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세계대전 ‘예방’과 ‘확전’의 경계에 서다
        2010년 07월 08일 03: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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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라인’을 발표를 통해 한국을 극동방어 전선에서 제외시킨 미국은 그 해 6월 25일 북한이 기습적이고도 전면적인 남침을 가하자 신속한 개입을 선택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즉각 유엔 안보리를 소집해 북한의 남침을 “평화의 파괴”로 규정했고 6월 27일에는 대통령 담화를 통해 남한 방어를 위해 미군을 투입하고 중국의 대만 공격을 억제하기 위해 대만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미국이 신속한 개입을 천명한 데에는 트루먼이 밝힌 공식적인 이유, 즉 “공산군의 침공은 유엔 헌장의 위반이자 국제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도발”이라는 이유 외에도 미국 내부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미국 공화당은 애치슨 라인 발표를 전후해 트루먼 행정부가 중국의 공산화를 방치했고,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 나약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이러한 공화당의 안보 공세는 매카시즘 광풍과 맞물려 트루먼 행정부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 미국 제33대 트루먼 대통령

    트루먼에게 북한의 남침은 이러한 정치 공세를 무마할 수 있는 기회였고, “트루먼은 그 기회를 잡았다.” 이를 반증하듯, 트루먼이 신속한 개입 의지를 발표하자 그의 지지율도 크게 올랐다.

    “한국전쟁은 예방 전쟁”

    미국이 신속한 개입을 선택한 전략적 배경에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지도부가 이 전쟁을 3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으로 간주했던 이유가 자리잡고 있다. 트루먼은 “우리 세대에 강자가 약자를 공격한 것은 한국전쟁이 처음은 아니었다. 나는 만주, 에티오피아, 오스트리아 등 이전의 몇 가지 사례를 떠올렸다. 공산주의자들은 10년, 15년, 20년 전에 히틀러, 무솔리니,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반도에서 행동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세계의 반격 없이 한국에서 자신의 뜻을 강제하는 것을 좌시할 경우, 어떤 작은 나라들도 공산국가들의 위협과 도발에 저항할 용기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라며, 한국전쟁을 방치할 경우 “2차 대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애치슨 국무장관도 “우리는 진짜 적인 소련이 뒤에 숨어 있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했고,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한국전쟁은 3차 세계대전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한 예방적 제한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당시 미국이 신속한 개입을 선택한 배경에는 자유 진영의 강력한 반격이 없으면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강하게 깔려 있었다.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이 유엔군의 깃발 아래 참전을 결정한 것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강렬한 트라우마”가 반영된 것이었다.

    이러한 시각을 반영하듯 북한의 남침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전지구적으로’ 나타났다. 유엔을 통한 한국전의 신속한 개입과 함께, 대만해협에 제7함대를 급파해 대만 방어에 나섰다. 또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공산주의자와 맞서고 있던 프랑스에 대한 지원에 착수해, 훗날 베트남 전쟁 개입의 씨앗을 뿌리고 말았다.

    미일관계 재조정에도 박차를 가했다. 2차 대전 당시 동맹국이었고 대일전에도 참여했던 소련을 제외시키고 평화조약을 체결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소련을 제외한 48개국의 연합국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51년 9월 8일 조인, 52년 4월 8일 발효)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을 통해 미국은 일본을 동아시아 반공전선의 기축으로 삼았다.

    반면 연합국의 일원으로 포함되지 않은 소련은 2010년 7월 현재까지도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못한 상황이고, 한국 역시 대일 청구권과 독도 문제로 일본과 갈등을 빚고 있다.

    북한의 남침 배후에 소련이 있다고 확신한 트루먼은 나토 강화와 독일 재무장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를 반영하듯 한국전쟁 직전 나토 회원국들 전체의 군사비는 GDP 대비 5.5%였지만, 전쟁 직후에는 12%까지 치솟았다.

    무엇보다도 트루먼은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4월에 행정부 내 강경파들이 작성·권고한 NSC-68를 승인했다. NSC-68은 단순히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는 수준이 아니라 전세계의 공산주의 봉쇄와 소련과의 일전을 겨냥한 대규모의 군비증강 프로그램이었다.

