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탈린 “히로시마, 세계 흔들어, 핵개발하라”
        2010년 07월 01일 01: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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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 항복 선언 사이의 인과 관계는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그러나 미국의 원폭 투하 배경에는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의 성격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원폭 투하를 통해 미국이 노렸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소련의 대일전 참전 이전에 원폭 투하를 통해 일본을 패망시킴으로써 미국의 힘에 의한 종전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이미 싹트고 있던 냉전 질서에서 소련에 대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요구한 당사자는 미국이었다.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미영 연합군은 소련의 개입이 태평양전쟁 승리의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보고, 소련에게 참전에 따른 ‘전리품’을 제시했었다.

    쿠릴 섬 및 사할린 섬 남단 소련 이양, 만주에 해군기지 사용 허용 등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로 획득한 것을 소련에게 돌려주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독일이 패망하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탈린은 45년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도 이러한 약속을 거듭 확인하면서 “나치 독일의 패망 3개월 후에 대일전에 참전하겠다”고 구체적인 일정까지 밝혔다.

    그러나 미국이 45년 7월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미국의 계산은 달라졌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소련의 개입에 의한 일본의 항복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키워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는데, 핵무기로 소련의 개입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소련이 개입하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일본이 요구한 천황제 유지 조건을 미국이 받아들였다면 일본의 조기 항복 선언도 충분히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두 차례의 원폭을 강행한 것도 이러한 동기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미국의 핵무기 및 원폭 투하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스탈린은 1940년대 초반부터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미국이 포츠담 회담에서 ‘핵 외교’를 선보이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기 이전까지 심혈을 기울이진 않았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한 작은 대비책”으로 간주하는 수준이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이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는 것을 정탐 활동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스탈린이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트루먼의 통보를 듣고 그리 놀라지 않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미국이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한 것에는 상당히 놀랐던 것으로 보인다. 히로시마 피폭 직후 스탈린은 “히로시마가 세계를 뒤흔들었다. 균형은 깨졌다. 핵폭탄을 만들어라. 그것은 우리로부터 거대한 위험을 제거해줄 것이다”라며, 소련 과학자들에게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미국의 핵사용을 소련의 양보를 강제하기 위한 협박 외교로 규정하고, “우리가 협박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트루먼의 무력시위는 노련한 독재자 스탈린을 위축시키기보다 미국과 맞장 떠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미국의 핵 독점과 외교정책의 ‘혁명화’

    미국의 핵 독점은 2차 대전 말엽은 물론이고 종전 이후에도 “미국의 외교정책을 혁명화”시켰는데, 대표적으로 “핵무기가 없었다면 미국 대통령이 결코 생각하기 힘든 정책, 즉 독일의 재건과 재무장을 선택하게 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독일의 재건 및 재무장에 따른 서방 세계의 위협 인식은 미국의 핵 억제로 차단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트루먼 대통령과 번스 국무장관은 1945년 8월 22일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독일의 위협이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며, “원자 폭탄은 도발을 일으키려는 나라들을 중지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양보가 불가피한 소련과의 협력도, 독일 재무장을 두려워하는 소련의 우려도 크게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실제로 미국은 독일 문제를 둘러싼 소련과의 협상에서 핵무기를 강압 외교의 수단으로 동원했다. 미국은 핵무기의 위력을 스탈린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원폭을 당한 히로시마에 소련 관료를 초청하기도 했고, 태평양에서 실시한 핵실험에 소련 관료를 참관시켰다.

    또한 번스가 소련의 몰로토프 외무장관을 만나 독일 문제를 두고 담판을 벌이고 있었던 46년 6월에는 태평양 비키니섬에서 대규모의 핵실험을 실시해 소련의 강한 반발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련이 그토록 거부했던 독일 재건에도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미국의 두 가지 카드, 즉 핵 시위와 독일 재건은 소련으로 하여금 미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강하게 갖게 했다. 당시 소련의 위협 인식은 소련 해체 이후 해제된 비밀문서에서 잘 나타난다. 1946년 주미 소련대사인 노비코프(Nikolai Novikov)는 미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 근거로 해외 해공군 기지 건설, 원자폭탄 등 신형무기의 증강, 독일의 재건 및 재무장 추진 등을 제시했다.

    특히 “미국은 독일에서의 연합국의 임무, 즉 무장해제와 민주화를 달성하기 이전에 임무를 종식시키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데, 이는 독일 제국주의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고, 미국은 재무장한 독일을 자기편으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미국의 의도에 강한 의혹을 품으면서 “앵글로 색슨의 침공”을 막기 위해 강력한 대응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의 불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구상을 밀어붙였다. 소련의 강력한 반발을 뒤로 하고 마셜 플랜을 단행했다. 핵 독점과 이른바 유럽경제부흥계획을 통해 유럽에서의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아보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와 49년 베를린 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은 핵무기 보유고를 크게 늘려 49년에는 그 수를 200개로 늘렸다.

    소련의 핵실험과 미국의 대응

    그러나 미국의 핵독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카자흐스탄 사막 ‘세미팔라틴스크-21’에서 핵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 나가사키에 투하한 플루토늄 핵폭탄 ‘뚱보(Fat man)’와 흡사한 것으로써, 소련이 50년대 중반에 가서야 핵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는 미국의 판단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당황한 트루먼 행정부는 세 가지 조치를 단행했다. 첫째는 유럽에서 소련의 재래식 군사력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영구적인 미군 주둔 및 재래식 군비증강이다. 둘째는 소련에 대한 핵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원자폭탄의 양과 질을 크게 늘리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당시 ‘슈퍼 폭탄’으로 불렸던 수소폭탄 개발 승인이다.

