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학에서 조선의 무정부주의로
        2010년 06월 25일 11: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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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主義)의 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주의가 되자

    ‘문명개화’를 내걸고 서양문명의 수입을 지상의 과제로 한다면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 합리화하는 논리가 횡행하였다. 그런 주장자들은 앞 다퉈 일본 유학길을 떠났고,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 사상을 가지고 들어와 보따리 장사처럼 풀어놓았다.

    그러한 것들을 신문명, 신학문, 신문학, 신소설, 신문화라며 조선은 그것들을 배우고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왜? 그런 것들을 배워야 조선이 근대화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상이 넘쳐나고 사상계가 풍요로워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 강점이 현실화한 속에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무엇인지는 따지려 하지 않았다.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은 없었다. 오로지 자신들이 가지고 들어온 사상을 들먹이며 지적 만족, 지적 유희를 즐길 뿐이었다. 민족의 현실은 외면당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지식인을 자처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이와 달리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고, 백성을 계몽하기 위한 지식인들의 활동도 활발히 일어났다. 이들 중에서 신채호의 활동과 사상은 철저하고 과감하였다.

       
      ▲ 단재 신채호

    신채호(1880년~1936년)는 고난의 일생을 살았다. 그와 항일운동은 떼려야 뗄 수 없고, 그의 사상은 이런 투쟁 속에서 형성되고 심화되었다. 그는 일본이 침략하였기에 이에 맞서는 민족 투쟁을 하였다. 문명개화를 내세워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자들에 맞서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다.

    국권을 상실하자 신채호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무장운동 단체들과 손을 잡으면서 투쟁의 사관을 정립하였다. 조선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혁명의 사상을 내세우며 독립의 쟁취에 일생을 바쳤다.

    조선이 외국에 문호개방을 한 이후 무수히 많은 서양사상이 밀려 들어왔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들이 우리의 사상을 풍부하게 하게 하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채호는 서양사상의 무분별한 수입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규탄과 탄식을 하였다.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主義)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 <낭객의 신년만필>

    신채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사상 자체가 아니라 조선이었다. 달리 말하면 조선을 되살릴 수 있는 사상이었다. 그것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자아의 발견이요 자아의식의 정립이었다. 그것은 근대 사상의 요체이기도 하였다.

    아와 비아의 투쟁

    신채호는 충청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하였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박사가 되기도 하였다. 박사가 되던 그해인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그것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일본이 조선의 내정을 간섭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명목상 국가일 뿐,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식민지화하였다.

    신채호는 즉각 유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항일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국민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필봉을 휘둘렀다.

    일본의 침략에 맞선 투쟁 속에서 신채호는 자아(自我)의 개념을 발견하였다. 그는 일본의 침략과 통치라는 비아(非我)가 힘으로 자아를 억누르므로 자아는 이에 맞서 투쟁을 전개한다는 사상을 창조하였다. 그것은 자신의 투쟁 경험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무엇을 아(我)라 하며 무엇을 비아(非我)라 하느뇨. 깊이 팔 것도 없이 얕게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아라 하고 그 외에는 비아라 하나니, 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아라 하고, 영국 ․ 러시아 ․ 프랑스 ․ 미국 등을 비아라 하지만, 영국 ․ 러시아 ․ 프랑스 ․ 미국 등은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을 비아라 하며, 무산계급은 무산계급을 아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 등을 비아라 하지만, 지주나 자본가 등은 각기 제 붙이를 아라 하고, 무산계급을 비아라 하며,

    이 뿐 아니라 학문에나 기술에나 직업에나 의견에나 그 밖에 무엇이든지, 반드시 본위인 아가 있으면, 따라서 아와 대치한 비아가 있고, 아의 중에 아와 비아가 있으면, 비아 중에도 또 아와 비아가 있어,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번극할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탈투(奪鬪)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사회의 활동이 휴식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나니,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 <조선상고사 총론>

    신채호는 유학을 공부하였다.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중국에서 들어온 변법자강론을 공부하였다. 법과 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통해 국가를 발전시키자는 이론이었다. 또한 그는 중국에 망명하여서는 무정부주의,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였다.

    따라서 그의 ‘아와 비아의 투쟁’ 사상은 이러한 여러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동양사상으로부터 음(陰)과 양(陽)의 투쟁을 배웠고, 서양사상으로부터 변증법을 배웠다. 그러나 신채호에게 중요한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사상 자체가 아니라 조선을 위한 사상이었다.

