어질 글은 ‘이승만의 탄식과 김일성의 프로파간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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