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로시마 핵, 소련 겨냥 대량살상 외교"
        2010년 06월 28일 03:4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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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츠담 회담에서 핵 ‘실험’을 통해 스탈린을 압박한 트루먼은 실제 핵 ‘사용’을 통한 무력시위에 나섰다. 바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가 그것이다. 트루먼의 핵심 참모인 제임스 번스(James Byrnes) 국무장관은 원자폭탄을 “문 뒤의 총”이라고 부르면서 소련을 “훨씬 다루기 쉬워졌다”고 말했다.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후 일기장에 “번스는 소련과의 협력에 극도의 거부감을 나타냈다”며, “원자폭탄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있다고 보면서 소련을 다루는데 강력한 무기로 간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핵폭탄 투하 결정까지

    핵 개발 성공에 확신을 갖게 된 1945년 5월 들어 미국은 핵전략을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전후 질서 형성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그 어떤 나라보다 핵무기 전력의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핵사용 여부에 대해서는 이견이 노출되었다. 2차 대전의 영웅으로 칭송받아온 조지 마셜은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이 무기들은 대형 해군 군사시설과 같이 직접적인 군사 목표물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어떤 실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우리는 여러 개의 대규모 공업지역을 목표로 삼을 수 있다. 우리는 일본인들에게 그 중심을 파괴할 것이라고 알림으로써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도록 경고해야 한다.” 원자폭탄은 군사 시설에 사용되어야 하며, 사전 통보를 통해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해 핵무기 개발에 참여했던 물리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아예 원폭 투하에 반대하고 나섰다. 시카고대학 물리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제임스 프랭크James Franck의 주도로 일본 핵투하에 반대하고 나선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 등이 참여해 1945년 6월 11일에 발표한 〈제임스 보고서〉를 통해서였다.

    이들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핵공격이 도덕적·정치적 파장을 가져올 것이라며, 실제로 사용하기보다 핵폭탄의 위력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일본의 항복을 유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핵무기 사용은 군사적 고려보다 장기적인 국가 정책의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며,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면 앞으로 국제적으로 핵무기를 통제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일본군이 미군 포로를 핵무기 투하 예상 지역에 배치하거나 핵무기를 운반하는 항공기를 격추할 기회를 줄 수 있다는 반론에 막혔다. 이에 따라 미군 수뇌부로 구성된 잠정위원회(Interim Committee)는 일본에 사전 경고 없이 복수의 지역에 핵무기를 투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 위원회의 책임자인 스팀슨 전쟁부 장관은 6월 중순 트루먼에게 이러한 내용을 보고해 승인을 받았다.

    미국 대통령의 승인이 떨어지자 맨해튼 프로젝트팀과 군부는 핵폭탄 투하 지역 물색에 들어갔다. 최초 후보지역은 고쿠라 무기고, 히로시마, 니이가타, 교토가 거론되었다. 그러나 스팀슨은 일본의 고도(古都)이자 문화유산지인 교토를 일본의 대표적인 군수업체인 미쓰비시 중공업 공장이 있는 나가사키로 대체했다. 공격 명령은 7월 25일 공군에 하달됐다. 물론 사전 경고는 없었다.

       
      ▲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습. (출처=미국 에너지부)

    급기야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공군의 B-29 폭격기는 일본 히로시마에 무게 4.4톤의 육중한 ‘꼬마’(우라늄 핵폭탄)를 떨어뜨렸다. 7만명이 즉사했고, 부상당한 7만명도 1946년을 맞이하지 못했다. 트루먼은 그 날 미국이 히로시마에 15킬로톤의 폭발력을 보인 “전혀 새로운 폭탄”을 투하한 사실을 발표하면서 일본이 무조건적으로 항복하지 않으면, 똑같은 결과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탈린, ‘나도 핵개발하고 있거든’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틀 후 주소련 미국 대사인 해리먼(Averell Harriman)은 스탈린을 만나 그의 소감을 물었다. 스탈린은 일본인들은 결사항전을 고수하고 있는 현 정부를 대체할 구실을 찾고 있었는데, “미국의 원폭 투하는 그들에게 구실을 주었다”고 답했다.

