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반성이 '학생운동 위기' 지속시킨다
    2010년 07월 06일 10: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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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병훈씨의 “왜 진보신당에 입당 안해?”라는 글에 대한 비판이다. 학생운동의 몰락에 대한 조병훈씨의 해석은 그의 정치적 ‘당파성’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지만, 일종의 협소한 ‘정파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사실 조병훈씨와 동일한 견해를 갖는 입장은 꽤 많이 접했지만 열에 아홉은 항상 진보신당 당원들이었거나, 스스로를 ‘자유로운 개인’으로 규정하는 것에 나름의 자부심을 갖는 것처럼 보였다.

4년 전인 스물네 살까지도 나는 어떤 학생운동 단위에서 활동했지만 저와 같은 입장을 대할 때마다, 그들이 스스로 ‘20대 일반’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들 역시 하나의 정파성을 띤 ‘그룹’으로 드러날 뿐이라고 생각했다. 본래 정치-행위란 ‘입장’을 중심으로 발현되고 밝혀지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그룹’은 표면적이건 표면 아래에서이건 생성될 수밖에 없다.

‘일반’을 대변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그룹’이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실체 없는 유령을 자꾸 끌어들이게 되는데, 그건 다름 아닌, ‘기존 운동권’이다. 사실 이런 실체 없는 대상을 놓고 뭔가를 이야기한다는 건 굉장히 넌센스한 일이다. 아주 한동안 소위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이 실체 없는 대상을 반대급부 삼아 재미를 보아왔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까?

오늘날 조병훈씨가 ‘부정적인 것’으로서 호명하고 싶어하는 ‘대상’으로서의 ‘기존 운동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전국적인 규모에서 움직이는 안에서의 일군의 민족주의 학생운동 진영과 소수의 알튀세르주의의 이론적 논거틀에 친화적인 좌파학생운동 그룹, 진보신당보다는 좀 더 조직적인 사회당의 학생단위, 그리고 동아리 수준에 머무르는 여타의 수많은 그룹들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까 조병훈씨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호명하며 부당대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안이한 인식인가. 오히려 조병훈씨야말로 홀로 2000년대 초반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학생정치조직을 만들어 학생운동을 전개하려는 그룹들은 더 이상 90년대 후반 한총련 해소 논쟁을 경과하던 시기처럼 ‘학생운동 위기’ 담론을 나누지 않는다. 때로는 자조적으로, 때로는 자책하며, 또 한편으로는 암울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더불어 소위 “학생운동 위기”담론은 그 위기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간동안 지속된 바 있다. 그러나 더 이상 ‘학생운동 위기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두고 이야기를 꺼낸 글에 대해 굳이 반박해야할까 나는 무수히 고민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위기’란 뭔가 활발했던 시기를 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선언이지만, 이제 더 이상 그들은 학생사회에 존재하지도 않고, 따라서 지금은 ‘위기’라는 이름으로 명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우리는 근간에 학생운동 그룹들이 소위 진보진영, 시민사회, 진보학계의 담론과 함께 어우러져 고민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그런데 참 황당한 것은 대체 10년 전 이야기를 왜 여기서 하는 것인가. 2001년쯤에 나왔을 법한 글을 말이다.

10년쯤 때늦은 이야기

어쩌면 바로 그 점이 오늘날 진보신당의 암울한 상태를 드러내는 게 아닐까? 이 ‘이론적’ 안이함! (나는 이것마저도 ‘공부하지 않는 게으른 활동가’의 오래된 전형이라고 비판하고 싶다.) 운동의 ‘위기’에 대한 협소한 인식과 분석, 그리고 실천에 대한 몽매한 부당대립. 만약 내게도 ‘기존 운동권’이란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러니까 항상 ‘부정적인 것’으로서만 호명되는 그 유령이 여전히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조병훈씨를 통해서였음을 고백하고 싶다.

