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책임한 후퇴인가, 남침 유도 술책인가?
        2010년 07월 05일 03: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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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깜짝 놀란 만한 발표를 한다. 그는 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제하의 연설에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하여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미국이 자신의 극동방위선 밖에 있는 한국과 대만의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로도 해석됐다.

       
      ▲ 딘 애치슨 국무장관 (사진=Acheason)

    당시 남북한 간에 크고 작은 교전이 발생하고 있었고, 이승만과 김일성 모두 무력통일을 공언하고 있었으며, 49년 소련의 핵실험과 중국의 공산화를 고려할 때, 이러한 미국의 선택은 뜻밖이었다.

    애치슨 라인의 의미

    더구나 스탈린은 미국의 애치슨 라인 발표 직후에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게 되는데, 이는 그 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애치슨 라인이 한국전쟁 발발의 중요 원인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앞선 1948년,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에 착수했다. 미국은 1948년 4월 2일 논의되고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받은 NSC-8를 통해 “가능한 빨리 주한미군을 철수하기 위해” 남한 단독 정부의 수립, 한국에 대한 경제적·군사적 지원 확대 등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고, 48년 9월 15일부터 미군 철수를 시작했다.

    이에 앞서 미국 합참은 48년 2월 21일 “미국이 한국에 병력과 기지를 유지해야 할 전략적 이익이 거의 없다”는 의견을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전달했고 이는 NSC-8에 반영되었다.

    NSC는 NSC-8과 그 이후 한반도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NSC 8-2를 트루먼에게 보고했는데, 핵심적인 내용은 49년 6월 30일까지 “점령군” 철수를 완료하는 대신에 유엔 총회 결의안을 준수하고 한국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며 미군 군사고문단을 잔류시킬 것을 권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곧 미국이 한국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NSC 8-2에서는 한국 포기와 전면적 안전보장 사이의 “중도적 방안”으로 미군 주둔은 최소화하면서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할 수 있는 수준의 정책을 담고자 했던 것이다.

    중간적 성격의 NCC 8-2의 공식화

    애치슨 라인은 NSC 8-2를 공식적으로 확인한 성격이 강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과 대만을 극동방어선을 언급하면서 제외시킨 동시에 “한국과 대만이 군사적으로 침략을 당하면 우선 공격당한 국민이 이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유엔 헌장에 따라 모든 문명세계가 개입해야 한다”며, “한국에 대한 원조 포기나 중단은 가장 철저한 패배주의이며, 아시아에서 미국의 이해관계에 가장 넋 나간 짓”이라고 역설했다.

    이렇듯 애치슨 발표의 모호성은 ‘애치슨 라인이 한국전쟁을 야기했다’거나, ‘애치슨 라인은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미국 주전파들의 고도의 술책이었다’는 극과 극의 평가를 낳게 된 원인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한국을 극동방어선에서 제외시킨 것일까? 또한 방어선에서 제외된 남한이 북한의 전면 공격을 받자 신속한 개입을 선택한 이유와 배경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반영되어 있었다. 우선 미국이 한반도를 중요한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으로 간주하지 않은 탓이 컸다. 또한 한국에 대한 확고한 안보 공약 제공과 미군 주둔이 이승만의 북진 통일 의욕을 부추길 것을 우려했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폭등한 군사비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자 하는 경제적 동기도 컸다.

    아울러 트루먼은 군비증강이 자신이 49년에 발표한 사회복지 프로그램 ‘공정한 타협(Fair Deal)’의 예산 확보를 어렵게 하고, 군부의 영향력을 키워 미국이 “군사화된 요새 국가(militarized garrison state)”로 변질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따라 아래의 표에서 나타난 것처럼, 미국의 군사비는 2차 대전 이후 급격히 줄어들었다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다시 폭등하게 된다. 전쟁 발발 직전에 130억 달러 수준이었던 군사비가 52년에는 그 4배인 520억 달러까지 치솟은 것이다.

       
      

    핵무기의 힘을 믿었던 트루먼

    이러한 복합적인 원인에 직면한 트루먼 행정부는 핵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것이 저렴한 방법으로 군사 태세를 유지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간주하게 된다. 실제로 트루먼은 2차 대전 이후 소련을 주적으로 간주하면서 핵무기를 이용한 소련 위협 대처에 중점을 두게 된다.

    2차 대전 이후 핵공격을 담당하는 전략공군사령부(SAC)를 창설해 핵 능력을 크게 강화시켜 나가면서 핵 사용의 초점을 소련에 맞췄다. 또한 당시 슈퍼폭탄으로 불렸던 수소폭탄 개발도 승인했다. 핵 공격만으로는 소련을 제압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막대한 군비에 부담을 느낀 트루먼 행정부는 핵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나간 것이다.

