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왜 이 세상을 사는가?
        2010년 06월 27일 11:3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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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전인가요? 불교에 대한 관심이 날로 싶어졌던 그 때에, 저의 한 대학교 동창생과 함께 불교 수행을 아주 오랫동안 해온 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어요. 그 동창생은 나중에 한국 무속에 대한 박사 학위를 받고 주평양 러시아 총영사까지 역임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때만 해도 불교에 아주 깊이 심취했었어요. 그 정신과 의사를 만났을 때에 불교 이야기부터 꺼냈는데, 우리에게 던진 첫 질문은 다음과 같았어요:

    "이게 (자신의 팔을 가리키면서) 싫은 것이죠? 고깃덩어리 속에서 살다가 지친 것이죠?"

    즐거움보다 부담인 삶

    저는 답을 주저했었는데, 제 동창생은 당장에 "그렇다, 나는 왜 고깃덩어리로 태어나 살아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고 답했어요. 의사는, "그러면 근본적으로 불교적 성향이 맞다"고 했었습니다.

    불교를 일종의 염세적 성향으로 해석하는 건, 살려는 의욕을 잠재워야 하고 궁극적으로 인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한 ‘무’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던 쇼펜하우어를 ‘불자의 모범’으로 보는 서양인의 편견인지 모르지만, 그 의사의 말은 자주 생각이 납니다.

    사실, 저로서도 ‘산다’는 과정이라는 게 ‘낙’보다 ‘부담’으로 많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박노자’라는 이름이 붙여진 고깃덩어리는 각종의 요구가 하도 많아서 그런 것이죠. 그 고깃덩어리에다가 차에 휘발유를 붓듯이 식음을 부어야 되고, 그 분비물도 배출시켜 주어야 하고, 고깃덩어리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그 휴식 시간, 즉 수면시간도 지켜야 하고, 또 고깃덩어리가 많이 아프지 않게 자꾸 그 덩어리를 움직여야 하고, 또 그래봐야 계속 아프니까 결국 지쳐지는 것입니다.

    누가 보면 특히 식음 섭취는 ‘즐거운’ 과정으로 보이는지 모르지만, 저로서는 그것까지도 무거운 업보로 느껴집니다. 물론 여기에서 다소 내향적이고 염세적 성향 이외에 또 한 가지 요인은 있을 것입니다.

    고깃덩이리를 먹여주기조차 어려운, 내지 그 무슨 인간 모습을 띤 나찰, 아수라들이 ‘나의’ 고깃덩어리를 어디엔가 가두어놓고 죄를 덮어씌우는 딱한 상황이라면 ‘생존 투쟁’의 열기 속에서 삶이라는 업보의 괴로움을 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교적으로 편한 상황에 놓인 고깃덩어리라면 그걸 끌고 산다는 게 그저 괴로울 뿐이죠.

    사르트르, 예민한 서방의 중생

    이걸 뼈저리게 느낀 사르트르와 같은 다소 예민한 서방의 중생들은, 일찌감치 고깃덩어리를 끌고 산다는 걸 ‘선택’,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질 용기’라고 결론내렸습니다. 신도, 인간에게 내재돼 있는 그 어떤 ‘본성, 본질’도 없는 실존주의적 ‘자유’의 허공 속에서 인간이 끝없이 선택들을 함으로써 ‘자신’을 만든다는 논리입니다.

    좋은 선택 – 예컨대 파쇼들과 싸우겠다는 선택 -을 했다고 해서 "잘 했어" 하고 은총을 베풀 신도 없고, 꼭 그 선택을 하게끔 만드는 불변의 도덕률도 없는데, 일단 그러한 선택을 함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드는데에 일조한다는 건 공산당 지지자(동반자) 사르트르의 논리였죠.

    글쎄, 사르트르도 끝에 가서 ‘나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많이 버리신 것 같은데, 사르트르가 죽었을 때에 일곱살이었던, 아주 불행한 반동과 후퇴의 시대를 살고 있던 저로서는 아예 아무 확신도 가지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 유럽에서 보이는 자본주의의 야만화 정도 – 그 좋은 실례는 영국 복지 국가의 거의 반쪽의 해체입니다 – 로 봐서는 저나 제 아이가 자연사할 수 있다는 데에 대한 확신도 전혀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공황과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 야만화하다가 어떤 일이 일어나게 돼 있는지 책에서 하도 많이 읽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냉정하게 따져볼 때에 인류 전체의 차원에서 사회주의보다 야만이 선택될 확률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본과 국가가 부추기는 반이성, 비이성에 비해 개인의 이성도 아주 약하고 집단, 전체의 이성은 아예 보잘것도없습니다.