수 년만에 나는, 조병훈씨를 통해 ‘기존 운동권’을 보았다. 그는 15년간 쌓여온 무수한 ‘학생운동 위기 담론’의 역사적 전개 자체를 몽매하게 뭉개버렸다. 만약 그가 ‘20대의 새로운 운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위기’ 자체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위기’ 자체를 오로지 ‘기존 운동권’이라는 유령의 책임으로 돌린다.

그러나 어쩌면 ‘위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기’ 자체를 도덕적인 문제로 환원시키는 도덕주의자의 태도가 아무 사정없이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병훈씨는 학생운동의 위기가 흩어지는 개인들의 다양한 욕망을 살피지 못하고 차단된 정파들의 지도부(?)에 의해 자기변명과 옹호만 하려했기 때문에 확대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것은 ‘학생운동 위기’를 바라보는 몇 가지 원인 분석 중 하나로써 오랫동안 위기담론을 맴돌던 해석이다. 이 ‘도덕적 비판’은 ‘학생운동 위기론’이 제기될 때 가장 먼저 등장한 것으로, 오랫동안 학생운동 활동가들의 화두였다. 90년대 중반 이래 학생운동 진영에서 생산된 아주 무수한 텍스트들에서 그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유명한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이나 ‘한총련은 역사적으로 해소되었다!’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대학의 교지들, 학생운동 그룹들이 펴내는 신문과 팜플렛 등등. 그러나 이 도덕론에 입각한 자기비판도 당대에 그들 각자에겐 아주 유효했겠지만 오늘날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더 이상 도덕적 반성의 주체도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아주 단순한 표층적 진리만을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피스톤 운동이랄까. ‘단절’없는 이런 순환이 지겹다. 언제까지 우리 주위를 맴돌 것이란 말인가.

이제 도덕 반성의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더불어 조병훈씨가 도덕주의적으로 매도한 ‘기존 운동권’의 폐쇄적 태도는 어느 조직에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폐쇄적이어서 그들이 망한 것이라면, 그건 오직 그들의 업보이고 그들이나 혹은 그들에 이어서 그 당파의 운동을 펼치는 후배들이 뒤집어쓴 과오로 남았을 뿐이다. 조병훈씨가 결국 조병훈씨 말처럼 그 범위에 수렴되지 않는 여러 ‘개인들’이 외부로 가서 나름의 흐름을 만들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그런 식의 비난은 아예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조병훈씨 개인의 트라우마만 상상하게 할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진정 중요한 건 다른 문제이다. 우선 어느 조직이든 원 외부에 존재하는 다른 시선이 보기엔 모두 ‘폐쇄적’이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은 부차적이고 지나치게 일반적인 문제이다. 진실은 이데올로기 자체이다.

조병훈씨는 대체 어떠어떠한 점에서 ‘폐쇄적’이라고 느꼈는지 말하지 않고 있다. 이런 입장은 뻔하다. 그는 기존 학생운동 그룹들 중 특히 ‘레닌주의적 당파성’을 견지하고 있는 그룹들에 대해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글에서 “학생운동권 지도부가 기득 권력과 자신 모두에게 비판적인 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구조변혁을 하지 않는 것이 이익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자신이 지닌 급진좌파그룹의 운동에 대한 반감을 다소 악의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그가 무지한 점이 몇 가지 드러나는데, 실제로 좌파학생운동은 자기 안에서 무수히 구조변혁을 가해왔다는 점이다. 실제로 90년대 중반에 제PD계열 중 일부가 한총련 주류의 ‘주체주의’에 대해 비판하며 그 질서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전국학생연대’를 결성하였고, 97년 한총련 사태 이후로 “한총련 혁신”을 주장하던 제PD계열이 한총련에서 모두 빠져나오며 ‘전국학생연대회의’라는 제 좌파 그룹 연대체를 결성한 바 있다.

