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격훈련도 받는 노동자 전투부대
        2010년 07월 12일 10: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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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초, 1월 22일. 나는 내 휴대폰에 입력된 사람들에게 문자를 날렸다. "오늘은 전노협 창립 20주년입니다", 라는 내용이었다. 전노협이 해산하고 10년 정도 지났을 때부터 나는 매년 1월 22일 옛 동지들이 모여 술자리라도 가졌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한 번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게으름 탓도 있고, 또 현실 운동에서의 갈등 탓도 있고… 과연 언제 그 모임을 성사시킬 수 있을지, 나는 조바심이 난다.

    5년 10개월 10일

    1990년 1월 22일 창립, 1995년 12월 3일 해산, 그러니까 만으로 5년 10개월 10일이었다. 그렇게 전노협은 시간적으로는 아주 짧고, 역사적으로는 아주 긴 생애를 마쳤다.

    나는 전노협의 선봉대 담당 간사(부장)였다. 창립 날짜로 임명이 되었고, 해산과 함께 그 직위를 놓았다. 화염병, 쇠파이프, 짱돌, 최루탄, 백골단, 가투, 파업전술, 파업사수, 공장점거, 지도부 보위, 선동, 수배, 구속… 그 삶을 살게 해준 전노협을 나는 죽는 그 날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나는 사실 전노협 해산 이후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신명과 재미’라는 것을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운동은 삶이고, 삶은 재미가 있어야 하고, 재미는 진정성인데, 그래야 더 치열할 수 있는데, 나는 그 날 이후 그것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전노협은 내 삶에서 절대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각자 전노협을 기억하는 내용이 다를 것이다.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도 노선과 위치에 따라 다를 것이다. 계급성, 민주성, 자주성, 전투성, 연대성, 노동해방…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운동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그 기풍이 기억된다. “됐나? 됐다!”로 표현되는 바로 그 운동의 기풍, 결정한 것은 무조건 따른다는 그 기풍 말이다. 그런 운동, 그런 시대가 다시 올 수 있을까, 나는 서글퍼진다.

       
      ▲ 전노협 선봉대 연대지원투쟁 모습 (사진=한내)

    전노협이 마창노련의 발족에서 시작됐듯, 선봉대의 시초도 마창노련의 정당방위대였다. 1988년 백골단과 구사대의 파업현장 침탈에 맞서 공장을 탈환한 정당방위대의 혁혁한 승리는 전국 각 지역에서 선봉대를 만드는 기폭제가 되었다. 노동부 직원들도 수갑을 차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당시 내가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인천에서도 파업공장마다 사수대가 만들어졌고, 그것이 인노협 선봉대로 이어졌다.

    화염병, 쇠파이프, 짱돌 그리고 백골단

    전노협 시기, 선봉대의 임무는 말 그대로 선봉대였다. 전국 곳곳에서 파업현장을 사수했다. 가투에서는 전투부대였다. 그리고 전국노동자대회와 전노협 대의원대회를 사수했다. 그래서 선봉대원들은 매번 전국노동자대회와 대의원대회에 참여하면서도 대회를 볼 수 없었다. 대회가 진행되는 대학교의 각문에서 화염병과 쇠파이프, 짱돌을 들고 백골단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 수원캠퍼스에서의 전노협 창립대회 때도 마찬가지였고…

    그런 투쟁을 하기 위해 선봉대는 전국단위 회의를 하고, 훈련을 했다. 1990년 8월 중순, 덕유산에서 전국선봉대의 2박 3일에 걸친 1차 훈련이 있었다. 구보를 하면서 체력을 길렀고, 화염병 제작 투척 훈련이 있었다. 쇠파이프 훈련도 있었다. 엉성하지만 유격훈련장을 스스로 만들었다. 유격훈련 코스 중의 하나는 화생방이었다. 철사와 비닐로 5미터 정도의 화생방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투쟁 때마다 수거해 놓았던 불발최루탄을 까 넣었다. 남성이고 여성이고 포복으로 그 안을 기어 들어갔고 투쟁가 한 곡을 부른 뒤에 기어 나와야 했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었고, 구토를 하는 동지들도 있었다. 심지어 한 여성동지는 기절하기까지 했다.

       
      ▲ 1993년 4차 노동법개정투쟁 선봉대 합동수련회 모습.

    나는 그 수련회 중의 한 장면이 아직도 생생한 화면처럼 떠오른다. 첫 날 밤늦게 도착한 동지들은 개회식을 포함한 이런저런 프로그램 때문에 잠을 3시간 정도 밖에 잘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기상시간은 새벽 5시였다. 나는 긴가민가하면서도 5시에 기상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참석자들이 순식간에 다 뛰어나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참으로 감동스러웠다. 집결에 걸린 시간은 10분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선봉대였다. 싸우다 터지고, 깨지고, 끌려가고, 구속되는 사람들의 노동자 부대, 선봉대… 같은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남들처럼 우아한(?)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을 마다하고 자원한 사람들의 집합체였다.

    그들의 이름은 역사 속에 남아있지 않지만

    대부분의 선봉대원 이름은 역사 속에 없다. 그러나 전노협과 민주노조 사수와 투쟁의 진전에 이름 없이 투쟁한 선봉대원들, 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 물론 선봉대에서 성장한 노동자들이 각 사업장 노조의 중심이 되는 조직대오의 역할도 했다. 그것을 동시대에서라도 기억해 준다면, 그 당시 이름 없이 투쟁했던 선봉대원들의 노고에 대한 답이 되지 않을까, 부질없는 희망을 품어본다.

       
      ▲ 1993년 4차 노동법개정투쟁 선봉대 합동수련회 모습

    나는 내년 1월 22일에는 꼭 ‘전노협 기억행사’를 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행사를 반드시 이루겠다는 결심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안다. 매년 그래왔듯 이 마음은 1월 22일이 다가오면서 꺾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을, 그래서 또 그냥 지나갈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그것이 궁금하다. 노선과 정파는 다르더라도 인간관계는 부드럽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말이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매년 1월 22일에는 많은 동지들이 모여 전노협을 기억하고, 전노협에서 계승해야 할 것을 찾아내고, 소주도 한 잔 하고… 그리고 어차피 같이 늙어가고 있지 않은가, 이 말이다. 뻔한 실력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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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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