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By 나난
        2010년 07월 09일 11: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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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의 노동자>는 안치환의 곡으로, 90년 영화 [파업전야]를 통해 대중들에게 발표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투쟁가요들이 김호철의 창작곡이었던 상황에서 영화의 인기를 타고 노동자대중들에게 확산되기 시작하여 95년 노동가요에 대한 인식과 인기도 설문조사를 통해 <단결투쟁가>와 함께 가장 많이 불린 노동가요 1위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가수 안치환은 연세대학교 중앙노래패 ‘울림터’ 출신으로 노래모임 새벽을 거쳐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가수겸 창작자로 활동을 하다가 90년 솔로로 독립을 했습니다. 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대학가요제 출전이 목표였던 안치환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울림터’ 선배의 노래실력에 반해 민중가요 서클에 가입하고 학생운동을 접하게 됩니다.

    초기 진달래 가요제, 무악가요제 등에서 창작곡으로 참가하기도 하면서 대학 내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러다 86년 구속된 선배를 생각하며 당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노동자 시인 고 박영근의 시를 개작하여 <솔아 푸르른 솔아>를 창작하면서 작곡가로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제주 4.3 항쟁을 노래한 <잠들지 않은 남도>, 이한열 열사 추모가인 <이한열 추모가>와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하게 됩니다. <솔아 푸르른 솔아>는 87년 총학생회장 선거 때 우상호 후보 진영의 참모 한 명이 유세 때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하면서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고, 80년대 후반 ‘노래를찾는사람들’ 음반에 수록되어 더 많은 대중들에게 불리게 됩니다.

    <철의 노동자>를 <전대협 진군가>로 착각

    안치환은 ‘노래를찾는사람들’에서 활동을 하면서 김수영 시에 곡을 붙인 <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여 ‘제2의 김민기’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철의 노동자>는 파업전야의 삽입곡을 제안 받고 영화 스토리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제철 공장을 견학한 후에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당시 <파업전야>는 80년대의 아주 열악한 노동조건,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의 위장취업, 노조 결성, 해고, 구사대 등장과 같은 현실을 반영한 영화로 영화의 내용이 파업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었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법으로 순회상영을 했습니다.

    대학 상영회 때조차도 공권력이 들어와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기도 했고, 장소를 옮겨 상영하는 등 악조건 속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는 전대협이 결성되어 학생운동의 전국적 조직도 결성되었고, 윤민석의 <전대협 진군가>가 학생운동진영의 최고의 인기곡이었는데, 영화를 보던 학생들이 <철의 노동자>가 흘러나오는 장면에서 <전대협 진군가>로 착각을 하고 모두 일어나 함께 불렀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곡 전체적으로 코드진행이 매우 유사하고, 후렴 시작 부분과 클라이맥스의 멜로디 진행이 거의 흡사해서 생긴 현상이기도 합니다. 물론 안치환은 이미 학생운동권이 아니었고, <전대협 진군가>를 모르는 상황에서 작곡을 했다고 하지요.

    제도권 진입 성공한 김광석, 안치환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전문노래패들이 아주 많긴 했지만 전문노래패라고 해서 음악활동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습니다. 전업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이었지요. 그래서 각자 창작을 하지만 꼭 누구의 노래라는 개념은 별로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전문노래패들은 노동가요를 보급하는 것이 더 큰 사명이라고 여겼으니까요.

    먹고 사는 문제 역시도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각자 집에 있는 자기 악기들을 가져와서 창작과 공연을 했고, 공연비를 받으면 그 돈을 모아서 악기를 사거나 연습실을 마련하기도 하고, 주머니를 털어 공간을 내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지하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공연하고, 지방에 갔다가 밤늦게 올라오면 택시비를 아끼느라 연습실에서 술을 먹고 밤을 샜고 그저 끼니는 라면으로 때우기 일쑤였습니다.

    제가 있던 단체에서는 제가 가수겸, 기획자 겸, 총무였는데 (그 당시엔 모두 몇 가지 일을 겸했고, 활동가라면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나름 숫자 개념이 있었던 터라 활동비 개념을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매일 연습비 500원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첫날 500원씩을 받고 다들 일당 받았다고 하늘에라도 오를 듯이 기뻐하며 그 돈으로 술을 먹던 생각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 후에 월급제를 도입해서 기본급 10만 원에 3~5만원의 공연수당과 강습수당을 책정해 받기 시작했고, 파업과 대학 행사가 많은 3월~5월에는 어떤 단원은 50만 원 이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경제적인 부분 뿐 아니라 음악활동에서도 전문성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노동가요나 민중가요를 알려내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노래를찾는사람들’ 출신의 가수 고 김광석 선배가 솔로로 제도권 진출에 성공을 했고, 그에 힘입어 안치환도 솔로 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하지만 <철의 노동자>는 안치환의 노래보다는 노동자들의 집회 현장에서 훨씬 많이 불렸습니다. 아마도 가사 중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아아 민주노조 우리의 사랑, 투쟁으로 이룬사랑’ 하는 이 부분이 정말 노동자들의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나이가 5,60대인 노동자들이 얼마나 더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노동조합을 결성했을 것이며, 무자비한 폭력적 탄압을 감수했을까요, 그야말로 비록 단 하루를 살더라도 정말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어서 아니었을까요? <철의 노동자>는 바로 그런 면에서 많은 노동자들의 공감을 얻었고, 80년대 민중가요 중 최고의 명곡으로 꼽히고, 최고의 인기곡이었던 <단결투쟁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철의 노동자>  

    안치환 글, 곡

    민주노조 깃발아래 와서 모여 뭉치세 빼앗긴 우리 피땀을 투쟁으로 되찾으세
    강철 같은 해방의지 와서 모여 지키세 투쟁 속에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껴보세
    단결만이 살길이요, 노동자가 살길이요.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아~ 민주노조 우리의 사랑. 투쟁으로 이룬 사랑 단결투쟁 우리의 무기
    너와 나, 너와 나 철의 노동자

    * 음원 : 전노협 제작, 전노협 노래모음 1집 [철의 노동자] 중 노동자노래단, 예울림의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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