    그리고 1949년 8월 소련이 미국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의 핵무기에 대한 집착은 더욱 커졌다. 전략공군사령부는 소련의 핵실험 직후인 1949년말~50년초에 걸쳐 소련과의 전쟁 계획을 수립하게 되는데, ‘오프태클’(OffTackle)로 명명된 이 계획은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를 동원해 개전 초기에 소련의 군사 및 산업 시설을 “완전히 파괴하거나 붕괴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비밀 해제된 1950년 4월 공군 작전 회의 문서에 따르면, 일부 사령관들은 소련의 위협이 더 커지고 유럽을 손에 넣기 이전에 소련의 핵무기고를 비롯한 전략 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을 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미국이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을 제외시킨 데에는 당시 중앙정보국(CIA)이 북한의 전면 남침 가능성을 낮게 봤던 것도 한몫했다. CIA 비밀해제 문서에 따르면, CIA는 애치슨 라인 발표 하루 뒤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북한군의 증강에도 불구하고, 남침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고 판단했다. 전쟁 발발 엿새를 앞둔 6월19일 보고서에서는 북한을 독자적 결정권이 없는 소련의 위성국가라고 규정하며, “북한이 한국에 대한 게릴라 활동, 선전, 사보타주 활동 등을 전개하고 있지만 전쟁이 임박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정작 바로 이 시기에 스탈린은 마음을 바꾸고 있었다. CIA가 소련의 위성국가 수준으로 봤던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지속적으로 스탈린을 설득했고, “변화된 국제환경”을 고려한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낮게 보면서 김일성의 손을 들어줬다. 냉전 여명기에 북한의 전면 남침 가능성을 낮게 본 미국과 미국의 직접 개입 가능성을 낮게 본 소련의 오판이 교차하면서 전쟁 발발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다.

    스탈린은 왜 마음을 바꿨을까?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1950년 5월 14일 서신을 보내 “변화된 국제환경을 고려해, 통일을 향한 북한의 (남침) 제안에 우리는 동의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남침 승인 및 지원을 요청했던 김일성의 제안을 49년 내내 거부했다.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있으며, 북한의 군사력이 신속한 통일을 달성할 만큼 강력하지 않으며,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게릴라 활동이 기대만큼 강력하지 않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던 스탈린도 1950년 들어 마음을 바꿨다. 그가 정책을 바꾼 배경과 이유는 무엇이고, 그가 말한 “변화된 국제환경”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스탈린의 한반도 정책 선회 직전에 있었던 여러 가지 국제정세의 변화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당시 스탈린은 위협과 기회를 동시에 만났다. 소련에게 위협적인 국제정세의 변화로는 47년 6월부터 본격화된 마셜 플랜과 48년 6월부터 시작돼 1년 동안 지속된 베를린 위기, 49년 4월 4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대규모의 주일미군을 주둔시키면서 일본을 소련 봉쇄의 아시아 기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 핵심이다. 당시 소련은 미국 주도의 마셜 플랜과 나토 창설을 소련 봉쇄를 강화하고 침공 준비에 착수한 것으로 간주했다.

    반면 소련의 최초 핵실험(49년 8월 29일), 미국이 직접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중국의 공산화 및 중화인민공화국 선포(49년 10월 1일), 한국과 대만을 아시아 방어선에서 제외시킨 애치슨 라인의 선포(50년 1월 12일), 중소 동맹조약 체결(50년 2월) 등은 소련에게 유리한 정세 변화로 간주했다.

    이러한 정세 변화에 대응해 스탈린은 동유럽에 대한 직접 개입과 영향력을 높이면서 미국과 서유럽에 대한 강경 자세를 취하는 한편, 아시아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재인식했다. 미국이 일본에 주일미군을 주둔시켜 동아시아 반공 전선의 기축으로 삼으려고 한 움직임에 맞서 한반도의 공산화를 통해 이를 상쇄시키려고 했던 계산이 작동한 것이다.

    중국의 공산화와 스탈린의 계산

    이러한 전략 판단에는 중국의 공산화가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스탈린은 중국의 공산화를 세 가지 차원에서 고려했다. 첫째는 아시아 공산주의 확산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이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소련의 경쟁자로 부상하는 것을 견제할 필요가 생겼으며, 셋째는 ‘1945년 소련이 국민당과 체결한 중소 조약을 새로운 조약으로 개정하자는 마오쩌둥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였다. 그리고 북한의 남침은 이러한 세 가지 고려 사항을 일시에 해결해줄 수 있다고 스탈린은 믿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예상을 뒤엎고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본토에서 축출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것을 새로운 기회로 인식했다.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달성하고 미국의 대소 봉쇄 정책에 대한 완충지대를 아시아에서 확보할 수 있게 되어, 극동지역에서 미국과의 대결시 크게 불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중국의 공산화는 경쟁자의 부상 가능성을 잉태했는데, 이는 스탈린에게 중국의 공산화가 ‘양날의 칼(double-edged sword)’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마오쩌둥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스탈린은 50년 2월에 중소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에 따라 소련은 45년 국민당과의 조약을 통해 확보했던 다롄과 뤼순이라는 부동항을 상실하게 됐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스탈린에게 ‘남는 장사’였다. 중국 공산화의 성공은 소련이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도, 그래서 미국과의 직접 충돌 위험을 덜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한반도 전체로 확대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했다.

