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비판한 건 '유령'이 아니다"
    386 자유주의 맞서, 20대가 할 일
        2010년 07월 11일 11:2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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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잘 읽었고, 문제의식도 이해되었지만, 글이 너무 중언부언이라서 하나하나 다 집어서 종합적으로 말하기가 난감하다. (이런 말하기 참 미안하지만) <레디앙>에는 누구나 글을 올릴 수 있지만, 난독자이거나 자기 논리도 정리하지 못한 채 발설되는 글이어서는 안 된다.

    일단 양승훈씨는 대체적으로 내 글에 대한 ‘비판’ 성격으로 그 글을 썼는데, 내 글이 지목하고 있는 바에 대해선 전혀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냥 다른 얘기하는 것 같은데, 돈 이야기와 운동권 학생회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일정 부분 내 생각을 자의적으로 ‘가늠’하면서 쓰기도 했다.

    그래서 좀 황당하고, 왜 잘 읽어보려 하지 않았는지 되묻고 싶다. 그래서 참 난감한데, 일단 그가 댓글에서 스스로 그 글의 핵심 주제라고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나머지 몇 가지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비판하도록 하겠다.

    자유주의야말로 ‘아버지 세대’의 것

    그는 마치 내가 전통적인 방식, 아버지 세대의 방식으로 이야기한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다소 엉뚱하다. 만약 편의상이라도 386세대에 대해서 그렇게 ‘아버지 세대’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내가 보는 아버지 세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유주의적’이다.

    그들의 근본적인 멘탈은 91년을 경과하면서 ‘자유주의’로 기울었다고 생각한다. 소비에트연방을 사회주의의 고향으로 상정했기에 그 체제의 몰락이 자기 근본을 뒤흔든다고 생각했고, 91년 열사 투쟁의 심대한 후퇴 상황을 목도하면서 하나같이 절망했다.

    물론 오늘날 ‘좌파 진영’에 제목소리를 내며 숨 쉬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말 그대로 ‘극소수’이며, 결코 ‘아버지 세대’를 대표하지 못한다. 내가 보는 바, ‘윗세대’의 멘탈을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하자면, 의심의 여지없이 ‘자유주의, 노사모, 반MB’이다.

    이 지점에서 나의 심상정 비판도 삐져나온 것인데, 따지고 보면 최근에 그가 보이는 행보들은 이 주류 정신에서 한 치도 벗어나고 있지도 못하다. 나는 바로 이 정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유령’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들을, 진보진영을, 혹은 시민사회운동판을 뒤흔들며 모든 의제를 좌지우지하는 게 바로 이 정신 아닌가. 나는 이 정신을 혐오한다. 이것과 완전히 단절해내지 않으면 새로운 세대의 운동도 없고, ‘진보정당 수권’ 따위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적을 명확히 목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잃지 않은 가운데, 자기 안의 자유주의, 자기 밖의 자유주의와 싸울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자유주의 비판은 ‘아버지 세대의 언어’가 아니라, 되려 충분히 우리 세대의 언어가 될 자격이 있는 ‘언어’이다.

    양승훈씨는 (필자가 쓴 글의)댓글에서 "자유주의’ 유령을 잡을 때가 아니라, 전통적 방식의 이야기 바깥, 지금까지 나오지 않은 ‘급진적 정치’ 이야기들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보이지 않던 ‘몫이 없는 자들’의 이야기가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이야기했다.

    아니, 자유주의는 유령이 아니다. 오늘날 자유주의는 실용주의, 실용적인 노선, 실용 전략, 당장 실행 가능 목표 따위의 이름으로 소환되고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MB만의 이념, 4대강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좌파 내의 실용주의들

    예를 들어볼까. 심상정의 사퇴 논리는 얼마나 실용주의적이었는가. 또 저 유명한 ‘반MB전선’이라는 전략은 얼마나 실용주의적인가. 자기 정치의 내용은 모두 다 제거시키고 ‘실용주의’만 남은 것이다. 심지어 내가 거의 몇 안 되게 희망을 안고 투표했던 곽노현 교육감은 얼마나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보여주고 있는가.

    요컨대 이미 그것은 우리 안에 침투했다. 실용주의라는 철학, 자유주의라는 이념에 있어서 저들은 모두 한 패거리이다. 심지어 학생운동 위기를 둘러싼 근본 없는 ‘회고담’에서 우리는 얼마나 ‘위기’에 대한 ‘위기’를 연상시키는 실용주의적 담론을 목도하고 있는가.

