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를 바꾸는 희망이 이뤄지는 곳"
        2010년 07월 13일 09: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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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에는 사립학교 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홍익대 재단 측과 성미산 마을주민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기습적으로 이뤄지는 벌목 작업을 저지하기 위해, 주민들은 지난달 8일부터 성미산에서 천막을 치고 24시간 농성을 벌이고 있다.

    "성미산은 공동체의 핵심적 토대"

    ‘성미산 싸움’은 비단 이번만이 아니었다. 지난 2001년에도 서울시가 성미산 정상에 ‘배수지(수돗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저수지)’를 만들려고 하면서 주민들과 마찰을 빚은 바 있다. 당시 주민들은 2년 동안 투쟁하면서, 성미산을 지켜낸 경험이 있다.

    해발 66m의 ‘작은 산’에 불과한 성미산 주민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그저 이 산, 저 산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주민들이 온몸을 던져가면서까지 이곳을 지키려고 투쟁하면서 그 의미는 더 각별해졌다. 지난 1996년부터 14년 동안 성미산마을에 살면서 마포두레생협, 성미산학교, <마포FM> 등 공동체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유창복 성미산마을극장 대표는 “단지 생태적인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유 대표는 지난 1994년 몇몇 맞벌이 가구들이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운영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마을공동체가 2000년대 초반 ‘성미산 싸움’ 이후 급격하게 활성화된 점을 언급하며 “성미산이 주민들이 함께 사는 터전을 만들어줬는데, 그 산이 없어진다는 것은 공동체의 핵심적인 토대가 무너지는 것”이라며 성미산의 의미를 이야기 했다.

       
      ▲ 성미산마을극장에서 유창복 대표 (사진=손기영 기자)

    이번 지방선거에서 이곳 주민들은 ‘마포 풀뿌리 좋은 정치 네트워크’에 참여해 오진아 진보신당 마포구 의원 당선에 기여하기도 했다. 유 대표는 “지역 주민운동과 지역 차원의 진보정치는 따로따로이지만, 축제나 싸움이 있으면 같이 활동한다. 당이 주민들을 상대로 당세를 확장하려는 태도를 안 보이자, 주민들도 당을 배타적으로 보지 않으면서 협동할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

    청년시절의 꿈

    감정평가사가 직업인 유 대표에게 공동체 운동에 나선 이유를 묻자 “처음에는 아이들을 잘 키위기 위해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지만, 마을에 살면서 대학시절 꿈꿨던 사회를 바꿔보는 희망이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00년 마포두레생협 설립 과정에 참여하면서 공동체 운동을 시작했다.

    유창복 대표와의 인터뷰는 지난 5일 성미산마을에 있는 마을카페인 ‘작은 나무’에서 2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다음은 유 대표와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 * *

    – 최근 성미산 초중고교 이전 공사를 둘러싸고 주민들과 홍익대 재단이 충돌하고 있다. 그 이전에도 성미산을 둘러싼 주민들과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성미산을 둘러싼 그 동안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구체적 내용과 의미를 간단하게 설명해 달라.

    유창복 = “지난 2001년 여름 (서울시는) 성미산에 배수지를 짓겠다고 했다.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에서 낸 공고를 주민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배수지는 저녁에 물을 채워뒀다가 낮에 각 가정에 물을 공급하는 시설인데, 산 정상을 허물고 이것을 짓겠다는 것이었다.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 구청 측은 산 정상을 허무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했다.

    배수지는 공익시설이니 무조건 안 되다는 것도 ‘님비’일 것 같았다. 그래서 전문가와 주민들이 참여하는 공청회를 개최한다면, 산 정상에 배수지를 지어도 양보겠다고 했다. 사업설명회는 몇 번했지만 공청회는 하지 않았다. 사업설명회는 알바 아줌마들과 공무원들만 참석한 자리였다. 강행 추진을 위한 요식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은 성미산 문제를 가지고 지난 2002년 지방선거에 참여를 했다.