    해리먼은 히틀러의 독일보다 미국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한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에 스탈린은 히틀러가 먼저 성공했다면 “독일은 절대로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그러면서 스탈린은 “소련 과학자들은 (원자폭탄 개발이)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말한다”며, 소련도 핵개발에 착수했음을 미국에 알렸다. 스탈린은 미국의 원폭 투하가 자신을 겨냥한 무력시위로 간주하고, 소련도 핵개발을 통해 이에 맞서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다.

    한편 피폭 당한 일본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하지 않았다. 이미 미국의 가공할 재래식 폭격에 익숙해 있었던 탓이 컸다. 미국은 1945년 봄과 여름에 걸쳐 66개의 일본 도시에 엄청난 양의 재래식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 가운데 25개 도시는 8월 첫째주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25개 도시 가운데 8개 도시의 파괴 정도는 히로시마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컸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다른 재래식 무기에 의한 공격과 비교할 때, 일본 지도부에게 항복을 선택할 만큼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한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일본 지도부는 미국이 원폭을 투하하고 이를 공식 확인한 지 이틀이 지나도록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최고위원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히로시마 피폭 이틀 후인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에 있는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는 일본의 항전 의지는 물론이고, 소련의 개입없이 태평양 전쟁을 끝내려고 했던 미국의 희망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8월 9일 새벽 소련의 참전 소식을 접한 일본 지도부는 즉각 최고위원회를 소집했다. 이 회의가 시작되었을 때, 미 공군의 두 번째 폭격기가 고쿠라 기지를 향해 출격했다. 그러나 악천후와 피격 위험을 느낀 폭격기 조종사는 기수를 나가사키로 돌려, 무게 4.5톤의 ‘뚱보’(플루토늄 핵폭탄)를 투하했다. 21킬로톤의 폭발력을 보인 이 핵폭탄 한발로 1946년 1월까지 14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8월 10일, 일본은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항복을 선언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8월 15일 히로히토는 일본 전국에 중계된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전쟁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됐다. 적은 새롭고도 잔악무도한 폭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하면서 항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9월 2일, 미국 항공모함 미조리호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을 가졌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이렇게 끝났다.

       
      ▲ 미국 항공모함 미조리호에서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맥아더. (출처=미국 에너지부)

    두 차례의 핵폭탄 공격을 받은 직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핵무기는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감행해 수많은 미군의 희생을 치르지 않고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칭송을 받았다.

    트루먼은 “젊은 미국인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고, 60년 후 미국 기업연구소(AEI)의 토마스 도넬리는 “나는 원폭 투하와 이에 대한 부담을 기꺼이 짊어진 트루먼에 대해서 신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일본 침공시 양측의 희생자 수는 수백만에 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핵무기라는 대량살상무기가 ‘사악한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 더 많은 대량살상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원폭 때문에 항복했는가?

    이처럼 미국이 나치 독일보다 핵무기를 먼저 개발하고, 결사항전을 벌였던 일제의 패망을 앞당겼다는 평가를 낳으면서 핵무기가 평화를 보장한다는 핵무기주의(nuclearism)는 맹위를 떨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억의 정치’는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1945년 8월에 대한 기억은 핵무기에 대한 관점과 철학을 구성하는데 역사적인 뿌리가 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경험은 단순한 과거의 사실을 넘어서, 앞으로 그 어떤 공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암시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상식’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미국의 원폭 투하가 진짜로 겨냥한 상대가 누구였냐’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과연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결정적인 이유가 원폭에 있었느냐’는 것이다.

    먼저 후자의 의문부터 따져보자. 바톤 베른스타인 스탠퍼드대 교수는 “모든 사정들을 고려해봤을 때 일본이 미국의 일본 본토 상륙작전이 예정되어 있었던 11월 이전에 항복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고 말했다.

