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용운, 님을 향한 사랑의 노래
        2010년 07월 09일 03:4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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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가는 길

    한용운(1879년~1944년)은 <서백리아(西伯利亞) 거쳐 서울로>라는 글에서 자신의 서울 상경기를 썼다. 그가 고향인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성)를 떠나 서울로 향한 것은 18살 때였다. 그가 고향을 떠난 이유는 세상 일 때문이라고 했다.

    "서울에서는 무슨 조약이 체결되었다 하여 뜻있는 지방 사람들이 자꾸 서울로 향하여" 떠난 게 상경을 결심한 배경이었다. 교통 및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때였지만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워낙 큰일들인지라 소문이 바람을 타고 시골 곳곳 전국 방방곡곡에 퍼졌다. 한학을 공부하고 있던 시골 청년 한용운도 이 소문을 듣고, "지금 이렇게 산골에 파묻혀 있을 때가 아니구나!" 생각하여 무작정 상경을 단행하였다.

       
      ▲ 한용운(1879년~1944년)

    한용운은 서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서북쪽으로 든 길만 찾아가면 만호 장안이 나오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만으로 떠났다. 노자 돈도 없어 무턱대고 걷다보니 너무 피곤하여 길가의 작은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는데, 이 때 청년 한용운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는 것이라곤 한학밖에 없는데 어찌 큰일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일자, 그는 자신의 무작정 상경이 매우 무모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9살 때 읽은 <서상기>를 떠올리며 인생에 대해 생각하던 끝에, "에라 인생이란 무엇인지 그것부터 알고 일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한용운은 그 길로 강원도에 있는 백담사를 찾아갔다. 그래서 중이 되어 수도 생활을 시작하는데, 몇 년간 승방에 앉아 수도를 하여도 인생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 또 다시 번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마침 <영환지략>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고, 그 책을 통해 조선 이외에도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간단한 짐을 싸서 원산을 거쳐 서백리아(시베리아)로 갔다. 그곳에서 몇 년을 머무르다가 귀국하여 안변 석왕사에 들어가 다시 수도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동양문명은 도쿄(동경)에 모두 모이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도쿄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도쿄로 가는 길에 서울을 들르게 되었다. 그게 30살 때이니, 무작정 상경을 단행한 지 12년만이었다.

    한용운의 서울 상경기는 그의 번민과 방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그는 한학을 공부하던 시골 소년에서 민족운동가로, 민중불교운동가로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사랑받는 민족 시인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서울 상경기가 발표되는 것임을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인생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이어서인지 모르나 하나의 경력을 누락시켰다. 동학에 가담했던 일이다. 그는 동학에 가담하여 민란에 참여하였고, 홍주홍방을 습격하여 1천 냥의 군자금을 확보하는 등 활약을 하였다.

    불교란 무엇인가

    한용운은 끊임없이 시대와 맞서고 자기 부정을 통한 거듭남을 계속하는 삶을 살았다. 개화문명을 하자며 일본을 배우고 서양문명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이 횡행할 때, 그는 서양과 일본을 배척하자는 동학운동에 가담하였다.

    신문명, 신문화, 신교육을 배우자며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으로 몰려갈 때, 그는 산 속 절을 찾아가 중이 되었다. 동학에 가담했으면서도 동학이 이미 그 운수가 다 했다며 비판한 불교에 귀의하였던 것이다.

    산 속에서 세상으로 다시 나왔을 때, 그는 이번에는 불교가 요구하는 수행을 버렸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사회 활동에 전심전력하였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번민이 개인의 해탈을 넘어 민족과 백성이 처한 현실과 삶에 대한 깊은 각성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한용운의 철학은 <조선불교유신론>에 집약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조선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썼다.

    학술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정치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종교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그 밖에도 각 방면에서 유신을 부르짖는 소리가 천하에 가득하여, 이미 유신을 했거나 지금 유신을 하고 있거나 장차 유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도록 많은데, 유독 조선의 불교에서는 유신의 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으니 모르겠구나. – <조선불교유신론>

    그는 조선 불교 내 유신의 목소리가 없는 건 바로 자기 자신부터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부터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자 불교 유신을 주장한다고 하였다.

