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총리가 워싱턴으로 날아간 까닭은?
        2010년 07월 14일 09: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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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루먼(오른쪽)과 애틀리(왼쪽)가 1950년 12월 4일 백악관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 뒤쪽에 애치슨 국무장관과 마셜 국방장관이 서 있다. (출처=미국국립문서보관소)

    미국 주도의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파죽지세로 북진을 감행하고,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위협을 느낀 중국이 대규모의 참전에 나서면서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특히 11월 들어 소련의 미그 15기가 투입된 것이 확인되고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으면서 핵 카드는 다시 등장했다.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낼 수 있다고 들떠있었던 미군은 중국군에게 패퇴를 거듭하면서 남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패퇴를 거듭하자 트루먼 행정부는 방어 거점 구축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미국 함참은 평양-원산 선을 우선 추진하되, 여의치 않으면 38선을 방어선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강력하고도 독립적인” 두 개의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며, 하나는 서울-인천 선을, 또 하나는 함흥-흥남, 최악의 상황에서는 부산을 방어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요새화된 작전 거점을 확보하더라도, 중국군이 소련 공군의 지원을 받아 공습을 해오면 큰 피해를 당할 것으로 우려했다. 이를 저지하고자 트루먼 행정부는 또 다시 북한 및 중국에 대한 원자폭탄 사용 옵션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중국군에게 패퇴를 거듭하자 맥아더는 이를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라고 부르면서, 참전 미군의 수를 두 배로 올려줄 것과 원자폭탄 사용 권한을 요구했다. 그는 30여 발의 핵폭탄을 북중 국경지대에 투하하면 10일 안에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다고 공언했다.

    또한 “동해로부터 서해에 이르기까지 코발트 방사선이 막을 형성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지역의 생명체는 60년, 혹은 120년 후에야 다시 소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랬다면, 북한에서 한국을 지상으로 침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내 계획은 확실한 것”이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내에서는 대규모의 미군 증파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또한 원자폭탄 사용 권한을 맥아더에게 위임하는 것은 “핵무기는 대통령의 무기”라며 핵 사용의 독점적 권한은 미국 대통령에게 있다는 트루먼의 철학과도 배치된 것이었다. 대신 트루먼 행정부는 핵무기를 통한 미국의 힘을 과시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후술하겠지만, 공개적인 기자회견을 통한 원폭 투하 경고가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전면적인 개입이 확인된 11월 20일, 육군참모총장인 롤린스(Lawton Collins)는 맥아더가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는 방안을 승인해 달라고 트루먼에게 요청했다. 11월 28일에는 랄로(W.G. Lalor) 미해군 제독이 합참에 핵무기 사용 시점과 목표물 등을 묻는 비밀 전신을 보냈다.

    이와 동시에 미국 합참은 소련의 개입 징후시 “개입을 억제하고 유엔군 소개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핵무기 사용 계획 검토에 들어가는 한편, 중국에 대한 핵공격 계획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계획을 전달받은 트루먼은 11월 30일 기자회견에서 핵공격 계획을 강하게 시사하고 나섰다. 동북아는 물론이고 세계 지정학이 요동치는 순간이었다. 아래의 내용은 당시 기자 회견의 핵심 부분이다. 

    트루먼의 기자회견과 영국의 개입 

    트루먼: 우리가 한국에서 유엔군의 임무를 포기할 일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둡니다. 우리는 항상 그래왔듯이 군사적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기자: 거기에는 원자폭탄도 포함됩니까? 

    트루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가 포함됩니다. 

    기자: 대통령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라고 하셨는데, 이는 원자폭탄의 사용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의미입니까? 

    트루먼: 우리는 항상 원자탄 사용을 고려해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사용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원자탄은 끔찍한 무기입니다. 전쟁과는 상관없는 어린이와 여성 등 무고한 사람들에게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절한 시점에 어떠한 무기의 사용도 배제하지 않을 것입니다. 

    트루먼의 기자회견 당시 <International News Service>의 백악관 출입기자였던 닉슨(Robert G. Nixon)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저는 트루먼의 말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제가 바로 그 질문을 했거든요. 대통령이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말하자, 저는 의자에서 일어나 원자폭탄도 포함되느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대통령은 모두 포함된다고 답했습니다. 그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 전세계에 큰 파장을 가져온 질문이었습니다. 미국은 또 다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을까?