    <AP> 통신의 지적처럼, 한국전쟁은 “한반도의 지속적인 위기를 가져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영원히 지구적 군사 패권 국가를 지향하게 만든 전쟁”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초기 미국의 핵 공격 계획

    미국의 신속한 참전 배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핵 우위에 대한 자신감이다. 비록 재래식 군비 감축으로 미국의 재래식 군사력이 약화되었고 소련의 핵실험으로 미국의 핵 독점이 무너졌지만, 트루먼은 핵 우위를 통해 한국전쟁 참전에 따른 전략적 위협에 대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구적 지정학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전 개입을 선택한 미국의 가장 큰 우려 사항은 소련의 유럽 침공 가능성이었다. 이러한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트루먼은 한국전쟁 개입 직후 영국에 원자탄 탑재가 가능한 전략 폭격기를 배치했다. 한국전 개입으로 발생할 수 있던 유럽에서의 재래식 군사력의 공백을 핵무기로 메우기로 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핵 전문가들인 알페로비츠(Gar Alperovitz)와 버드(Kai Bird)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원자폭탄은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 참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미국이 핵무기가 없었다면, (한국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면서도) 유럽 방어가 동시에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핵 우위를 자신한 트루먼 행정부는 전쟁 초기부터 소련과 중국의 개입을 억제하고 북한군의 총공세로 불리해진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남침 소식이 전해진 6월 25일 일요일 저녁, 트루먼은 반덴버그(Hoyt S. Vandenberg) 공군참모총장에게 미국 전폭기가 한반도 인근의 소련 기지를 쓸어버릴 수 있는지 물었다. 반덴버그는 핵무기를 사용하면 가능할 것이라고 답변했고, 이에 트루먼은 소련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 핵공격을 단행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개전 초기 유엔군이 북한군에 의해 패퇴를 거듭하면서 트루먼 행정부는 크게 당황했다.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는 것 자체도 버거워진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미국의 핵공격 계획은 소련에 맞춰져 있었다. 한반도와 같이 작고 대규모의 군사 및 산업 시설이 없는 지역에 핵무기를 투하한다는 것은 그만큼 낯선 일이었다.

       
      ▲ 아이젠하워

    이에 따라 한국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의 핵 공격 계획은 북한보다는 소련의 개입 억제 및 개입시 보복에 맞춰졌다. 이러한 정책에 강한 불만을 토로한 사람이 바로 아이젠하워였다. 한국전쟁 개전 당시 나토 총사령관에 있었던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 초기에 트루먼 행정부의 우유부단함을 비난하면서 사임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며, “나는 여러 차례에 걸쳐 그것이 결국 원자폭탄의 사용에 의존하더라도 단호한 행동을 요구했었다”고 말했다. 리지웨이 역시 아이젠하워가 트루먼의 전쟁 수행 방식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적절한 목표물이 있다면, 한반도에서 1~2개의 핵무기 사용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트루먼보다 훨씬 공세적인 핵 공격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한편 맥아더는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자마자, 리지웨이에게 긴급전문을 보내 원자폭탄 사용 권한을 자신에게 위임해달라고 청원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구상이 있었다.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한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에는 터널과 다리가 많이 있다. 이곳이야말로 차단공격을 가하기 위해 핵폭탄을 사용할 둘도 없는 곳이다.”

    맥아더의 청원을 접한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7월 중순 일본 도쿄를 방문해 맥아더와 핵무기 사용에 관한 협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중국군의 개입을 사전에 저지하기 위해서는 원폭 투하가 필요하다며, B-29 전폭기의 운용 권한을 자신에게 위임해주면 그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공언했다.

    당시 맥아더는 북한에 대규모의 공습을 가하는 한편, “적의 주요 축선을 방사능 물질로 만들어 한반도를 만주와 분리시키겠다”는 작전 계획을 설명했다. 이를 통해 “최대 10일 안에 승리”할 수 있고, 중국군의 개입 저지는 물론이고 미국이 중국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것도 전달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훗날 북중 국경 지역을 방사능으로 오염시키기 전에, 북한에 “30~50개의 원자폭탄 투하를 희망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핵무기는 대통령의 무기”

    반덴버그는 맥아더의 요청에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지만, 워싱턴에 돌아간 이후 신중론에 직면했다. 미국의 원폭 투하가 동맹국들로 하여금 미국에 등을 돌리게 만들고,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것이다.

    또한 트루먼은 “핵무기는 대통령의 무기”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에 따라 트루먼은 ‘절충’을 선택했다. 10기의 B-29 전폭기를 괌에 파견하는 것을 승인하면서도 핵 폭발장치가 ‘제거된’ 폭탄을 탑재하게 함으로써 핵 사용의 최종 권한을 자신에게 담겨둔 것이다.