    그는 "금후의 세계는 진보를 그치지 않아서 진정한 문명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고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을 추세"에 있다고 하였다. 이런 흐름에 불교가 적합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불교의 미래가 달려 있다. 즉 불교가 종교로서 우수하냐 그렇지 않으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인류 문명에 기여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 그는 불교를 종교적 성질과 철학적 성질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종교로서 불교의 성질은 미신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라 하였다. 예수교의 천당, 유대교가 받드는 신, 이슬람교의 영생 등은 무형의 세계를 만들어놓고 중생들에게 믿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것들은 존재 여부를 따지지 않고 백성들을 무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미신이라 하였다.

    참다운 불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받드는 미신을 배격하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는 "불교는 지혜를 믿는 종교요, 미신의 종교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그는 철학으로서 불교의 성질에 대해 보편적인 이치를 샅샅이 캐내어 모르는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이라 하였다. 그것은 철학자들의 공통된 궁극목표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의 양계초, 독일의 칸트, 영국의 베이컨, 프랑스의 데카르트의 철학을 불경과 비교하여 검토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철학자들이 개별적인 자아를 언급하는데 그쳤다고 지적하였다. 반면에 부처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진정한 자아와 각자가 개별적으로 지닌 진정한 자아에 대해 미흡함 없이 언급"하였다고 하였다.

    한용운에게 있어 불교는 개별적인 즉 개인의 자아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자아 즉 우주 만물의 이치를 찾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불교는 세계의 진보 과정에서 의미가 없는 것이 될 뿐이다.

    산 속에서 거리로

    불교는 어떤 주의(主義)를 주장하는가. 한용운은 불교의 주의를 크게 둘로 나누어 평등주의와 구세주의라고 하였다. 그는 평등주의는 불평등에 반대되는 주의라고 하면서, 평등과 불평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평등한 견지에서 바라보면 무엇 하나 불평등하지 않음이 없고, 평등한 견지에서 바라보면 무엇 하나 평등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불평등한 견지란 무엇인가. 사물, 현상이 이르는 바 필연의 법칙에 제한받음을 이름이다. 평등한 경지란 무엇인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얽매임이 없는 자유로운 진리를 이름이다. – <조선불교유신론>

    한용운이 말한 평등주의는 현상의 필연의 법칙을 뛰어넘는 참된 진리이다. 현상은 필연의 법칙에 제약을 받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것들에 얽매이다 보면 마치 불평등한 것이 진리인 양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된다.

    평등은 진리이다. 그것은 "몸과 마음이 필경 평등하여 여러 중생과 같고 다름이 없음을 알라"는 것이다. 그는 평등의 정신이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서만 작용하는 게 아니라, 모든 동식물과 모든 사물에까지 작용하는 것이라 하였다.

    다음으로 구세주의(救世主義)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기주의의 반대 개념이라 하였다. 자기 한 몸의 해탈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구제가 부처의 가르침이자 불교의 핵심 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질타하였다.

    요즘 참선하는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옛사람들은 그 마음을 고요하게 가졌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고 있다. 옛사람들은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면 염세(厭世)가 되는 것뿐이며, 그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독선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다. 불교는 구세(救世)의 가르침이요 중생제도의 가르침인 터에, 부처님의 제자 된 사람으로서 염세와 독선에 빠져 있을 따름이라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 <조선불교유신론>

    깊은 산 속에서 가만히 앉아 참선을 한다하여 얻는 것은 염세와 독선뿐이다. 그래서 한용운은 ‘산 속에서 거리로’, ‘승려로서 대중에’가 조선 불교의 슬로건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이 구세주의의 실현인 것이다. 원효가 제창한 대중 불교가 한용운에 이르러 다시 부활한 것이었다.

    나 자신부터

    한용운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그가 지향했던 불교운동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재래의 불교는 권력자와 합하여 망하였으며, 부호(富豪)와 합하여 망하였다. 원래 불교는 계급에 반항하여 평등의 진리를 선양한 것이 아닌가. 이것이 권력과 합하여 그 생명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원래 불교는 소유욕을 부인하고 우주적 생명을 취함으로써 골자를 삼지 아니 하였는가. 부호와 합하여 안일에, 탐욕에 그 생명의 태반을 잃었도다

    이제 불교가 실로 진흥하고자 할진대 권력계급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민중의 신앙에 세워야 할지며, 진실로 그 본래의 생명을 회복하고자 할진대 재산을 탐하지 말고 이 재산으로써 민중을 위하여 법을 넓히고 도(道)를 전하는 실수단(實手段)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 <불교유신회>

    평등주의, 구세주의의 귀결점은 대중 불교, 민중불교의 실천이다. 그것은 권력과 금력과 영합하여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불교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일이었다. 또한 사찰 중심, 승려 중심이 되어 대중과 격리되고 고립을 자초했던 불교를 일대 개혁하는 일이었다.

