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비 밀크가 열어젖힌 공간의 가능성
        2010년 07월 12일 10: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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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투나, 팬실베니아, 리치몬드, 미네소타의 커밍아웃한 젊은 게이들, …그들이 유일하게 찾고 있는 것은 희망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희망 없이는 게이 뿐 아니라 흑인, 노년층, 장애인들은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더 많은 게이를 선출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모든 권리가 박탈된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고,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또한 게이가 선출된다는 것은 그 동안 포기해 왔던 국가의 문이 모든 사람에게 열릴 수 있다는 희망을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 하비 밀크의 연설 중 일부-

    2008년 총선, ‘커밍아웃한 최초의 레즈비언 공직 후보’로 나선 종로 최현숙 선거운동본부. 그러나 최현숙 선거운동본부는 여러 차례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선본은 1%로 대변되지 않는 100%를 대변하는 정치를 하자, 그것을 슬로건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입장과 소수의 지배를 포함시키지 말아야 한다. 99%를 대변하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갈려 논쟁하였다. 그리고 ‘소수자’에 불과한 레즈비언이 ‘왜’ 다수의 정치와 대의제 속에서 대표되어야 하는지, 이를 어떻게 동네 유권자들에게 설득시킬지에 관해 논쟁하였다.

    대의제 정치 사이클에서는 한번도 고민해 본 적 없는 문제를 두고 선본 활동은 외부 활동보다는 회의가 거듭되는 시간들로 채워져 갔다. 혹자는 더 레즈비언이란 용어를 알리는 것이 선본 활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혹자는 보다 주민들이나 진보정당인들에게 친숙한 진보정치의 방식을 활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 지난 18대 총선에 출마한 최현숙 후보와 선거 운동원들

    돌이켜 보건데, 당시 선본에 결합하던, 주로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해 오던 이들은 공직 선거를 진행하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의문되어 본 적 없는 질문에 부딪쳐야 했던 것 같다. 그 동안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소수자로서의 권리와 소수자에 대한 인정을 요구함으로써 소수자에게 일정 정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지분을 사회에 요구하였다.

    그렇다면 거기서 더 나아가 왜 소수자를 어떤 공간의 대표로 세워야 하는가? 이는 레즈비언 등 성소수자가 아닌 다른 정체성의 피선거인이 선거에 나섰을 때에는 한번도 질문된 적 없는 질문이었다. 혹자가 얘기하는 식으로 이는 소수자 인권운동의 의회주의에 대한 경도인가? 혹은 국회 비례대표로서 소수자 대표성을 분배하는 방식-2008년 총선의 경우 장애여성, 비정규직 등으로 충분한 상황임에도 굳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인가?

    나는 일련의 소수자 운동의 대표적 위치에 있는 분들이 비례대표 대표성으로 국회에 입성하는 것의 의미를 충분히 긍정한다. 고도의 이성애중심적, 비장애인 중심적, 남성 중심적인 대표성으로 이루어진 국회 공간을 교란시킴으로써 국회의 대의성에 대해 중요한 화두를 던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며, 이것이 진보정치의 주요한 색깔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와 한편으로 지역 정치와 지역 선거를 통해 이른바 ‘소수자’의 공간 대표성이 등장하는 방식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2008년 총선 당시 최현숙 선본은 ‘레즈비언이 행복한 세상이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나는 이 슬로건이 나름 당시 선본의 고충 속에서 나온 슬로건, 선본의 메세지를 요약한 슬로건이었으며, 선본이 세상에 던지고자 했던 묵직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왜 레즈비언 등 소수자가 행복하거나 대표성을 인정받는 세상은 어떻게 다른 세상이 될 수 있는지, 이를 위해서는 어떠한 정치가 필요한지라는 물음을 던지고 답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이 글에서는 이 정치의 가능성의 한 실례로서 미국 내에서 최초의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정치인이었던 하비 밀크(1930-1978)의 사례를 통해 타진해 보려 한다.