    위기를 바라 보는 조병훈씨의 태도는 실용적 독해를 노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점에서 양승훈씨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 메이저캠 학생운동의 돈 문제 이야기를 하다가 김예슬 이야기하는 건 지나치게 편의적인 발상이다.

    김예슬의 선언은 스스로 자기 존재 조건에서 제 나름의 저항 양식을 창출해내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되는 것이지, 대체 그게 왜 ‘고대생이니까 그렇게 주목받는 거지’라는 식으로 발현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야말로 진상이고, 그럼 뭐 강남 살고 먹고 살기 편하니까 문화 비평도 하지, 라는 식으로도 말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참으로 안이한 ‘읽기 방식’이다. 나는 이미 이 전 글에서 그 모든 것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이야기 바깥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양승훈씨가 나의 첫 번째 글을 읽으며 그것이 마치 모든 ‘새로운 흐름들’에 대한 비판이라고 여겼다면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거나, 그가 잘못 읽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리반을 비롯한 흐름에 대해서 긍정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어쨌든 이 새로운 흐름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양승훈씨는 그것이 ‘전통적 방식의 이야기 바깥’이라고 말했는데, 설령 나의 세련되고 새로운 자유주의/실용주의 비판이 ‘전통적’이라고 느끼는 걸 취향으로서 인정해준다고 해도, 그들이 정녕 ‘이야기 바깥’인지는 의심해봐야 한다. 요컨대, 대체 ‘이야기 바깥’이란 게 어디 있는가?

    최근 나의 일상은 이 ‘새로운 흐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데, 그럼 난 ‘이야기 바깥’인가? 그는 전반적으로 구조 안에 함몰된 태도를 보이면서, 구조주의적이진 못하다. ‘외부’나 ‘탈주’ 운운하는 최신 철학 이념과 자기 안에서도 해명되지 못하는 뒤섞인 개념이 서로 혼동을 겪고 있는 것이다.

    추상적인 말만 남발할 게 아니라, 잘 생각해야 한다. 이미 ‘이야기’는 우리가 ‘새롭다’고 말하는 저 ‘새로운 흐름’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오늘날 <프레시안>이나 <레디앙> 같은 좌파 성향의 인터넷 매체들 중 그 누구가 ‘학생정치조직’의 운동에 대해서 말하는가. 두리반이나 파티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올드한 찬양

    그가 다소 매너 없게 신상적인 면에서 내 정치 스펙트럼을 규정하려고 해서 별 도리 없이 이야기하자면, 지난 3년 여간 확실히 나는 후자 쪽(소속 없는 개인들의 놀이터)에서 놀았고, 그들과 친하게 지낸다. 나는 과거에 다니던 대학에서 ‘전국학생연대회의’ 활동가군으로 불리는 축에 속해 활동했지만, 양승훈씨가 말하는 ‘대장정’이 뭔지도 모르겠고, 심지어 학생행진 회원도 아니다.(만약 舊대장정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는 확실히 잘못 알고 있거나 ‘정보과 형사’스러운 짓을 하고 있다. 수정하기 바란다.)

    오히려 그의 규정 따위가 정말 쌩뚱 맞게 느껴질 뿐이다. 그런 면에서 그야말로 올드(old fashionable)하다. 그러나 대체 그런 구분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오히려 나는 양승훈씨나 조병훈씨가 ‘새로운 흐름’ 운운하면서 ‘대상’에 대해 다소 ‘도구주의’적으로 이야기하다가 지나친 환상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이 대체 혁명적 흐름을 만들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섹시한 파티들은 이미 100년 전에도 있었고, 68년에도 있었다. 그것들이 섹시하고 재미있을지언정 여러분이 갖고 있는 저 ‘대상’에 대한 도구적 환상은 정말 섹시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다.

    나는 그 ‘찬양’이 지겨울 지경이다. 찬양하기 전에 그냥 말없이 놀면 될 것을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찍이 90년대 중반에 학생운동의 PD 계열 일부가 이미 ‘저것’보다 더 섹시하게 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과거의 자료들을 확인해보기 바란다.)

    그 당시 학생운동 문건과 자료들에는 무수한 문화담론이 있었다. 얼마나 풍부했었는가. 만약 아주 잠시 구질구질한 시기가 있었다면 2000년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어쨌든 그 새로운 흐름에 대한 물신과 지나친 환상, 절대화가 대체 뭘 가져왔단 말인가.