    이는 대외적으로 미국의 단호함을 과시해 중국이나 소련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극비에 해당하는 전폭기 파견 정보를 <뉴욕타임즈>에 흘려 “적들에게도 알렸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때 동원된 바 있는 B-29를 통한 ‘강압 외교’는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을 염두에 두고 8월 들어 동북아에 자국군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무력시위’를 통해 중국군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괌에 파견되었던 B-29 전폭기들도 이렇다 할 소득 없이 8월말에 미국 본토로 돌아왔다.

    당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자 미국과 핵정책을 공유했던 영국 정부도 신중론을 폈다. 영국은 동북아에 핵 전폭기를 배치하는 것은 소련을 자극해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전달했다.

    그러자 트루먼은 동북아에 앞서 7월 11일 B-29 전폭기를 영국에 배치했다. 이는 미영동맹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과시한 것이자, 영국의 우려와 공화당의 공세를 동시에 달래고자 하는 성격이 짙었다. 동시에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보다 유럽 방어에 압도적인 중요성을 부과한 미국의 전략적 판단도 깔려 있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영국 배치에 이어 괌에도 전폭기 배치에 착수했다. 개전 초기 미국은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 한반도나 그 인근에 원자 폭탄을 투하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내부적으로 의견이 갈려 있었다.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즉각적인 사용이 필요하다는 강경론을 펴고 있었지만, 미국 군부와 행정부는 보다 신중한 입장이었다. 대체로 국무부는 소련이나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할 경우 원폭 투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군부의 지배적인 의견은 유엔군이 북한군에 의해 한반도에서 축출될 상황에 직면하면 핵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압 외교’의 수단이든, 전세를 역전시킬 ‘절대 무기’이든 원자폭탄을 한국전쟁에 이용하기로 한 트루먼은 8월 1일 “즉각적인 핵공격 명령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제9 전폭비행단을 괌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 명령에 따라 10기의 B29 전폭기가 미국 본토에서 괌으로 출발했고 이 가운데 1기는 샌프란시스코 인근 공군기지에서 이륙 중에 추락해 수십 명이 사망하고 기지 일대를 방사능으로 오염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배치된 전폭기에는 핵폭발 장치가 제거된 원자폭탄이 실려 있었다. “핵무기는 대통령의 무기”라는 인식이 강했던 트루먼은 핵 사용의 최종 권한을 자신에게 남겨두고자 했던 것이다.

    미국이 원자탄 투하를 검토할 정도로 절망적이었던 전세는 9월 중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맥아더가 주도한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두고 곧바로 서울을 수복하면서 전세를 역전시킨 것이다. 자연스럽게 핵 공격론도 수그러들었다. 이를 상징하듯 열렬한 핵 공격론자였던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만큼, 핵무기 사용 결정을 유보해달라는 여유를 부리게 된다.

    그러면서 중국군은 절대로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며, 38선 이북으로의 진군을 강행했다. “냉전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이 결정은 중국군의 개입을 야기하면서 “트루먼 대통령이 임기 중에 내린 가장 재앙적인 결정”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맥아더가 말한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한 미국은 핵 공격을 더욱 심각하게 고려하게 된다. 3차 세계대전을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개입한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문을 노크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요 참고 자료

    윌리엄 스툭 지음, 김남균 외 옮김, 『한국전쟁의 국제사』 (푸른역사, 2001년),
    브루스 커밍스 지음·김동노 등 옮김, 『한국현대사』(창비, 2003),
    Gar Alperovitz and Kai Bird, “The Centrality of the Bomb,” Foreign Policy. Spring 1994.
    Paul G. Peirpaoli, Truman and Korea(Missouri Publishers, 1999),
    Roger Dingman, "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 International Security (Winter, 1988-1989),
    Trent A. Pickering, “A Nuclear Dilemma-Korean War Deja Vu," U.S. Army War College March 2006

    인용한 미국의 비밀해제문서 사이트: http://www.gwu.edu/~nsarchiv/
     

    *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 이 연재는 정욱식의 블로그 ‘뚜벅뚜벅’에서도 함께 진행됩니다.(http://blog.ohmynews.com/wooksik) 최근에 쓴 책으로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가 있습니다. 다음에 이어질 글은 ‘영국 총리가 워싱턴으로 날아간 까닭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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