또 그 밖에 얼마나 많은 구조변혁 ‘시도들’을 볼 수 있는가. 03년 전학협 일부의 학생회 해소론, 몇몇 단위의 학생회운동과 자치단위 운동의 병행 선언 등등. 무수한 시도들이 ‘위기론’과 함께 전개되어왔다. 물론 우리는 결과적으로 실패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 만약 조병훈씨가 조금이라도 더 성실했다면 이 실패의 역사를 두고 면밀하게 고찰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정도도 살피지 않고 초지일관 몽매했다.

몰라도 너무 모르는 조병훈

다시 ‘기존 운동권’의 유령에게로 돌아와서, 과거 변혁적 학생운동 그룹들의 ‘정치’는 강고한 이념적 단결을 전제로 펼쳐지며 그것이 전제되었을 때 그 정파의 ‘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건 어느 나라를 가건 마찬가지이고, 그런 룰을 정하는 건 그 단체 자유이다.

예컨대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입 가능한 조기축구회가 있는가 하면, 축구를 좋아하더라도 매회 참가를 약조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입회할 수 있는 K3리그급 조기축구회도 있다. 우리 아버지는 축구를 못해서 우리 동네 조기축구회에 가입 못하시고 분통을 터뜨리며 옆동네에 가입하셨는데 그렇다고 우리동네 조기축구회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게 그들의 조직론이라는 것을.

다만, 논쟁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오로지 그 조직론이 가진 정치 그 자체를 두고 가능할 뿐이다. 레닌주의자가 아닌 조병훈씨에겐 소위 ‘기존 운동권’ 그룹들이 폐쇄적인 패권 집단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쨌단 말인가. ‘조직론’을 두고 이론적으로 논쟁할게 아니라면 고작해야 조병훈씨는 우파적 비난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조병훈씨는 좀 더 자유분방하고 누구나 가입가능한 진보신당에 가입하신 것 아닌가.

물론 나는 ‘민주집중제’라는 레닌주의적 조직운영 방식에 대해 여전히 고민이 많다. 당적 운동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답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무엇이 보다 더 옳을 것인가, 합당한 방법인가에 대한 고민 때문이다. 만약 조병훈씨가 좀 더 근원적인 문제로 다가가서 레닌주의와의 전쟁이라도 선언한다면, 그에 따른 논쟁은 유효해진다.

그러나 그는 기껏해야 ‘도덕적 비난’을 가할 뿐이며, 그마저도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무엇이 폐쇄적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더불어 그는 ‘기존 운동권’이 다양한 부문운동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이야말로 얼마나 몽매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인가! !

비정규노동자 지원활동을 하는 ‘기존 운동권’

우선 예를 들어, 고려대의 경우 <오마이뉴스>나 <프레시안>에 아주 새로운 개인들이 한 것처럼 보도된 무수한 활동들이 ‘기존 운동권’이 새로운 시각으로 발굴하고 기획한 투쟁들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요컨대 오늘날 고려대학생행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그룹은 과거에 활발하게 학내 미화원 노동자들을 만나왔다.

02년부터 일군의 진보적 학생들을 규합해 ‘불철주야’(‘불’안정노동‘철’폐를‘주’도할꺼‘야’)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이를 중심으로 학내의 200여 명의 시설관리노동자들을 만난 것이다. 처음에 이 문제는 50만 원도 되지 않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을 중심으로 회자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과 연계되어 이후에 노조 결성의 밑거름이 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들이야말로 오늘날 여전히 ‘여성주의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과거 생활도서관 운동과 같은 학회학술운동, 자치공간확보를 위한 운동, 학내 스타벅스 입주에 대한 반대 활동들 등 조병훈씨가 부당하게 호명하는 ‘기존 운동권’들이 무수히 변신을 꾀하며 얼마나 많은 ‘부문들’에서 활동했는지 하나하나 열거하기에! 도 입이 아플 지경이다.

그리고 이에 반해 진보신당의 20대 당원들께서는 자기 생활공간에서 얼마나 대중들을 열심히 만났는지 되묻고 싶다. 결국 나는 지금 다소 무리해서 위악적으로나마 ‘도덕주의적으로’ 묻는 것인데, 우리의 이런 질문은 끝이 없지 않겠는가? 정말 이런 “너는 얼마나 잘했는데?”라는 식의 도덕주의가 위기의 본질을 보게 하는가? 얼마나 우스운가?