    대립하는 음과 양 중 자신은 어느 쪽에 속하는가. 대립하는 정(正)과 반(反) 중 자신은 어느 쪽에 속하는가. 자신이 속한 쪽이 ‘아(我)’이고 그렇지 않은 쪽이 ‘비아(非我)’이다. 신채호는 이렇듯 자아를 중시하고 식민지 현실을 타파하고자 하는 자신의 철학을 세웠다.

    국권 상실은 자아의 상실이다. 상실된 자아를 찾는 게 시대적 과제이다. 자아는 비아(非我)가 있음으로 비로소 자아가 된다. 자아는 비아와 맞서는 투쟁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본 모습을 회복하게 된다.

    신채호의 철학은 조선 일국 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세계의 역사가 아와 비아의 투쟁이 기록이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문, 기술, 직업에서도 아와 비아의 투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하였다. 그 투쟁의 양상에 따라 역사의 변화, 발전의 모습이 달라지고, 학문과 기술 그리고 직업에서의 내용 역시 다르게 된다.

    아 안에 있는 아와 비아의 투쟁

    신채호는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고 서술하였다. 그는 조선의 역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자아를 발견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민족이란 개념을 정립하고 조선의 역사를 민족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서술하고자 하였다. 그는 <독사신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국가의 역사는 민족 소장(消長) 성쇠(盛衰)의 상태를 열서(閱叙)할 자라. 민족을 사(捨)하면, 역사가 무(無)할지며, 역사를 사하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부대(不大)할지니, 오호라 역사가의 책임이 기역(其亦) 중의재(重矣哉)인저.

    국가의 역사란 민족의 흥망성쇠를 기록한 것이니, 민족이 없으면 역사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역사가 없으면 민족이 국가에 대해 가지는 관념도 크지 않다고 했다. 따라서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가의 역할이 매우 무겁다고 했다.

    신채호는 망명지 중국에서 투쟁과 역사 연구를 병행하였다. 그는 역사 연구를 통해 민족사의 관점에서 역사의 흐름을 새롭게 인식,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묘청의 난에 대한 해석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서경 전역을 역대의 사가들은 다만 왕사(王師)가 반적(反賊)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그 실상은 이 전역이, 즉 낭(郞) ․ 불(佛) 양가(兩家) 대 유가(儒家)의 전(戰)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전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전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전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이었던 것이다. 이 전역에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하였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 ․ 보수적 ․ 속박적(束縛的) 사상-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사건>

    묘청의 난을 왕사였던 묘청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으로 이해했던 기왕의 역사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낭(郞) ․ 불(佛) 양가(兩家), 국풍파, 독립당, 진취사상과 유가, 한학파, 사대당, 보수사상이 맞붙은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이 전쟁에서 전자가 패하고 후자가 승리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후의 조선의 역사는 사대적, 보수적 유교사상이 지배하게 되었다. 신채호는 이 전쟁의 승패로 인해 우리 민족이 축소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 해석은 그가 살았던 동시대의 문제와 연관된다. 그는 우리 민족 내부에 있는 비아(非我)를 비판하고 그것과 투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그의 의도는 <조선혁명선언>에서 드러난다.

    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 대신에 일본에 대해 참정권, 자치권을 요구하거나 문화운동을 일으키자고 제창하거나 외교론, 준비론을 주장하는 세력들을 강력하게 규탄하였다. 그들이 우리 민족 내에 있는 비아인 것이다.

    신채호는 그들을 비판하고 그들과의 투쟁을 선언하면서 조선의 독립은 오로지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면 이 혁명을 담당할 우리 민족 내부의 ‘아(我)’는 누구인가. 그는 조선혁명운동의 주체가 민중임을 선언하였다. <조선혁명선언>의 내용을 보자.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이상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이 선언이 쓰여진 것은 1923년이었다. 신채호는 유럽의 혁명들은 물론 러시아혁명도 연구를 하였다. 그러한 혁명들은 지배집단이 변경되는 것일 뿐, 그 지배집단에 의해 인민이 지배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 하였다. 신채호는 새로운 혁명은 그 성격을 달리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일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 고로 민중혁명이나 직접혁명이라 칭함이며, 민중 직접의 혁명인 고로 그 비등 팽창의 열도(熱度)가 수자상 강약(强弱) 비교의 관념을 타파하며, 그 결과의 성패가 매양 전쟁학상의 정궤(定軌)에 일출(逸出)하여 무전무병(無錢無兵)한 민중으로 백만의 군대와 억만의 부력(富力)을 가진 제왕도 타도하며 외구(外寇)도 구축하나니, 그러므로 우리 혁명의 제1보는 민중각오의 요구니라. – <조선혁명선언>