    하비 밀크의 공간 대표성

    뉴욕의 금융분석가였던 하비 밀크가 게이 밀집 지구였던 샌프란시스코의 카스트로 거리에 정착하게 된 것은 1970년대 미국 내 신좌파 운동 열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하비 밀크가 정치에 나서면서 처음부터 전적으로 소수자들의 의제를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밀크가 처음 정치에 나서게 된 계기는 자신과 같은 상점 소유자, 소수 자영업자들에게 부과된 특별세가 부당하고, 시민들이 납부한 세금이 필요한 곳에 쓰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특히 그가 운영하던 카메라 상점에 한 여성이 찾아와 카메라를 빌리면서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는 이러한 카메라를 살 수 없다고 털어놓은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샌프란시스코의 세금 운영을 다르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당시 새롭게 샌프란시스코에 유입된, 주변화된 새로운 정치 주체로 떠오르던 유대인, 히피, 게이 등의 대리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 하비 밀크의 일생을 다룬 영화 <밀크>의 한 장면

    첫 선거에서는 낙선하였고 두 번째 선거를 뛰었을 때 독창성이 주목을 받아 샌프란시스코 시장 모스콘의 항소위원회 지명을 받았다. 민주당이 캘리포니아 주의회 예비후보를 아그노스로 사전에 결정했다는 것을 알고 항의하는 의미에서 예비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으며, 아깝게 낙선하였다. 그리고 1977년 선거에서 최종 당선되었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임기 중간에 동료 시의회 의원 댄 화이트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밀크의 정치 참여 과정은 평범한 시민이 불평등에 저항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가 입회한 후 가장 힘을 기울였던 입법 과제는 게이 인권 법안과 함께 시의회 예산이 올바르게 쓰이는 것, 소위 공원의 ‘개똥 치우기’ 법안이었다.

    민주당 사전 예비후보와 경합했던 두 번째 선거 캠페인에서는 ‘샌프란시스코 핵심 지구에 자동차 진입 금지’ ‘샌프란시스코 대중 교통 수단 무니(Muni)를 공직자들이 이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공직자들이 무니(Muni)를 이용해야만 낙후된 무니(Muni) 서비스가 더 나아질 것으로 믿었다. 그는 그러나 획기적이라기보다 평범한 이러한 입법안과 제안들을 항상 게이 등 샌프란시스코 주변인들의 대리자임을 자임하면서 수행하였다.

    그가 샌프란시스코 공직 의회 공간에서 입법과 같은 치안의 정치를 담당하면서 동시에 게이 등 샌프란시스코 주변부 인구의 대리인이라는 위치를 잃지 않고 상징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1970년대 말부터 심각하게 격랑하였던 반-동성애 운동 속에서 공직 대표와 자신을 가치를 유지하고 이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혹자는 그가 초기 선거 캠페인에서는 히피와 같은 옷차림을 고수하다가 점점 말끔한 공직 후보와 같은 외양을 받아들였던 모습을 보고 그는 ‘유능한 정치인이 우연히 게이인’ 정치 수사학을 구사하였으며 이것이 먹혔다고 본다. 또 다른 이는 그가 ‘최초의 게이’ ‘정직한(게이임을 숨기지 않는)’ 정치인의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샌프란시스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의회 공간과 정치 공간에서 대중의 공적 선택의 성격과 맥락을 상시적이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사실 하비 밀크는 항상 동일함/특수함, 중심/주변부의 수사를 반복적으로 구사하였다. 첫 번째 선거 캠페인에서 그는 “하비 밀크는 모두를 위한 특별함을 갖고 있다”이라는 구호를 사용하였고 두 번째 선거 캠페인에서는 그는 민주당 지도부의 사전 위임을 받은 예비후보와 일종의 풀뿌리 후보로서 경쟁하면서 “기계/인간”이란 구호를 사용하였다. 상대 후보가 보편성에서 벗어난 특수한 지형만을 대변하고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하비 밀크는 항상 정치적 이슈를, 심지어 동성애와 상관 없는 정치적 이슈를 연설할 때에도 자신의 게이 정체성을 말미에 언급하였다. 신의 공직 후보로 선출되기 전 하비 밀크가 이미 지니고 있었던 공적 대표성을 상징하는 명칭인 “카스트로 거리의 비공식적 시장”은 그 자체로 그가 지니고 있던 공공성/주변성의 모순적 위치를 잘 보여 준다.

    이 명칭을 얻게 된 계기는 쿠어스 맥주 회사에 대항한 노동조합과 게이 커뮤니티 간의 연대가 형성되고 성공했던 시점에서 비롯된다. 쿠어스 맥주 회사는 악명 높은 노동 탄압 회사로서 유명하였는데, 당시 노동조합 무력화 전략으로 채용 전 지원자에게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통과하도록 요구하고 있었고 여기에는 노조 지지 여부와 성적 지향이 포함되어 있었다.