    (중략) 트루먼의 답변에 애틀리는 극도로 분노했습니다. 그는 신속하게 워싱턴으로 달려가 트루먼에게 정말로 미국이 다시 원자폭탄을 사용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그러한 행동이 도저히 이기기 힘든 세계 3차 대전을 야기할 것이라고 두려워했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정상회담을 비롯해 수 차례의 회담을 열었고, 결국 트루먼은 원자폭탄 사용과 관련된 이전의 입장에서 물러섰습니다.” 

    닉슨 기자의 회고처럼 트루먼이 전세를 뒤집기 위해 핵무기 사용을 강하게 암시하자, 바로 다음날 대서양 건너편에 있던 영국 총리인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lee)는 바로 워싱턴으로 가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애치슨에 따르면, 영국은 원자탄 사용 재량관이 확전론자인 맥아더에게 위임될 가능성을 크게 우려했다. 이에 따라 “주사위가 던져지기 전에 영국도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고, 애틀리는 “오늘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폭넓게 검토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날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12월 4일부터 7일까지 6차례에 걸쳐 이뤄진 미영 정상회담에서 애틀리는 미국의 원폭 사용 계획에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아래의 내용은 당시 대화 내용을 담은 미국의 비밀해제 문서를 바탕으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트루먼: 원자폭탄 투하와 관련해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그것의 사용은 법에 따라 이뤄질 것이고, 또 하나는 아직 원자폭탄 사용을 승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기자회견에서도 밝힌 것처럼, 중국에 원자탄 투하를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애틀리: 원자탄은 우리와의 사전 협의와 동의 없이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귀하의 원자폭탄 사용 계획에 강한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트루먼: 영국과 미국은 항상 이 문제와 관련해 동반자였습니다. 저는 영국과의 협의 없이 원자탄의 사용을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애틀리: 그렇다면 이를 문서화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트루먼: 사람의 말(word)이 의미가 없다면, 그 말을 문서화(writing)하는 것 역시 의미가 없습니다. 

    원자폭탄 사용 계획 검토에 들어간 미국 합참도 트루먼에게 “유엔군의 소개 작전시와 중대한 군사적 재앙을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상황을 제외하곤 원자탄 사용 의도가 없다”는 점을 애틀리에게 설명해달라고 권고했다. 이렇듯 애틀리와의 정상회담 및 합참의 권고를 거치면서 트루먼은 핵 사용과 관련해 신중한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는 12월 8일 기자회견에서 미영정상 공동성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저는 세계의 환경이 우리로 하여금 원자탄의 사용을 요구하지 않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애틀리 총리께 수시로 (원자폭탄 사용과 관련된) 정책 변화가 있을 경우 긴밀한 협의를 하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맥아더, ‘핵 사용권을 달라’ 

    한편 트루먼의 기자회견에 고무된 맥아더는 구체적인 핵 투하 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당시 극동공군사령관인 스트라테마이어(George Stratemeyer)의 12월 1일 일기에 따르면, 맥아더는 북한과 만주는 물론이고 베이징, 상하이, 난징 등 중국의 대도시도 핵공격 목표물에 올려놓고 있었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 등 소련 영토에 대한 핵공격도 검토하고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맥아더는 북한과 중국에 대한 핵공격 목록을 행정부에 제출하는 한편, 26개의 원자폭탄 사용을 요구했다. 4개는 북한에 있는 중국군을 상대로, 4개는 “적 공군력의 핵심 기지”에, 그리고 나머지 18개는 적의 군사 및 산업 중심지에 투하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참전과 트루먼의 기자회견, 그리고 영국의 개입 및 맥아더의 집요한 요구 등이 맞물리면서, 미국 내에서 핵 사용을 둘러싼 논란도 격화되었다. 극동공군사령부의 오도넬(Emmett O’Donnell)은 1950년 11월 “우리는 적의 진정한 보급로와 전략적 목표물에 대한 공습을 허락받지 못하고 있다”며, 중국에 대한 원폭 투하를 비롯한 확전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그러자 그의 상관인 반덴버그는 “오도넬의 입장은 공군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진화에 나섰고, 결국 오도넬은 51년 1월 캘리포니아 공군부대로 좌천됐다. 