    하버드대의 역사학 교수인 어니스트 메이는 “일본의 항복 결정은 아마도 소련의 공격으로부터 야기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일본의 하세가와 교수는 “원폭 투하 이외의 다른 대안들이 있었고 트루먼 행정부는 그들 자신들의 논리로 이를 거부하였다”고 지적했다. 이들을 비롯해 많은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일본 항복의 결정적 요인은 바로 ‘소련’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핵전문가인 워드 윌슨의 연구성과가 주목된다. 그는 일본의 항복은 ‘원폭’보다 ‘소련’ 요인이 더 컸다는 것을 광범위한 자료 발굴을 통해 실증적으로 입증했다. 1945년 여름에 일본은 두 가지 전략적 선택에 직면해 있었다.

    하나는 1941년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소련에게 종전(終戰) 중재를 설득하는 것이고(협상파), 다른 하나는 유리한 종전 조건을 얻어낼 때까지 미국에 맞서 결사항전하는 것이었다(주전파). 이 두 가지는 8월 6일 히로시마 피폭 이후에도 고려되었다.

    그러나 8월 8일 소련의 태평양전쟁 참전과 동시에 물거품이 되었고, 일본은 무조건적인 항복 이외의 선택이 없게 되었다. 당시 소련의 막강한 군사력을 고려할 때, 일본이 소련과 미국을 상대로 일본 땅에서 동시 전쟁을 치를 능력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원폭 투하와 일본의 항복 사이의 상관관계에서 중요한 또 한 가지 대목은 ‘원폭 투하가 다른 재래식 무기에 의한 공격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고, 더 중요하게는 일본 지도부도 그렇게 인식했느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은 1945년 봄과 여름에 걸쳐 일본 전역에 엄청난 양의 재래식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에 따라 일본은 폭격에 익숙해 있었고 원폭 투하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일본 지도부가 원폭 투하를 항복을 선택할 만큼 결정적인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고 이를 공식 확인한 지 이틀이 지나도록 일본 정부는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최고위원회를 소집하지 않았던 것은 이를 뒷받침 해준다. 8월 9일 아침에 소집된 최고위원회 회의에서도 나가사키 피폭 문제는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육군 참모총장인 우메즈는 “육군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고, 이에 항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반해 이 회의에서 일본 지도부는 소련의 개입 및 일본 내부의 동요를 더 우려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전쟁이 계속될 경우 민중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었다. 특히 일본 지도부는 소련의 참전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8월 9일 새벽 소련의 개입 소식을 접한 일본 정부는 그 날 아침 즉각 최고위원회를 소집했다. 회의 시작 즈음에 나가사키에 두 번째 핵폭탄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핵심 의제는 소련의 개입으로 모아졌다. 이 회의에서는 일본 지도자들과 군부는 소련의 참전은 “일본 제국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라는 점에 의견을 모았다. 히로히토 천황 역시 원폭 투하 소식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보고하라는 지시 이외의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반면에, 소련의 개입 소식에 대해서는 전쟁을 끝낼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원폭 투하가 일본의 항복을 가져온 직접적 요인이라기보다는 일본군이 패배의 명분을 찾는데 ‘사후’ 정당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패배는 일본군의 능력이나 정신력의 부족이 아니라 적군이 예상치 못한 무기, 즉 핵무기를 사용한 데에서 온 것이라는 ‘변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히로히토는 항복을 선언하면서 “적은 새롭고도 잔악무도한 폭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종전 직후 일본의 한 고위관리는 “만약 군부가 그들의 패배가 정신력 부족이나 전략적 실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과학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약간은 체면을 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고, 히사쓰네 관방장관은 “패배의 책임을 군부가 아니라 핵무기로 돌린다면, 이는 현명한 변명이 될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미국의 원폭투하, 누구를 겨냥한 것인가?