    동시에 한국전쟁은 아시아에서 소련-중국-북한으로 이어지는 공산주의 위계질서를 공고히 함으로써, 중국이 경쟁자로 부상하는 것을 예방해줄 것으로 믿었다. 끝으로 스탈린의 희망처럼 한반도 공산화에 성공하면 중소 조약으로 상실한 부동항을 한반도에서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바라봤다.

    이러한 계산 하에 스탈린은 50년 4월 비밀리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에게 남침 승인의 조건으로 마오쩌둥의 동의와 지원 약속을 받아낼 것을 요구했다. 또한 5월 14일에는 마오쩌둥에게 전보를 보내 소련은 김일성의 제안에 동의하기로 했고 최종 결정은 북한과 중국에 달려 있다며, 공을 베이징으로 넘겼다.

    이는 스탈린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이 개입하더라도, 북한 방어의 책임을 중국에게 전가시키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실제로 맥아더가 이끈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감행해 북한이 절멸의 위기에 처하자, 소련은 중국의 참전을 강하게 압박해 이를 성사시켰다.

    또한 당시 스탈린은 중국의 대만 공격과 북한의 남한 공격 사이의 전략적 우선순위를 검토했는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북한의 남침에 더 큰 비중을 뒀다. 하나는 중국이 대만을 공격을 위해서는 소련의 해공군 지원을 비롯한 군사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스탈린은 이를 중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카드로 인식했다. 또 하나는 스탈린은 중국이 한국전쟁과 대만 공격을 동시에 치를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는데, 북한의 남침을 통한 중국의 대만 공격을 억제하는 것은 장차 중국의 강대국화를 억제할 수 있는 유력한 카드로 인식했다.

    한편 스탈린은 소련의 핵실험 성공으로 미국의 핵독점 시대가 끝난 것이 극동지역에서 미국의 개입을 억제할 수 있는 안보 환경을 가져왔다고 판단했을 공산이 크다. 당시 소련의 핵실험 성공은 미국의 예상보다 5~10년 정도 빨랐는데, 이에 따라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소련과의 충돌시 핵전쟁의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실제로 소련의 핵실험 7개월 후인 1950년 4월에 작성된 CIA의 극비문서에 따르면, “소련의 원자폭탄 보유는 소련의 공격 범위 내에 있는 지역에서 미국의 공군 및 상륙 작전에 심대한 영향을 줄 것”이고, “소련의 핵 보복 능력은 미국이 군사적으로 원자폭탄 사용을 전략적 우선순위에 두는 계획에 대해 의문을 야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를 뒷받침하듯 미국은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 북한의 배후에 소련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소련 및 중국에 대한 핵 공격을 검토했지만, 소련의 핵 보복을 포함한 확전의 가능성도 동시에 우려했다. 영국 정부 역시 미국의 원폭 사용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트루먼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반면 미국의 핵 위협에 노출된 마오쩌둥은 소련에게 핵 보복을 준비해달라고 요구했다. 소련의 핵실험으로 미국의 핵 독점 시대가 끝난 바로 그 시기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이처럼 핵무기를 둘러싼 강대국 지도자들의 다양한 시각을 표출시키면서 3차 세계대전의 문턱까지 서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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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참고 자료 

    Shen Zhihua, "Sino-Soviet Relations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Stalin’s Strategic Goals in the Far east," Journal of Cold War Studies(Spring 2000).
    Paul G. Peirpaoli, Truman and Korea(Missouri Publishers, 1999),
    NSC 8/2, March 22, 1949, http://www.wilsoncenter.org/coldwarfiles/files/Documents/FRUS.Korea.NSC_8-2.pdf
    인용한 미국의 비밀해제문서 사이트: http://www.gwu.edu/~nsarchiv/

    *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 이 연재는 정욱식의 블로그 ‘뚜벅뚜벅’에서도 함께 진행됩니다.(http://blog.ohmynews.com/wooksik) 최근에 쓴 책으로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가 있습니다. 다음에 이어질 글은 ‘한국전쟁 초기 미국의 핵 공격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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