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노에 의한 정치 & 망각을 위한 장치
        2010년 07월 17일 09: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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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개인들이 하나의 집단이 되자면 아주 간단한 방법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를 같이 희생시키거나(희생양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파생됩니다), 누군가를 상대로 다함께 ‘도덕적으로 올바른’ 분노, 즉 ‘의분’ 내지 ‘공분’을 내면 되는 것입니다.

    분노로 조직되는 집단

    몇 사람끼리, 즉 ‘대면 공동체'(face-to-face community)라면 술이라도 같이 마셔서 한 번 같이 크게 떠들고 주정을 같이 부리면 되지만, ‘상상의 공동체’, 즉 서로의 생물적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다수의 공동체는 어떤 매체를 매개로 하여 같이 ‘악한’을 상대로 해서 화를 버럭 내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집단’이 탄생되죠. 그리고 기존의 집단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라도 적당한 수준의 ‘의분’은 필수적입니다.

    한 사례를 들자면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을 한 번 관찰해보시죠. 늘 대화의 주제는 ‘이명박 독재’며, 이명박이야말로 악마에 가까운 존재로 묘사됩니다. 저야 현 정권의 ‘선건(先建) 정치’에 대해 염증밖에는 느끼는 게 아무것도 없지만 냉정하게 한 번 따져봅시다.

    몇 가지 상징성이 강한 부문(대북 정책, 4대강 죽이기 사업 등등)을 제외하면, 과연 자유주의 정권에 비해 지금 달라진 게 무엇입니까? 경찰 등 보안기관들이 아주 대담해진 부분 등은 있긴 하지만, 대체로는 신자유주의 시대 대한민국의 일상은 그냥 그대로 이어집니다.

    ‘나라를 살리는 국내의 가장 위대한 기업’의 노동자들이 여전히 백혈병으로 죽아가면서도 노조를 만들 헌법적 권리조차 행사 못하고, 산재사망률은 여전히 멕시코의 두 배, 미국의 다섯 배인 10만명 당 21명 정도고, 아버지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하는 딸들은 여전히 몸을 사창가에 팔고…

    정권이 ‘참여’ 간판을 내걸든 ‘실용’ 간판을 내걸든 민중들이 죽고 터지고, 팔리고 밟히는 대한민국의 일반적 일상은 그냥 계속 이어집니다. 책임을 따져본다면 이에 대해 지배계급의 이익만을 대표해온 모든 주류 정치들은 다 책임이 있죠.

    의분과 공분

    그럼에도 ‘노빠’나 ‘유빠’들은 유독 "맹박이 때문"이라는 걸 강조하는 모양을 보니 확실히 한 집단을 정서적으로 유지시키려면 공동의 적을 상대로 같이 화를 내야 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뭐, 극우주의자들의 김대중관(觀)이나 노무현관과 대동소이하니 그쪽이나 저쪽이나 크게 다를 일도 없다고 봐야죠. 니체가 다시 살아났다면 ‘노예 심리’라고 비웃었을 것이지만, 니체적 의미에서 ‘노예’가 아닌 사람을 찾기도 어려운 요즘 세상에서 그런 말을 해봐야 뭔 소용입니까?

    그런데 호남 지벌과 영남 지벌, ‘친이, 친박, 친유’ 등 세밀한 구분을 넘어서는 ‘공분’도 있습니다. 일본 등 적당한 외부적 대상을 상대로 하는 공분도 그 종류에 속하지만, 특히 ‘흉악범죄자’, 예컨대 아동성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든가 10대 흉악범(무서운 10대) 등을 대상으로 하는 분노는 그렇습니다.

    (언론들이 또 적당히 부추기는)그 분노는 하도 대단해서 아동성범죄자들을 "화학적으로 거세하겠다"는 법이 나와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잘 안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에게 몹쓸짓을 한 어른이나, 급우를 고문해서 살해한 어린이 범죄자를, 제가 두둔할 생각은 없습니다.

    당연히 오랜 기간 동안 사회로부터 격리돼 교화돼야 할 사람이고, 흉악 범죄 재발 방지를 위해 사회가 조치를 취할 의무는 있죠.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국가가 과학적인 방법으로 개인의 신체를 조절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이게 아주 무서운, 전체주의적 세계는 아닐까요?

    과거 미국이나 북구 등지에서 우생학적으로 ‘열등하다’고 판정된 유전병 소유자 등을 의무적으로 불임수술하고, 일제말기에 일본에서도 ‘단종법’을 만들어 개인 신체에 대한 과학적인 국가적 조절을 법제화해버렸는데, 이제 우리에게는 이게 ‘끔찍한 과거 기억’입니다.

    화학적 거세와 전체주의

    과연 그 기억을 다시 되살려 국가가 개인의 행복추구권, 신체적 온전성 등을 모조리 빼앗아도 되는 쪽으로 나가야 하는가요? 범죄자가 아이의 인권을 짓밟았다면 사회가 그 범죄자의 인권을 짓밟아야 하나요? 그러면, 사회도 범죄자와 같은 수준이 돼야 한다는 것인가요?

    성범죄 유발에 아주 복합적인 요인(유전적 요인부터 유아기 부모로부터의 학대까지)이 작용되고, ‘무서운 10대’들의 상당 부분은 가난하고 폭력적 가정 출신으로 가정과 학교에서 폭력과 풋대접, 차별을 받아온 이 학력피라미드 사회의 희생자들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짓에는 사회도 일말의 책임은 있을 터인데, 이게 다 ‘공분’ 속에서 묻혀버립니다. 그리고 ‘무서운 10대’ 이야기 속에서 노동자들을 죽이는 작업환경을 만들어도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 무서운 재벌들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집니다. 그게 처음부터 ‘공분, 의분’ 정치의 목적은 아니었을까요? 이 사회를 지배하는 이들은, 우리들의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기에 우리를 지금처럼 효율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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