    다음 의문, 즉 ‘미국의 원폭 투하가 누구를 겨냥한 것이냐’는 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이는 미국이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더라도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을 수 있었고, 미국이 핵무기 사용을 선택한 데에는 스탈린의 소련을 상대로 한 ‘무력시위’의 성격이 짙었다는 해석과 연결된다.

    이와 관련해 미국이 일본의 항복 조건으로 천황제 유지를 ‘조기’에 받아들였다면, 일본 역시 조기에 항복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설득력을 지닌다. 미영연합군 수뇌부들은 천황제 유지를 보장하면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고 판단해 트루먼에게 이를 권고했다.

    그러나 트루먼과 그의 핵심 참모인 번스 국무장관은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 천황제 유지에 대한 보장을 삭제하고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다. 당시 트루먼 행정부가 왜 이러한 조치를 취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이지만, 미국은 결국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다. 원폭 투하를 한 다음에 말이다.

    이와 관련해 하세가와는 포츠담 선언에서 천황제 유지에 대한 보장이 제외된 근본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다고 설명한다. 일본이 항복 요구를 거부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미국의 지도자들은 원폭투하를 정당화하고자 하였고, 더 나아가 원폭을 소련 참전 이전에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번스는 한 과학자에게 “러시아를 유럽에서 더욱 잘 다룰 수 있게 하기 위하여(manageable)” 원폭투하를 원한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미국 원폭투하는 소련을 겨냥한 ‘대량살상’ 외교

    그렇다면 미국의 원폭 투하보다도 소련의 개입이 일본의 항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보다 설득력이 있고 그 근거도 뒷받침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주류는 왜 원폭 투하 결정론에 집착하는 것일까?

    앞서 소개한 윌슨은 이것이 국가의 위신과 국제적 영향력에 대한 고려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즉, 원폭 투하가 일본 패전의 결정적 요인이라면 미국은 사악한 전쟁을 끝낸 구원자이자 유일한 핵 보유국으로서의 국제적 영향력을 제고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소련의 개입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미국이 4년 동안 끝내지 못한 태평양 전쟁을 소련은 며칠 사이에 끝냈고, 이에 따라 전후 소련의 위신과 영향력을 키워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일제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그리고 일본의 결사항전으로 더 큰 인명피해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미국의 원폭 투하는 스탈린의 소련을 상대로 한 ‘대량살상’ 외교라고 보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단 두 발의 핵폭탄으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 4만여명을 포함해 20여만명의 목숨을 빼앗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사는 이후 인류사회에 두 가지 영향을 남기게 된다. 하나는 유사시 승전을 보장하는 막강한 무기이자 강압외교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유용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사용되는 순간 무고한 민간인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부도덕성’이다.

    일본을 상대로 원폭을 투하한 트루먼은 5년 후, 이러한 핵무기의 ‘두 얼굴’에 봉착하게 된다. 바로 한국전쟁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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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참고 자료

    데이비드 레이놀즈 지음, 이종인 옮김, 『정상회담: 세계를 바꾼 6번의 만남』(책과함께, 2009).
    John Lewis Gaddis, The Cold War: A New History,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05),
    William Burr, “The Atomic Bomb and the End of World War II,” National Security Archive Electronic Briefing Book No. 162, April 27, 2007.
    Barton J. Bernstein, "Truman At Potsdam: His Secret Diary," Foreign Service Journal, July/August 1980.
    Gosling, F. G. The Manhattan Project: Making the Atomic Bomb. DOE/MA-0001; Washington: History Division, Department of Energy, January 1999
    Ward Wilson, “The Winning Weapon?: Rethinking Nuclear Weapons in Light of Hiroshima,” International Security, (Spring, 2007).
    인용한 미국의 비밀해제문서 사이트: http://www.gwu.edu/~nsarchiv/

    *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 이 연재는 정욱식의 블로그 ‘뚜벅뚜벅’에서도 함께 진행됩니다.(http://blog.ohmynews.com/wooksik) 최근에 쓴 책으로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가 있습니다. 다음에 이어질 글은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미국 핵독점의 종말, 그리고 매카시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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