    한용운은 산 속에서 길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승려로서 대중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할 일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어느 때라고 일할 만한 때 아님이 없을 것이며, 일 안하는 사람에게는 어느 때라고 일할 만하지 못한 때가 아님이 없을 터이다. 그러므로 뜻이 있는 사람은 오직 시대의 대세를 만들 뿐이며, 세상 돌아가기를 기다린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 <조선불교유신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뛰어들어 시대의 대세를 만들어가자는 얘기이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불교 개혁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의 강점으로 식민지화한 조국의 현실에 온 몸으로 저항하는 것 역시 그의 일이었다.

    불교 개혁이 승려로서 자기 자신부터 책임을 다 해야 하는 일이라면, 독립운동은 민족의 일원으로서 자기 자신부터 책임을 다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불교 개혁운동, 민중불교운동과 민족 독립운동은 한용운에게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3.1 독립선언문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나자 불교계를 대표하여 맹렬한 활동을 하였다. 3.1운동 후 체포된 그는 일본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조선독립의 서(書)>를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일본의 야만적 침략을 폭로하고, 이러한 침략을 자행하는 군국주의는 필연적으로 몰락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군국주의를 패퇴시키는 힘은 국민에게 있음을 지적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것을 예로 들었다. 독일의 패배는 "독일 카이저의 패배가 아니라 군국주의의 패배요, 연합국의 승리가 아니라 독일 국민의 승리"라고 하였다.

    한용운은 강대국에 호소하여 독립을 얻어 보려는 이른바 외교론의 기만성을 강력하게 규탄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준비론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독립이 모든 물질적 조건이 갖추어진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일체 부정하였다. 독립은 자존의 기운과 정신적 준비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조선 독립의 서>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일본인은 말끝마다 조선에는 물질문명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조선인을 어리석게 하고 야비케 하려는 학정과 열등교육을 폐지하지 않으면 문명의 실현을 보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독립할 만한 물질적 준비를 갖춘 다음에야 독립을 하자는 것은 아예 독립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는 힘주어 강조하였다. 독립은 누가 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국가라고 선언하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

    한용운의 사상은 불교에서 나왔다.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사색 속에서 그의 철학은 형성되었다. 그것은 신채호가 말한 것처럼 ‘석가의 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석가’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불교에 머무르지 않았다. ‘산 속에서 길거리로’ 나왔듯이, 그의 철학은 민족의 현실에 맞서 싸우는 무기가 되었다.

    자아의 발견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 나라의 자아는 죽었다. 침묵이 강요되었고, 개인의 자아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것은 ‘불평등한’ 현실이었다. 이런 불평등을 마치 진리인 양 받아들이는 것은 거짓된 현상에 매몰되는 것일 뿐이었다. 참된 진리를 찾아야 했다. 그래야 죽은 자아를 되살릴 수 있다.

    한용운은 ‘님’을 노래했다. 그는 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님’만이 님이 아니라 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꽃의 님은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탈리아이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더냐? 너에게도 님은 있더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들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그리워서 이 시를 쓴다. – <군말>

    님만이 님이 아니라 그리운 것은 모두 님이라 했다. 누구에게나 님은 있다. 우리에게도 님은 있다. 그런데 혹시 그 님은 우리들의 그림자가 아닐까.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대로 움직여 주기를 바라는 그런 님이 아닐까. 그것은 진정한 님이 아니다. 님은 자유이기에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아야 한다.

    한용운은 ‘해 저문 들판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을 자신의 님이라 했다. 그들은 삶의 방향을 잃고,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님의 노래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는 오히려 그들에게서 희망을 보았고, 그 희망을 그들에게 불어넣고자 하였다. 그는 <님의 침묵>에서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라고 노래했다. 나는 님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그 희망이란 님을 통해 평등이라는 참된 진리를 찾고 자아를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그것이 그를 강고한 민족운동가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였다.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대부분이 변절하였다.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벌이는 자가 있는가 하면, 독립 청원을 하자며 민족의 현실을 왜곡, 호도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한용운은 단호하게 그들을 비판하고 자기의 길을 갔다.

    님은 갔지만 없어진 것이 아니다. 단지 님은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님의 침묵은 언젠가는 자기 자신의 말을 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주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님은 자아를 상실한 채 침묵하고 있다. 그래서 님을 향한 한용운의 사랑 노래는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고 있다. 우리 역시 그 사랑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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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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