    서울시와 투쟁에서 승리하다

    구의원(기초의원)이 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민 3명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2명은 2등을 했고 1명은 3등을 했다. 그렇게 싸우다가 지난 2003년 1월 29일 아침에 기습적으로 용역들을 동원해 성미산에서 벌목이 이뤄졌다. 일단 잘라놓고 본다는 식이었다. 그 때 심정은 너무 참담했다. 그날 저녁에 처음으로 마을회의를 했다. 결론은 당장 다음날부터 성미산에서 24시간 농성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해 3월 13일에는 용역 100여명과 주민들이 오랜 시간 격렬히 싸웠던 것 같다. 저도 그때 다쳐서 세브란스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이후 이명박 서울시장 기습 면담을 추진했다. 당시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이 벌어졌을 때라, 시민들이 지하철을 잘 타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이명박 시장은 공관에서 서울시청까지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곤 했다. 그래서 3월 14일 새벽에 출근 루트를 파악해 주민들이 길목을 지켰다.

    이날 이명박 시장을 만나 10여 분간 ‘공청회를 원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출근시간이어서 그런지 시장도 주민들을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날 기습 면담은 다음날 <한겨레>에 나와 이슈가 되었고, 그해 8월에 공청회를 열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공청회에서 이미 배수지 시설이 충분해, 배수지가 더 필요 없다는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미산에 들어서기로 한 성산배수지는 10여 년 전, 그러니까 1990년대 초반에 기획되었고, 그때 수요 예측을 잘못했던 것이었다. 맞벌이를 하고 생수를 마시는 가정이 늘어나면서 그만큼 상수도 소비량이 떨어진 것이다. 기존 시설로도 충분하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사전에 잡힌 예산을 써야한다는 공무원들의 논리 때문에 배수지 사업이 추진된 것이다.

    지난 2003년 10월, 서울시의회에서 서울시 상수도본부장이 성산배수지 사업 보류의 뜻을 밝히면서 사태는 마무리가 되었다.

    "산은 공공재다"

    성미산 싸움의 의미로 첫째 세대 간의 협동과 소통을 했다는 것이다. 성미산을 지키려고 올라갔는데, 30년 넘게 산을 찾은 노인들이 있었다. 지역사회의 노인들과 관계 맺기를 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배수지 건설에 찬성하는 주민들과 ‘대립적 소통’을 했던 것이다. 당시 배수지가 들어서면, 땅값이 오르고 마을이 발전한다고 믿은 분들도 있었다. 이 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가진 것도 의미가 있었다.

    세 번째는 공공적인 의제를 가지고 마을 공동체 사람들이 협동과 소통을 했던 것이다. 성미산은 그 자체로 지역사회에서 주거환경의 문제였다.”

    – 성미산은 이 산, 저 산 가운데 하나가 아닌 것 같다. 성미산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이 이어지는 이유와 이곳 주민들에게 성미산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해 달라.

    유창복 = “개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성미산은 생명으로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이곳은 산이어서 땅 값이 싸고 도시 한복판에 있어, 개발을 하면 이익이 많이 남는 곳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개발주의자들이 그동안 끊임없이 이 산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이곳 주민들은 도시 한복판에 산이 있다는 걸 소중하게 여긴다. 도시인들에게 산은 주거환경에서 대단이 중요한 공공재이다. 가장 중요한 건 성미산이 마을공동체를 이루는 데 산파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이웃들과 함께 사는 터전을 만들어줬다.

    산을 생명으로 보지 않는 개발주의자들

    몇 가지 예를 들면, 시민사회는 2000년대 초반 성미산 싸움이 성미산마을의 ‘기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은 지난 1994년에 이 동네에 만들어진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그 기원이라고 본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자녀 육아 문제를 고민하던 맞벌이 가구(20여 가구)가 돈을 모아 공동주택을 빌려서, 스스로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내 새끼 내가 잘 키우자가 아니라, 우리 새끼 함께 잘 키우자’는 생각이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운영하면서 부모들이 친해지고 관계가 생겼다. 또 아이를 제대로 기르기 위해 협동을 선택하고, 협동을 하면서 소통을 배워나가게 되었다. 이후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서 방과 후 교실이, 경쟁교육을 해결하기 위해 대안학교가 만들어졌다. 또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운영하면서, 부모들이 협동과 소통을 지역사회로 확장하고자 생협을 만들기도 했다. 성미산 싸움 이전에도 이미 마을공동체는 조금씩 형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성미산 싸움을 통해 마을공동체의 에너지가 한꺼번에 폭발한 것 같다. 성미산 싸움에서 주민들이 승리한 뒤, 마을에 무언가가 많이 만들어졌다.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 공동체 라디오인 <마포 FM> 등도 당시 사태 이후에 탄생되었고, 생협의 조합원들도 많이 늘어났다. 주민들이 성미산을 지키니까, 마을공동체가 더욱 활성화된 것이다.