    나는 저 재미있는 놀이들과 그 놀이들의 주체들은 긍정할지언정 여러분의 망상은 지지하기 어렵다. 한동안 ‘패션좌파’ 운운하던 우석훈의 제자들이 연세대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해서 얼마나 올드하게 놀았는지 나는 익숙히 들은 바 있다. (<유쾌한 반란>이었던가? 한 15년 전쯤 저 올드한 운동권들이 그런 식으로 놀았던 것 같은데!) 그 ‘망상’의 신화야말로 이데올로기적 전복을 방해하는 물신화된 도구주의의 ‘이데올로기’이다.

    흔들리는 주체

    돈 문제 이야기하는 건 일견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뭐 이상한 방식으로 논리를 정리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아쉬운 생각이 든다. 학생회 운동이 돈의 문제로부터 허우적댔다는 말은 맞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드러나는 문제들 중 하나였을 뿐 모든 것을 환원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원인은 되지 못한다.

    그러면서 진보신당 언저리에 여러 개인들이 있다고 했는데, 나는 그들을 모두 싸잡아서 ‘자유주의자’라고 명명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양승훈씨의 오독일 뿐이다. 나 역시 부르주아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한동안 노사모 회원이었고, 오랫동안 자유주의자였다.

    그나마 행운을 얻어 급격한 변화를 겪을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보적 자유주의자로서만 살았으리란 생각이 든다. 바야흐로 학생 대중운동이 망하니 개인들은 방황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나는 소속이 없다. 내 주위의 무수한 좌파적 견해를 지닌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새로운 흐름’이라고 운운하며 찬양하거나 지나친 환상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 새로운 주체가 어떻게 하여 스스로의 삶들을 ‘정치화’시키는가를 주목하고 우리 각자도 실험해나가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바깥’에 대한 망상을 부디 버리길. ‘현실’에서 ‘이야기의 바깥’ 따위는 없다. 바깥의 경계에 다가서는 탈구조적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그 운동 자체를 긍정하는 나는 그 ‘보잘 것 없는’ 실험들의 중요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지 못하고 자유주의적 포션과 실용주의적 시선으로 ‘과거’를 ‘과거’로서만 바라보는 행태를 갖는 것과 멜랑콜리한 망상을 갖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과거가, 정말, 끝났다고 믿는 것인가? 과거는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내가 말한 ‘유령’의 진정한 의미이다.

    자립에 대해서

    끝으로 다소 독해하기 어렵게 배열되었지만, 자립에 대한 양승훈씨의 고민의 뿌리 자체는 지지하고 싶다. 양승훈씨는 “새날은 왔는데 해가 뜨지 않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진보정당과 단체들이 젊은이들이 자립적이지 못하다고 비판만 하지 환대하고 있진 않다는 것이다. 저 윗세대가 20대에게 ‘헌신’만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환대 따위 별로 욕망하지도 않는다.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그것이란 말인가? 나에게 있는 욕망은 그저 저 ‘빨간색’이나 ‘주황색’, 혹은 ‘노란색’이나 ‘연두색’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이들 중 대다수를 점하는 멍청한 자유주의자 아저씨들을 끌어내리는 것뿐이다.

    최근에 심상정 씨의 자유주의적 망상으로 가득 찬 토론회 기사를 보고 더욱 그런 생각을 굳히게 되었고, 만약 이 오래된 ‘위기’가 종지부를 고하기 시작할 수 있다면, 그들을 끌어내릴 주체는 다름 아닌 ‘젊은이들’이 되어야만 한다.

    양승훈씨의 말처럼 그들의 훈수는 20대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칭찬도 모종의 냄새가 느껴지기 일쑤다. 그러나 양승훈씨의 말은 어떤 갈구처럼 느껴진다. 돈을 달라는 것인데, 그건 너무 현실에서 많이 벗어난 투정처럼만 느껴진다.

    그저 우리는 앞으로 꽤 오랫동안 가난하게 버틸 수밖에 없다. 김슷캇이라는 분은 ‘입당’보다는 ‘개드립’을 권하겠다는데, 오타쿠들의 ‘자위’가 지긋지긋한 나는 ‘개드립’은 추천할 수 없고, 차라리 ‘가난한 좀비들’이 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작년 겨울 군복무 중일때 나는 TV를 통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알려진 바에 의하면(<나는 전설이다> 감독 에디션) 좀비들은 사랑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떼거지로 달려가 저 합리적인 인간들을 습격하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 헌신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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