    당시 미국 군부 내에서는 원자탄을 강압 외교의 수단을 넘어 실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신중론이 우세했다. 중국의 참전 이전에는 핵 사용 위협을 통해 중국군의 개입을 저지하겠다는 목표가 외교적 목표가 존재했지만, 핵에 의한 강압외교가 실패한 만큼 이제는 ‘방어’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 합참은 유엔군의 안전한 소개나 “중대한 군사적 위기”를 예방하는 것을 제외하곤 핵무기를 사용할 의도가 없다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여기에는 미국의 핵 사용이 제한전으로 묶어두려고 했던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비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게 작용했다. 

    대외 관계를 중시하는 국무부도 핵무기 사용에 부정적이었다. 한반도에 원폭을 투하할 경우 이를 반대해온 국가들과의 균열이 발생해 유엔에서의 단결을 저해할 수 있고,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위신과 도덕성이 추락할 수 있으며, 중국과의 전면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는 핵무기 사용의 실이 득보다 훨씬 클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특히 국무부는 트루먼이 핵 사용을 암시하자 애틀리가 부랴부랴 워싱턴을 방문해 트루먼을 만류하는 모습을 보면서, 핵무기 사용에 따른 국제정치적 파장을 더욱 걱정하게 됐다. 이처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핵무기를 “정치적 에이스(ace)”라고 자부했던 미국은 반대로 “정치적 부채(liability)”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트루먼 행정부가 공개적으로 원폭 투하 가능성을 강력히 암시하고 나서자, 그 파장은 미국의 핵 공격 대상으로 거론된 중국과 소련에 직접적으로 미쳤다. 중국 정부는 언론을 통해 미국의 핵 사용 가능성에 대한 인민들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한편, 미국의 핵공격시 소련의 보복이 뒤따르게 될 것이라며 인민들의 동요를 잠재우려고 했다.

    특히 원자폭탄을 ‘종이호랑이’에 비유하면서 핵무장 가능성을 부인해왔던 중국 지도부는 미국의 핵 위협을 겪으면서 핵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소련 역시 미국과의 핵전쟁에 대비해 핵무기고를 비약적으로 늘리기 시작했다. 

    핵 사용과 미국 대통령, 그리고 미영 특수관계 

    핵무기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과 살상력은 이 무기의 사용이 다른 무기들과는 달리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도덕적 문제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미국 대통령은 “핵무기 사용 여부는 대통령의 권한”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핵 사용에 엄격한 제한을 둬왔다. 특히 미국의 핵 사용은 3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지역적, 지구적 파장을 몰고 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영국 등 미국의 동맹국들도 이에 관여하고자 했다. 한국전쟁은 바로 이 문제에 있어서 특별한 함의를 갖고 있다. 

    여기서 잠깐 미영간의 ‘특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차 대전 막바지에 루스벨트와 처칠은 ‘퀘벡 협약’을 체결해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려고 할 경우 양국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고 합의했다. 그러나 미국이 1946년 원자력법(Atomic Energy Act)을 제정해 핵무기 사용 결정을 다른 나라와 공유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이 협약은 사문화될 위기에 처했다.

    한국전쟁은 이러한 미영간의 특수 관계를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트루먼 행정부가 원자폭탄 사용을 강하게 시사하고 나서자 애틀리 총리는 바로 워싱턴으로 날아가 핵 사용의 위험을 경고하는 한편, 핵 사용 추진시 영국과의 사전 동의를 명문화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영국과 구두상의 협의는 가능하지만 이를 문서화하는 것은 거절했다. 

