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기완, 90년대 나의 대통령”
        2010년 07월 16일 02: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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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화요일(13일), 금민 후보 선거사무실 개소식에 다녀왔다. 선대위원장을 맡은 김세균 서울대 교수 등 약 100명이 넘는 참가자의 열기로 사무실은 후끈 달아올랐다.

    맨 앞줄에 앉은 눈에 띄는 하얀 한복, 흰 곱슬머리. 백기완 선생이 눈에 들어왔다. 백기완 선생이 그 자리에 있어서 금민 후보 개소식은 1992년 나에게는 뜨겁기만 했던 그 겨울을 연상케 했다.

    백기완 선생이 그 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그리고 1992년에 함께 뜻을 모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기에 금민 후보 사무실 개소식은 백기완 선생이 민중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당시의 모습과 너무나 유사했다.

    3당 합당으로 거대여당의 지위를 확보한 김영삼 민자당 후보와 김대중 평민당 후보가 벌이는 권력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당당하게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외치며 끝까지 완주해주셨던 백기완 선생의 모습. 어린 시절 피 끓던 나를 감동케 했던 백기완 선생이 그 때의 젊은 동지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과거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함께 외쳤던 동지들이 금민 후보를 진보단일후보로 추대하기 위해 다시 한 자리에 모였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되고 있었고, 주체들의 역할도 바뀐 것이 없었다. 18년 전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선언함으로써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고 찬물을 끼얹은 사람들도 여전히 민주노동당 당권파가 돼 자기 역할을 재연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를 받는 진보정치의 큰 집이면서도 스스로를 대안정당으로 우뚝 세우지 못하고 신자유주의 세력과 야합하는 모습은 분노를 넘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당시 청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내가 세월의 야속함 속에 40대 중반의 노동자가 됐지만, 여전히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해서는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자본과 보수 세력들과는 비타협적인 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올곧게 견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18년 전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꿈을 대표했던 대통령 후보 백기완 선생이, 2010년 은평을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과거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파를 다시 결집시키고 있는 금민 후보를 찾은 것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깃발이 대선에서 나부끼던 시절, 금민 후보도 나처럼 피끓는 청년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진보가 위기인 시대에 정책과 비전에 대한 합의 없는 묻지 마 반MB연대를 비판하고 대안 중심의 진보대연합을 주장하며 어려운 조건에서 중앙정치의 결전장인 은평을에 출마했다.

    금민 후보도 개소식에서 백기완 선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90년대 나의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렇다. 백기완 선생은 1990년대 우리의 대통령이었으며, 우리에게 계승해야 할 정신이 무엇인지를 현재도 알게 해주는 살아있는 정신이다.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은 이제 백기완 선생의 대통령 후보 시절, 피 끓었던 청년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1990년대 백기완 선생을 자신의 대통령으로 모셨던 후배들은 이제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정신을 올곧게 계승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다.

    진보가 위기인 시대에 금민 후보는 18년 전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세력의 역사를 계승하는 동시에, 18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시대, 강산이 변해도 두 번은 변했을 시대에 맞는 새로운 대안으로 이를 뛰어넘기 위해 출마를 선언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백기완 선생과 금민 후보는 18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다시 한 자리에 선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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