    1974년 미국 트럭운전사 조합이 하비 밀크를 비롯한 샌프란시스코 게이 커뮤니티에게 쿠어스 맥주 보이콧 운동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였다. 밀크 등은 쿠어스 맥주 보이콧을 지지하는 대신 트럭 운전사 연합 쪽에서는 커밍아웃한 게이 트럭 운전사들의 고용 촉진을 위해 노력할 것을 제안하였고 대표들은 이에 동의하였다.

    이 연합과 보이콧 운동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캘리포니아 시장 내 쿠어스 맥주 시장 점유율은 43%에서 14%로 하락하였다. 이 운동으로 샌프란시스코 게이 커뮤니티는 커뮤니티로서의 존재성을 드러냈으며, 하비 밀크는 유명해지는 동시에 악명 또한 얻었는데, 그는 이 저항으로서 얻은 상징성이 선거 공간에서 유용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가 당시 운동을 통해 얻은 상징성 또한 ‘샌프란시스코 공적 정치’에서는 존재한 적 없는 주변성인 동시에 대표성의 상징이었다.

    그는 중심에 도전하는 주변부 위치로서의 모순성을 자신의 자원으로 인식, 활용하였으며, 일반 대중들에게도 중심/주변의 모순 속에 대중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보게끔 하였다. 단순히 자신을 ‘주변부’로 위치 지은 것이 아니라 주변부의 공적 대표성을 설파하였다.

    일례로 첫 번째 선거 캠페인에서 밀크의 선거홍보물을 받은 보수적 공화당 인사가 선거홍보물의 밀크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을 써 넣자 밀크는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정책이 어떤 보수적 인사라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자신 만이 이데올로기적 통합을 가져올 수 있을 적임자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다른 홍보물을 발행하면서 세 칸을 나누어 맨 오른 칸에는 현재 샌프란시스코 시의회 정책을, 왼 칸에는 자신의 정책을 기재하고 중간 칸에는 홍보물을 받은 유권자가 기재하게끔 하는 홍보물을 발행하였다.

       
      ▲ 하비 밀크의 일생을 다룬 영화 <밀크>의 한 장면

    즉, 대중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점검하고 동일시/반대의 포지셔닝을 선택하게끔 한 것이다. 밀크는 이른바 평범한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위치가 실제로는 항상 찬/반 속에 놓여져 있음을 알았고 자신의 게이이면서 공적 대표라는 정체성 속에서 이를 정치화하고자 하였다.

    누구를 호명하며, 무엇을 대변할 것인가

    우리는 대다수 선거 캠페인에서 호명하는 어떤 대상은 항상 비특정 일반 대상이거나 보편적이라고 이해되는 인구이지만 항상 선출된 대리인은 특별한 누군가와 집단을 대리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하비 밀크는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특수한 집단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공적 공간에 샌프란시스코 주변부 인구의 공적 대표성이라는 상징으로 도전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드러낸 정치적 공간의 성격 속에서 주변부 인구를 대리함을 자임함으로써, 중심/주변의 대립을 전치시켰다.

    다시 한국 사회에서 성적 소수자의 소수자의 공간 대표성을 묻고자 한다면 다시 한번 공적 공간에서는 대리되지 않는 주변적 존재를,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유령화’된 존재를 명명하고 대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단지 일반화된 ‘시민’ ‘국민’이라고 명명되는 이들의 위치를 정치적으로 제시하고 포지셔닝하는 기획이 필요할 것이다.

    다르게 사고하자면, 최현숙 선거에서 ‘레즈비언’과 ‘진보정치’는 얼핏 보기에 상호 대립적이면서도 모순적으로 접합될 수밖에 없는 구호였다. 다만 당시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은 상징적인 구호로 충분히 표현되지 않는 모순적인 정치적 존재들을 드러내면서, 정치와 공적 공간으로 이끌어내는 기획력이 아니었을까. 특히 지역 정치라는 공간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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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 토리 / 성정치위원회

    개별적 연구와 활동만으로 만족해 하다가 모 캠프 때 모 진보정당인의 눈물에 맘이 흔들려 최현숙 선거에 동참한 후 지금까지 진보신당 성정치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차별화된 진보운동과 성정치, 신좌파적 의제 확산에 관심을 갖고 연구, 활동을 병행 중이다.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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