       
      ▲ 소련의 최초 핵실험 장면 (사진=미국 에너지부)

    소련이 미국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 내에서는 ‘매카시즘’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맨하튼 프로젝트 이후 미국의 핵무기 개발과 운영유지를 담당해온 미국 에너지부에 따르면, 당시 미국 내에는 수백명의 소련 스파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미국인과 영국인이었고, 이들 가운데에는 물리학자도 상당수 있었다.

    특히 소련 스파이의 핵심인물인 클라우스 훅스(Klaus Fucks)는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물리학자였는데, 그는 1944년부터 핵무기 설계 및 제조를 담당하고 있던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에 파견되어 핵심 정보를 소련 측에 넘겼다. 그의 스파이 활동은 미국 정보기관에 체포되어 모든 것을 실토한 1950년 1월까지 계속됐다. 그를 비롯한 비밀 스파이의 활동은 소련이 예상보다 빨리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중대한 이유로 일컬어진다.

    이는 1950년 들어 매카시즘, 즉 ‘적색 공포(Red Scare)’가 미국을 강타하는데 일조하고 말았다. 2차 대전 기간에 미국 내 소련 스파이 활동이 활발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소련이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한 연합국의 일원이기도 했지만, 루스벨트가 스탈린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감정과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낮았다는 점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33년 대통령 취임 직후 소련을 국가로 인정했고, 볼셰비즘을 억압과 불평등에 대한 “일시적 반발에서 터져 나온 것”으로 봤다. 이에 따라 “나는 공산주의 자체는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공산주의에는 다양한 변종이 있는데 모두가 해로운 것만은 아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울러 독일과 일본에 대한 정보는 풍부했던 반면에, 소련에 대해서는 “거의 닫힌 책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점 역시 당시 미국의 느슨한 소련관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1940년대 초반 미국 공산당의 당원수는 7만 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그러나 1949년 들어 미국의 분위기는 바뀌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8월 29일 소련의 핵실험과 뒤이은 중국의 공산화였다. 소련의 최초 핵무기는 미국의 예상보다 5년 이상 빨리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플루토늄 핵폭탄인 ‘가제트’ 및 ‘뚱보’와 흡사했는데, 이는 소련의 스파이 활동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뒷받침하듯 훅스가 소련의 핵실험 5개월 뒤인 1950년 2월 체포되어 간첩 혐의를 일체 자백했다. 이 사건 직후에도 국무부 고위관료인 앨저 히스 간첩 논란 및 로젠버그 부부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미국 내 소련 스파이가 소련의 핵개발을 도왔다”는 심증은 확신을 갖게 됐다. 1950년 1월부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 가입 문제로 미국과 소련이 날카로운 대립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 해 2월에는 중소 동맹조약이 체결되었다.

       
      ▲ 위스콘신 주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 (사진=미국 의회도서관)

    이를 틈타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인 매카시(Joseph McCarthy)는 1950년 2월 9일 “나에게 국무부에서 일하는 205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이 있다. 그런데 국무장관은 이들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계속 일하고 있다”며 폭탄선언을 했다.

    무명에 가까웠던 매카시는 이 폭탄선언으로 일약 저명한 정치인으로 우뚝 섰고, 그가 경고한 ‘적색 공포’를 실증하듯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매카시즘은 미국 정치뿐만 아니라 대외정책의 급격한 우경화를 야기했다.

    이처럼 국제정세가 급변하던 시기를 틈타 몰아치기 시작한 매카시즘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이 신속한 개입을 선택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 직전까지 트루먼은 군비증강보다는 경제살리기 및 복지 증진에 관심이 많았다.

    소련의 위협에는 핵무기로 대처할 수 있다며 재래식 군비증강에도 소극적이었다.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 즉 애치슨 라인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매카시즘은 트루먼 행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트루먼에게 국내 정치적 탈출구를 제공하게 된다. 신속한 개입을 선택함으로써 안보와 공산주의에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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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참고 자료 

    데이비드 레이놀즈 지음, 이종인 옮김, 『정상회담: 세계를 바꾼 6번의 만남』(책과함께, 2009).
    John Lewis Gaddis, The Cold War: A New History,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05),
    Gar Alperovitz and Kai Bird, "The Centrality of the Bomb, Foreign Policy, Spring 1994.
    Gosling, F. G. The Manhattan Project: Making the Atomic Bomb. DOE/MA-0001; Washington: History Division, Department of Energy, January 1999
    "War in Cold War: McCarthyism & Red Scare." Shmoop History. 10 Jul 2009,
    http://www.shmoop.com/analysis/history/us/cold-war-mccarthyism-red-scare/analytic-lenses-war.html
    인용한 미국의 비밀해제문서 사이트: http://www.gwu.edu/~nsarchiv/

    *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 이 연재는 정욱식의 블로그 ‘뚜벅뚜벅’에서도 함께 진행됩니다.(http://blog.ohmynews.com/wooksik) 최근에 쓴 책으로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가 있습니다. 다음에 이어질 글은 ‘애치슨 라인과 스탈린의 계산, 그리고 한국전쟁의 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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