    지금 4대강으로 생태가 망해가고 젊은 ‘백수’들이 취직자리가 전혀 안보여 절망에 빠지는 나라에서의 월드컵 열기를 한 번 보시고서, 이게 거짓이라고, 집단 이성이 정말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고 말씀해보시지요.

    자본주의, 정신병적 체제

    그러면, 망해가면서 언젠가 인류를 멸망시킬는지도 모를 정신병적 체제 하에서 이 고깃덩어리를 끌고 살면서 미륵보살의 하생도, 야소기독의 재림도, 후천개벽도, 심지어 무산계급 혁명의 필수적 성공도 믿지 않는 중생은, 왜 하필이면 진보정당 지지하고 정치색이 있는 글쓰고 난리칩니까?

    사르트르는 ‘선택’을 이야기했지만, 저는 인간을 ‘선택’쯤이나 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로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존재였다면 우리가 지금과 같은 더럽고 수치스러운 시대를 살지도 않았을 걸요. 제가 진보정당을 믿고 따르고 사회주의를 외치는 이유는, 아주 쉽습니다.

    미래가 어떻게 되든(저는 낙관보다 비관에 더 기울입니다), 무산계급이 어떤 본질적 변혁을 할 수 있든 없든(지금의 체제 포섭 정도로 봐서는 매우 어려우리라 봅니다), 사회주의적 전망이 인류에 있든 없든(저는 꼭 있다고 자신과 남을 기만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냥 제 본능에 충실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 본능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인터넷에서(집에 바보상자가 없어서 세상을 접하는 루트가 인터넷뿐에요) 미제 군대가 아프간에서 또 몇 명의 마을 사람을 "테러리스트"라고 하여 무인비행기로 죽였다는 이야기를 볼 때마다 그냥 속이 뒤집어져요. 악마 파순(波旬)을 제 얼굴 앞에서 보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꼭 불교를 믿어서도 그런 게 아니고 믿지 않았다 해도 똑같았을 거에요. 저는 제국의 폭력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그저 살고 싶지 않은 것이고 그게 제 본능입니다. 이 폭력의 근원이 자본체제의 이윤추구라는 걸 아니까, 이 본능상으로 사회주의 할 수밖에 없어요. 고귀한 ‘선택’도 아니고 그저 본능대로 사는 것뿐이죠. 그래서 고깃덩어리라는 업보를 계속 지고 있는 한, 이 사회주의라는 말을 계속 화두로 삼아 사는 겁니다.

    치료행위와 교환논리

    위에서 이야기했지만, 저는 자본주의적 세계라는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환자들이 집단적으로 언젠가 다 완쾌되리라 확신하지도 않아요. 굳이 확률을 따져보면, 환자들끼리 불놀이하다가 대형 화재로 이 병원 전체가 전소될 확률은 더 높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고깃덩어리가 여기에서 서식하고 있는 이상, 고깃덩어리에 붓고 있는 식음에 대한 감사의 뜻에서라도 초보적 차원이라 해도 ‘치료행위’를 계속 시도하는 게 ‘교환논리’상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영원불변의 도덕론을 별로 믿지 않아요. ‘나’의 고깃덩어리로서 필요하고 또 다른 고깃덩어리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복수의 상대자들과 성관계를 맺는 것도, 배고픈 사람으로서 빵을 훔치는 것도, 아프간에서 미군 폭격으로 모든 가족을 잃어 고아가 되는 사람이 무기를 들고 빨치산이 되는 것도, 저는 꼭 ‘죄악’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상황적, 역사적 도덕논리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영원불변의 원칙이 있다면 그게 ‘호혜성’의 원칙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받는 만큼 세상에 베풀라는 건 바로 이 원칙의 연장선상에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옛날 스님네들이 이야기했던 ‘재시(法施)와 법시(財施)의 교환논리’이기도 하죠.

    그런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어쩌면 법화경을 강독하는 것보다, 만델 선생의 <후기 자본주의> 강독은 요익중생(饒益衆生, 널리 중생에게 이익이 되게 하다-편집자)의 차원에서 더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불교는 전쟁과 같은 현상들을 개인적 심성의 차원에서 설명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이를 보충하여 집단의 차원에서 현대적 살육의 기원과 살육을 종식시키는 방법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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