    핵전쟁과 관련해 양국 특수 관계의 또 하나의 의제는 미국의 영국 기지 사용 문제였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럽에서 소련에 대한 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영국에 전폭기를 대거 배치했는데, 이에 따라 영국은 미국이 이들 기지에서 전폭기를 발진하기에 앞서 영국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행동의 자유”에 집착한 미국은 명시적인 사전 동의를 꺼려했고, 양국 정부의 “공동의 결정에 따른다”라는 모호한 구절로 대신했다. 이는 이후 미국 정부의 일관된 입장으로 굳어지게 되는데, 어떤 나라에게도 자국 핵무기 사용의 거부권을 줄 수 없다는 일방주의적 사고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1950년 12월 트루먼과 애틀리 정상회담 이후, 양국 외교안보 관리들은 미국의 핵 사용 추진시 영국과의 사전 협의를 놓고 집중적인 토론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트루먼 행정부 내부에서 이견도 표출됐다. 비밀 해제된 미국측 문서들에 따르면 반덴버그 공군 참모총장을 비롯한 일부 군부 인사들과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인 폴 니츠(Paul Nitze) 등 강경파들은 “원자탄 사용 여부는 미국의 주권 사항”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영국이 ‘특수 관계’를 내세워 주권에 제약을 가하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표출했다.

    그러나 애치슨 국무장관은 “이 사안은 영국에게도 생사가 걸린 문제”라며 “그들은 우리가 냉정하고 책임있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며 영국의 입장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러한 미국의 내부 논쟁은 중간으로 수렴되었다. 미국의 주권 행사에 제약을 두는 확약은 할 수 없지만, 영국과 긴밀한 협의를 하겠다는 것이었고, 트루먼 행정부는 이를 영국에 전달해 양해를 구했다. 

    트루먼 행정부로부터 미국의 핵 사용 추진시 영국의 사전 동의를 거치는 절차에 대해 ‘확약’을 해줄 순 없지만 ‘협의’는 하겠다는 어정쩡한 약속을 받았던 영국은 53년 1월 출범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강경론에 직면하게 된다. 아이젠하워는 핵무기를 다른 무기와 구분하는 것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그 만큼 원자탄 사용에 적극적이었다. 그러자 윈스턴 처칠 총리는 53년 3월 에덴(Anthony Eden) 외교장관을 워싱턴에 보내 50년 12월 트루먼의 공약을 재확인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완강했다. 

    아이젠하워와 덜레스 국무장관은 미국이 영국 기지를 핵 공격의 발진기지로 사용할 경우에는 협의를 할 수 있지만, 핵 사용 자체는 미국의 주권 사항임으로 “행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며 영국의 요구를 뿌리쳤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영국과의 ‘특수 관계’가 미국의 핵 사용 문제까지 적용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영국의 요구를 수용할 경우 다른 동맹국들도 이를 근거로 미국의 핵 사용 계획에 제동을 거는 빌미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아이젠하워는 3월 12일 면담에서 에덴에게 “당신의 관점은 이해하지만, 영국에게 확약해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주요 참고 자료
     

    윌리엄 스툭 지음, 김남균 외 옮김, 『한국전쟁의 국제사』 (푸른역사, 2001년),
    브루스 커밍스 지음·김동노 등 옮김, 『한국현대사』(창비, 2003),
    강준식, “6.25는 국제전이었다,” 『월간중앙』2010년 7월호.
    Callum A. MacDonald, Korea: The War Before Vietnam (Macmillan, 1986), p. 37.
    Paul G. Peirpaoli, Truman and Korea(Missouri Publishers, 1999),
    Roger Dingman, "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 International Security (Winter, 1988-1989),
    Trent A. Pickering, “A Nuclear Dilemma-Korean War Deja Vu," U.S. Army War College March 2006
    Rosemary J. Foot, “Nuclear Coercion and the Ending of the Korean Conflict," International Security(Winter, 1988-1989), p. 100.
    William Burr, "Consultation is Presidential Business: Secret Understandings on the Use of Nuclear Weapons, 1950-1974," National Security Archive Electronic Briefing Book No. 159, July 1, 2005,
    인용한 미국의 비밀해제문서 사이트: http://www.gwu.edu/~nsarchiv/; http://www.trumanlibrary.org/oralhist

    *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 이 연재는 정욱식의 블로그 ‘뚜벅뚜벅’에서도 함께 진행됩니다.(http://blog.ohmynews.com/wooksik) 최근에 쓴 책으로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가 있습니다. 다음에 이어질 글은 ‘핵폭탄은 동북아로, 맥아더는 집으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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