    다가오는 혁명은 민중의 직접 혁명이라고 말한다. 민중이 비록 돈도 없고 군대도 갖추지 못했지만, 주체가 됨으로써 백만 대군도 억만금을 가진 제왕도 타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신채호는 민중혁명이 파괴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는 다섯 가지를 파괴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족통치(異族統治), 특권계급, 경제 약탈제도, 사회적 불평균, 노예적 문화사상이 그것이다.

    그는 그 다섯 가지를 파괴한 이후에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자고 주장한다. 당시의 민중적, 민족적 요구를 집약한 것이었다.

    그의 민중혁명 사상에는 극단적인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암살, 파괴, 폭동 등 ‘폭력’만을 혁명의 수단으로 강조하였다. 그가 폭력을 강조한 이유는 그것이 민중 각오의 수단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중이 두려움 없이 혁명의 길로 나서게 하기 위해 일본의 조선 지배 기구, 친일인사에 대해 파괴와 암살을 하자는 것이었다.

    일본의 엄혹한 지배에 맞서는 투쟁 방법으로 ‘폭력’을 선택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 이외의 투쟁 방법을 배제하였다는 데에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의 주장은 참정권, 자치권 등 그가 비판했던 세력들이 번창하는 데 대한 일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망명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에 대해 살피지 못한 경험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신채호의 질문

    1928년, 49세의 신채호는 대만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독립운동가가 당하게 되는 수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었다.

    감옥에 구류되어 주리, 가세, 단근질, 채찍질, 전기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수족을 달아내는, 콧구멍에 물 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사전에도 없는 갖은 악형을 다 당하여 죽거나, 요행히 살아서 옥문을 나온대야 종신 불구의 폐질자가 될 뿐이라. – <조선혁명선언>
    자신이 쓴 대로 그는 체포된 후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그는 살아서 옥문을 나서지 못했다. 8년간의 감옥살이 끝에 1936년 여순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신채호는 유학자로 시작하였으나, 식민지화하는 조선의 현실에 직면하여 이른바 안빈도락의 유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항일운동의 한 길을 걸었다. 조선의 불행한 현실이 사대적, 보수적 유학의 신봉에서 비롯되었다 생각하여 유학을 포기하고 새로운 사상을 찾았다.

    그는 사상을 위한 사상이 아닌 철저히 조선을 위한 사상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그의 철학하는 자세는 다음과 같은 공판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내가 본시 무정부주의 연맹을 조직할 때 어떤 책을 보고 동기가 되었다고 하나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니고, 현 제국주의제도에 불평과 약소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단행한 것이다.

    그는 여러 사상을 배우기는 하였으나 그것들을 소화하여 창조적인 사상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아(自我)’를 발견하여 자신의 철학의 기초로 하였고, 이를 민족과 민중에 적용하였다.

    그의 철학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망명지에서의 불안한 생활과 하루하루가 투쟁의 연속인 생활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측면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요약되는 그의 철학은 폐쇄적, 국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이 아(我)이고 다른 국가들이 비아(非我)이지만, 다른 국가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아이고 조선이 비아라고 하여 상대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배타적 민족주의를 뛰어넘어 상대적이고 보편적인 세계 질서를 위한 시각을 제공하였다고 할 것이다.

    신채호의 철학하는 자세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경종이 되고 있다. 그가 근 100년 전에 던진 다음과 같은 질문에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라 답변할 수 있을까.

    오늘 이후는 서구의 문화와 북구의 사상이 세계사의 중심이 된 바, 아 조선은 그 문화사상의 노예가 되어 소멸하고 말 것인가? 또는 그를 저작(咀嚼, 음식물을 씹음)하며 소화하여 신문화를 건설할 것인가? – <조선상고사 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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