    그 산이 없어진다는 것은 공동체의 핵심적인 토대가 무너지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립하고 이전 시도를 주민들이 온몸으로 맞서는 것이다. 지난 2000년대 초반 성미산 싸움이 주로 생태적 환경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생태적 환경뿐만 아니라, 마을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 사립학교 이전을 저지하기 위해 성미산에 마련된 주민들의 천막농성장 (사진=손기영 기자)

    마을 공동체를 지키는 투쟁

    – 현재 성미산 주민 투쟁은 홍익 초중고교 이전 공사 반대를 둘러싼 것이다. 일부 지역은 이미 벌목이 이뤄져 주민들과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곳에 사립학교가 들어서지 말아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창복 = “산의 3분의 1이 절단나기 때문이다. 개발주의자들은 나머지 3분의 2를 잘 쓰면 된다고 하지만, 성미산은 죽어있는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이다. 사람의 3분의 1을 자르고, 나머지 3분의 2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기가 막힌 발상이다.

    홍익초중고가 성미산에 들어설 명분이 없다. 현재 초중고가 있는 홍익대 주변에 유흥가가 많고, 학교시설 낡아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곳에 학교가 들어서면 늘어나는 ‘공익’이 없다. 이 동네는 학교가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자연·주거 환경만 훼손될 뿐이다.

    또 홍익초중고 이전 예정지는 성서초와 맞붙어 있다. 통학로가 중복이 되면서 등·하교 시간이 번잡해질 것이다. 사립학교는 보통 학생의 절반이 부모의 자가용, 나머지는 스쿨버스로 등하교한다. 통학로가 매우 비좁은데, 안전문제가 우려된다. 또 성미산 부근에 있는 경성중고는 ‘자전거 등하교’ 시범학교인데, 자전거도로에 스쿨버스가 지나다니면 위험하다.

    그런데도 홍익대 측이 성미산에 학교를 이전하려는 이유는 ‘일타 삼피’이기 때문이다. 첫째, 홍대 안에 있는 초중고가 이전하면, 알토란같은 땅이 생기게 된다. 결국 이 땅에 기업을 유치해 건물 짓고, 임대사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산은 땅 값이 싼데, 성미산은 도로에 인접해 있어서 금상첨화인 것이다, 셋째 성미산의 나머지 땅은 서울시에 팔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익대 측은 학교 이전 공사를 ‘고부가가치 프로젝트’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홍익대 재단의 ‘일타삼피’

    – 하지만 성미산에 사립학교가 들어서기 위한 행정 절차는 마무리된 상황이다. 결국 현재 학교시설 승인 및 건축허가 재심의 여부는 곽노현 신임 서울시교육감에게 달려있는데, 현재 곽 교육감 측과 어떤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나?

    유창복 = “표면적으로는 절차를 거친 게 맞는데, 내용적으로는 하자가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해 서울시의회에서 시정 질의과정에서, ‘주민과 협의하고, 협의가 안됐을 경우 대체 부지를 마련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하지만 서울시는 요식행위인 상견례 모임만 단 1차례 가졌을 뿐, 대체부지 마련 등 지금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실시계획 인가를 이번 지방선거 직전에 승인했다. 행정안전부가 졸속 인허가를 우려해 ‘지방선거 직전 현안 사업을 서두르지 말라’는 요지의 지침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 여러 절차적인 문제들이 있다고 판단해 곽노현 신임 서울시교육감 측에 인허가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학교시설 승인 및 건축허가 재심의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교육청 측으로부터 아직 자료를 전달받지 못한 상태다. 곽노현 교육감은 우리들의 요구 사항에 대해 검토 의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취임 초기 추진해야 할 정책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릴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곽노현 교육감에게 면담 요청을 하는 등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다해볼 생각이다.”

    – 성미산 마을은 지난 1994년 마을공동체가 생기기 시작한 이래,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공동체 가운데 한 곳으로 자리매김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곳에서 마을공동체가 발달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고, 대표적인 공동체 운동 사례들을 소개해 달라.