그런데 조병훈씨에게 진보신당 지도부의 폐쇄성은 왜 비판대상이 아닐까? 그건 진보신당 지도부의 이데올로기가 자신과 동일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얼마 전 지방선거 전에 있었던 5+4회의에 참가한 진보신당 지도부가 보여준 기이한 협상의 태도, 그 과정에 있었던 폐쇄성, 선거시기 심상정의 몽매하고 독단적인 항복 선언, 노회찬씨가 종종 드러내는 정치엘리트적인 태도들, 이 모든 것이야말로 진정 ‘폐쇄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왜 그걸 비판하지 않는가.

아마도 그는 모르고 나는 아는 것 같다. 그건 그가 진보신당 지도부의 이데올로그들과 입장을 같이 하기 때문이고, 반면 여전히 당에 가입하지 않는 좌파학생운동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이 조병훈씨와는 다른 이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이념 선택의 문제

그런 점에서 조병훈씨의 ‘기존 학생운동권’ 비판은 조야할 뿐만 아니라, 비겁한 면이 있다. 나는 그 점을 도덕적으로 매도하고 싶지 않다. 다만, 위기담론을 면밀하게 살피지 못하고, 우리가 거처하는 ‘학생사회’라는 곳을 한때나마 강하게 휩쓸고 간 ‘저항 이데올로기’(대중적 학생운동)에 몰락 상황에 대해 ‘이데올로기 비판’으로서 응대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불성실함’을 부디 ‘공부’로서 채워주시라고 말하고 싶다. 조병훈씨처럼 학생사회의 위기상황이나 20대의 대중운동 따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활동하는 ‘정당 활동가’마저 이렇게 몽매하게 굴면 어쩌란 말인가.

그가 학생운동 활동가들과 어떤 관계맺음을 맺었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의 특수한 경험에서 근거한 특수한 분석이 단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언제까지나 ‘학생운동권’을 악의적으로 호명하며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자기 정치를 세워내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하려는 것일까.

“왜 진보신당에 입당 안 해?”라는 질문으로 환급되는 그의 ‘정치적 행동-플랜’이 담겨진 그의 글만으로는 그의 정치가 대체 무엇인지, 그래서 대체 무엇으로 진보신당에 가입하지 않는 20대들을 혹하게 할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매력적이지도 않다. 조병훈씨는 글에서 ‘학생운동권’을 몽매하게 비판하고 있었지만, 실은 자기 정치의 빈약함을 드러내고만 것이다.

물론 그가 내세운 입장들 중 일견 타당하고 귀기울일만한 것은 분명 존재한다. 요컨대 두리반 51파티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나는 그 파티를 준비하거나 공연에 참가한 몇몇 친구들을 아주 좋아한다. 저항의 경로를 새로이 발굴하고 있는 그들을 계속 응원하고 싶다. 또 아주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연대론-일반에 대한 입장도 일견 동의한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야기하는 그의 정치의 내용을 열심히 찾아보니, ‘선거’와 ‘입당 권유’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여전히 운동이 이론과 실천, 학습의 트라이앵글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그의 학습은 부재하고, 실천은 ‘선거운동’이며, 조직은 ‘입당 권유’이다. 정치는 실종되었고, ‘피스톤운동하는 객체들’만 남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평소에는 입당 권유하러 다니고, 달력보다가 선거시기 되면 선거 얘기하면서 선거운동판 가서 땀 흘리면서 춤추고, 선거 끝나면 자조적으로 ‘선거평가’하고. 오, 이런… 믿고 싶지 않다! 정녕 이것이 진보신당 20대모임의 ‘정치’란 말인가? 나는 지금, 조병훈씨의 글에서, 오늘날 이 땅에 만연한 ‘정치’ 자체의 위기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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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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