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을 용납 못하는 운동권 사회
    2010년 07월 11일 11:2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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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슷캇이 개드립을 던졌다. “개드립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그는 글 마지막에서 [진보 야!] 꼭지 쓰는 글쟁이들에게 ‘더 크고 아름다운 개드립’을 권유한다. 까놓고 말하자. 나도 요새 내 글 재미없다. 하물며 읽는 사람들이야 오죽 했을까. 독자는 냉정하니까, 재미없다면 걍 재미없는 거다.

내 글 나도 재미없다

김슷캇이 내민 ‘음모’에 손을 잡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이른바 ‘20대 논객(필자)’ 내지는 ‘20대 저자’라는 캐릭터가 얼마나 좁은 지형에서 맴돌고 있는지 말이다. ‘20대 논객’ 프레임은 책 『88만원세대』의 히트와 청년실업 이슈에서 튀어나왔다고 본다.

이 프레임은 기존 진보언론이 386세대 혹은 운동권의 전유물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열린 공간이라는 걸 어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안목도 예리하고 글도 제법 잘 쓰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한 때, 어떤 사람은 신문사 논설위원으로부터 ‘사나이’ 소리도 듣고, 다른 사람은 뉴라이트를 학술자료로 공박하는 에세이를 써서 주목받기도 했다. 정치적인 이슈에 집중적으로 파고들고, 논쟁의 한가운데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20대 논객’의 이미지 메이킹이다. 한 마디로, ‘발칙한 것들’이다.

이 ‘발칙한 것들’이 자신에게는 발칙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어르신들’의 속마음일 게다. 김슷캇이 지적하는 바가 바로 그거다. ‘20대 논객(저자)’ 프레임이 정작 젊은 글쟁이 혹은 활동가들에게 해로운 것도 그 때문이다.

“너의 적에게는 발칙하되 나에게는 발칙하지 말라.” 이게 어르신들의 십계명이다. 우석훈은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에서 지금 20대와 대학생을 일컬어 “저기 신자유주의의 자식이 걸어간다.”고 했다. 딱히 딴지도 안 걸고 고분고분하게 자본의 이해에 충실하다면서.

또 한편으로는 애들이 너무 물러터지고 착해졌다고 한탄하는데, 우석훈의 말을 진보진영 안으로 비추면 곧 ‘어르신들’의 욕망이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와 권위주의는 부딪히는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일치한다.

어르신들의 욕망

결국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움직이길 바라기로는 좌파나 우파나 매한가지란 이야기다. 이것도 일종의 허수아비치기일까? 한편으로 글 쓰는 나 역시 이런 ‘검열’이 작용하고 있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이 기획의 콘셉트가 무엇인지, 어떤 소재로 써야 하는지, 독자는 누구인지를 생각하는 게 단순히 테크닉이 아닌 이유다. 요컨대 ‘자유’다.

학생운동을 둘러싼 해묵은 논란을 새삼 떠오르게 했던 며칠 전의 논쟁으로 돌아가 보자. 조병훈과 홍명교는 각각 ‘운동권’과 ‘자유주의자’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여기에 양승훈은 20대와 학생운동 전반에 깔린 ‘돈’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나는 학생운동을 둘러싼 논쟁도 마찬가지로 ‘자유’가 핵심이었다고 본다. 우리 사회는 IMF 구제금융기를 지나면서 “오직 돈만이 자유를 보장한다.”는 관념이 확실하게 힘을 얻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척 당연시되는 발상이고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돈에 대한 관념이 질적으로 달라졌다. 내 몸이 바로 돈이 되고 계발을 통해 ‘진보’가 가능하다는 관념으로 발전(?)한 것이다. ‘배운 사람들의 집단’인 대학 사회는 이런 관념이 최적화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학생들은 더 많은 ‘자유’를 찾아 토익을 공부하고 공모전을 준비하며 빠르게 운동권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이 과정에서 학생운동 구성원들은 저항했지만, 학생들의 몸에 새겨지는 ‘자유의 정치’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그나마 학생운동의 공동체들이 ‘신자유주의의 신체’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도망쳐 온 사람들에 대한 ‘도피성’으로 존재했다. NL학생운동 단체를 주사파라고 비난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일종의 도피성이자 개인을 지켜주는 네트워크로서는 오히려 제 기능을 했는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와 권위주의의 공존

한 마디로, 학생운동과 진보세력이 ‘자유의 공동체’를 만드는 데 얼마나 무력했는가, 하는 이야기다. 그 결과가 각개약진 하는 대학생 개인이고, ‘발칙한 것들’을 용납 못하는 운동사회 아닐까? 또, ‘20대 논객’ 프레임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신자유주의를 비판하지만 신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완전히 거리를 두지 못하고, 권위주의와 싸우지만 권위주의적인 공간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하는 딜레마 안에서 말이다. 신자유주의와 권위주의가 교묘하게 얽혀 공존하는 이 독특한 풍토 속에서 진보진영 안에서도 과연 권위주의적인 신자유주의자 혹은 신자유주의적인 권위주의자가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내 안의 이명박’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2010년 지금 시점에서 문제는 ‘운동권’이냐 ‘자유주의자’냐 하는 게 아니다. 젊은 사람들이 ‘어떤 자유’를 온 몸으로 발휘할 것이냐다. 어떻게 해야 내 자유를 팔지 않고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느냐다. 그 점에서 ‘88만원 세대’니 ‘20대 논객’이니 ‘당사자 운동’이니 하는 ‘상징’을 이제는 거둬야 한다.

"내게는 개드립을 할 자유가 있다.” 이게 김슷캇 개드립의 실체(?)인지도 모른다. 좋다. 나도 개드립을 던져야겠다. 단지,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 한 가지가 있다. 개드립을 던진 결과, 나의 자유를 선언하는 결과, 내가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일까? 여기서 누가 “안 죽어, 쫄지 마!” 라고 말하겠지만, 글쎄, 이젠 그 말도 좀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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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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