    유창복 = “어쩌면 도시이니까 이런 게 가능했던 것 같다. 요즘 시골은 마을공동체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지만, 도시는 앞집 뒷집 모르고 살고지만 그것만 잘 트면 오히려 시골에 비해 공동체 기반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성미산마을이 아파트촌이 아니라서 그나마 가능하지 않았을까는 지적이 있다. 맞다. 성미산마을에는 골목이 많다. 골목에서는 아이, 어른들이 만날 수 있다. 단독주택들이 대부분인 이곳은 아파트보다 대면하기 좋은 곳이다. 하지만 아파트 역시 이웃간의 과계의 밀도가 가장 높을 수 있는 환경이다. 약점을 강점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대도시의 주된 주거형태가 아파트 아닌가?

    골목 많은 동네라서 가능했던 기획

    대표적인 공동체운동의 사례들을 소개하면, 지난 2001년 설립된 마포두레생협이 있다. 생협은 20~30가구의 네트워크인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넘어, 대안적 가치를 좀 더 넓게 나눌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먹을거리라는 대중적 가치를 발견하게 되면서 만들어졌다. 생협이 가장 먼저 한 일이 지역 축제였다. 이를 통해서 관계 맺기를 제안했다.

    마포두레생협 설립을 통해 공동체의 외연이 넓어졌다. 초창기 몇 백 가구에 불과했던 게 현재는 3,500가구가 조합원이다. 그런 면에서 공동체 운동을 더욱 확장시키는데 기여한 측면이 있다. 즉 생협은 성미산 공동체가 건강성을 갖추기 위한 열린 관문인 셈이다.

    지난 2004년 개교한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도 있다. 서울 최초의 대안학교로써, 초중고 12년제인 학교다. 왜 아이들이 군대나 감옥과 같은 곳에서 공부해야 하는지, 왜 교과서 교육만 해야 하는지, 왜 선생님은 사범대 나온 분들만 될 수 있는지 등의 문제제기를 통해 탄생된 학교다. 획일적인 근대교육의 틀을 지양하고, 마을차원의 배움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지난 2005년에는 소출력 공동체라디오인 <마포 FM>이 개국하기도 했다. <마포 FM>은 지역사회의 ‘우물가’이다. 거기에서 지역사회의 다양한 주민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 또 노인, 장애인, 성소수자 등 소수자들의 커뮤니티를 지원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실제로 소수자들이 제작·참여하는 방송들이 <마포 FM>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마포 FM>은 마을공동체에서 소통이라는 핵심적인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주민 동아리가 탄생시킨 마을극장

    – 이중 지난해 2월 개관한 ‘성미산마을극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마을극장으로써, 대형 상업공연에 맞선 지역 소극장들의 벤치마킹 모델이 되고 있는데, 마을극장의 탄생 배경과 그동안의 활동,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면 밝혀 달라.

    유창복 = “성미산마을극장 탄생 배경은 이렇다. 이곳 축제의 핵심은 주민 동아리다. 그런데 어떤 엄마가 축제 뒤풀이 때, 매일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매일 연습하려면 극장이 필요했다. 마침 시민단체 4군데가 함께 이곳으로 이사하려고 했다. 이들은 건물 신축공사 전, 마을사람들을 불러 공간을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극장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극장 공간은 시민단체 쪽에서 지원하고, 극장 시설은 주민들의 십시일반으로 보태 마련했다. 성미산마을극장은 성미산 공동체와 다른 지역사회의 경계에 있는 놀이터다. 경계는 인정하되 문턱을 없애면 되는 것이다. 즉 다른 지역 주민들과도 함께 어울리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극장 문을 열었다.

    성미산마을극장의 컨텐츠는 공동체의 경계, 장르의 경계, 프로와 아마추어(주민)의 경계 등을 허무는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앞으로 계획은 여러 지역사람들이 함께 노는 ‘작은 축제’를 하고 싶다. 또 9월에는 프로와 아마추어들(주민)이 함께하는 마임페스티벌을, 내년 여름쯤에는 ‘다문화 코드’를 주제로 한 행사를 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

       
      ▲ 마을카페인 ‘작은 나무’에서 만난 유창복 대표 (사진=손기영 기자)

    – 성미산 공동체 운동이 추구하거나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 가치는 무엇이며, 이 운동이 다른 곳으로도 번져갈 가능성 혹은 그렇게 하기 위한 노력이 있나?

    유창복 = “산업사회,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사람들의 관계가 해체되었다. 그 결과가 사람들이 상대방을 믿지 않고, 스스로 살기 남기 위해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런 현상은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더욱 악화되었다. 성미산 공동체 운동의 추구하는 가치는 이런 것들을 이겨내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만드는 ‘관계의 복원’이다.

    새로운 삶의 희망을 만드는 ‘관계의 복원’

    공동체 운동은 도시에서 사는데 필요한 게 있으니까 만들어진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한 어린이집, 아이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하는 학교, 깨끗하고 안전한 먹을거리 등이 그것이다. 나 혼자서는 그것을 못하지만, 어떤 계기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발견하고, 협동과 소통을 하면서 마을공동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지역의 경우 우리와 같은 경로를 취하지 않겠지만, 이런 공동체 운동은 어디서든 만들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다만 너무 운동적으로 계획적으로 사명감 가지고 하는 것은 내려놨으면 좋겠다. 마을공동체는 살다보니까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마을 만들기라는 표현보다는 ‘마을살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삶에도 호흡이 필요한 것처럼.”

    – 오랜 기간 지역에서 이뤄진 풀뿌리 운동들이 토대가 되어 이번 6.2지방선거에서 오진아 진보정당 기초 의원 배출에도 밑거름이 되기도 한 거 같다. 지역 주민운동과 지역 차원의 진보정치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 구체적으로 활동을 한 게 있는지?

    유창복 = “마을에서 선거에 처음 참여한 것은 지난 2002년이었다. 당시에는 주민 3명이 출마했다. 공약은 성미산 문제 하나밖에 없었다. 그 이전에 마을에서 정치는 ‘금기’에 가까웠다. 기존의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정치에 참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올해 다시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마포 풀뿌리 좋은 정치 네트워크(마포 풀넷)’라는 조직을 통해 한나라당, 민주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들과 후보 선출과 선거운동을 함께했다. 이곳 성산동에는 무소속으로 주민 후보를 냈고, 인근 지역은 정당 간에 후보단일화 했다. 이번 선거에서 오진아 진보신당 후보만 당선되고 나머지 분들은 모두 떨어졌다.

    선거 참여의 금기를 깨다

    하지만 지난 2002년 이후 8년 만에 선거 참여의 금기를 깰 수 있었다. ‘마포 풀넷’은 이후에 생활정치의 장으로 확산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진보정당들은 이번에는 달랐다. 주민들을 자신들의 조직에 흡수시키려는 태도를 버렸다. 진보정당들이 주민의 입장과 실체를 그대로 존중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꿔, 과거의 불신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 같다.

    지역 주민운동과 지역차원의 진보정치는 따로따로이지만, 지역의 축제나 싸움이 있으면 같이 활동한다. 긍정적인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당이 주민들에게 당세를 확장하려는 태도를 안 보이자, 주민들도 당을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으면서 협동할 수 있었다. 주민이 가운데 서있는 것만으로 진보신당과 민노당의 갈등을 중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마지막으로 성미산마을 운동 1세대로써, 성미산마을의 향후 발전 방향을 이야기해 달라.

    유창복 = “그동안 성미산마을의 ‘방향’을 계획하지 않고 살아왔다. 방향을 계획하면 그것이 부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린 공동체’의 과제는 있는 것 같다. 공동체를 확장하려는 게 아니라,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동체가 만들어져야 한다.

    성미산마을의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자란 아이들이 20대로 진입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마을에서 성인식을 해주고 있다. 그때 어떤 아이가 ‘부모가 선택해 여기서 컸지만, 성인식을 하는 것은 제가 이 마을을 선택한 것’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언젠가 이 마을을 떠날 것으로 본다. 20대는 자신의 꿈을 찾아 객지로 나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 ‘객지에 나가서 깨지고 엎어져도 항상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을 해라’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 그 아이들이 성미산마을에 다시 돌아와서 어린 시절 마을의 모습을 추억할 때, 그것이 이 마을의 실체일 것이다. 아이들이 마을에 다시 돌아와서, 생협의 일꾼이 되고, 성미산 학교의 교사가 되는 그림이 그려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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