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루먼 "핵실험 했거든", 스탈린 "알거든"
        2010년 06월 24일 08: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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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츠담 회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스탈린, 루즈벨트, 트루먼(왼쪽부터) (사진=미국국립문서보관소)


    미국, 핵 보유 후 전혀 다른 모습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전후 질서를 구상하면서 핵보유 ‘이전’과 ‘이후’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는 전후 질서 형성의 중대 분수령이었던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 임한 미국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핵실험 5개월 전인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 미국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두 가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나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재무장을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 미국 내 고립주의 분위기를 감안해 대규모의 미군을 유럽에 장기간 주둔시킬 의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루스벨트의 태도를 두고 60년 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얄타 회담을 2차 대전의 발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는 ‘뮌헨 회담’에 비유하면서 맹비난을 가했을 정도로,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얄타 회담을 대표적인 굴욕외교의 사례로 본다.

    그러나 미국이 얄타 회담 5개월 후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미국의 태도는 확 바뀌게 된다. 상당 기간 핵독점을 자신했던 미국은 소련과의 협력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유럽 방어 전략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고 자신했다. 독일의 재무장과 관련해서도 미국이 핵무기를 갖게 됨으로써 독일이 또 다시 도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미국은 포츠담 회담에서 핵 강압 외교의 서막을 올렸다.

    인류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가 단행되기 하루 전인 7월 15일.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이른바 ‘빅 3’, 즉, 자신과 스탈린, 그리고 처칠과의 회담을 위해 독일 베를린 인근 포츠담에 도착했다. 독일 항복 70일 후, 그리고 일본의 패망이 확실해지던 시점이었다. 이 회담은 유럽의 전후 처리와 태평양 전쟁에 대한 연합국의 대한 공동 대응 방안,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논의하는 중차대한 자리였다.

    스탈린의 승승장구

    그러나 트루먼의 마음 한쪽은 최초의 핵실험이 예정된 미국의 뉴멕시코 사막에 가 있었다. 그는 16일 전쟁부 장관 스팀슨(Henry Stimson)으로부터 핵실험이 “예상을 뛰어넘는 만족스러운 결과”였다는 보고를 받고 안도했다. 트루먼을 수행한 스팀슨은 처칠에게도 핵실험 사실을 알렸다.

    핵실험 이틀 후인 18일에 트루먼은 보다 상세한 보고를 접했다. 화구(fire ball)의 섬광은 400km 떨어진 곳에서도 목격됐고, 그 굉음은 80km까지 울려퍼졌을 만큼 엄청난 폭발력을 보였다는 것이다. 엄청난 신무기의 등장에 고무된 트루먼은 포츠담 회담에서 스탈린을 압박하는 카드로 핵무기를 선택했다. 핵 강압 외교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인류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의 장면 (사진=미국 에너지부)

    이처럼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국이 독일이나 소련보다 핵무기를 먼저 손에 넣은 것은 1943년 1월 소련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격퇴해 유럽 전선의 전세를 뒤집은 것과 비견될 정도의 ‘전환기적 사건’이었다. 적어도 미국은 그렇게 믿었다.

    1941년 6월 히틀러의 소련 침공부터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개시된 1944년 6월까지, 소련은 독일과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다. 이 기간 동안 독일군의 사상자는 420만명에 달했는데, 이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의 독일군 사상자의 13배에 달하는 수치이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전세를 뒤집는데 성공한 스탈린은 동유럽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대규모 상륙작전 단행을 미뤘고, 이 사이에 스탈린은 승승장구했다. “스탈린이 지하 벙커를 떠나 루즈벨트와 처칠을 만나러 갈 생각을 하고, 또한 테헤란 회담(1943년 11월)에서 발언권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지정학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스팀슨의 고민, 트루먼의 화답

    마찬가지로 트루먼은 ‘절대반지’를 손에 넣는 것이 미국의 발언권을 강화해 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질서를 짜는데 미국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생각했다. 트루먼은 “히틀러나 스탈린이 핵폭탄을 개발하지 못한 것은 세계를 위해 정말로 좋은 일이다. 핵폭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무기이지만, 가장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7월 25일 일기장에 썼다.

    핵무기 개발 이전까지 미국은 일본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핵무기 개발 성공으로 소련의 개입 없이도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이다.

    또한 미국은 핵무기를 소련에 대한 압박 카드로 인식했다. 미국의 핵무기 개발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앤소니 에덴 영국 외무장관과 미 육군 참모총장이자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조지 마셜(George Catlett Marshall) 등 고위 인사들을 만나고 돌아온 스팀슨은 5월 14일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섰다.

    “(미국의 핵무기 보유에 따른) 현재의 상황은 우리가 모든 카드를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핵무기를)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라고 불렀는데, 우리는 이 카드를 가지고 바보같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 러시아인들은 우리의 도움과 산업 없이는 살아갈 수 없고, 우리는 유일한 무기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날 일기장에는 “대통령께서 7월초에 스탈린과 처칠을 만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 문제”라며, “우리의 손에 마스터 카드가 없는 상태에서 외교적으로 그와 같은 중대한 사안을 두고 게임을 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라고 적었다.

    트루먼은 스팀슨의 고민에 화답했다. 그는 5월 21일 전 소련 주재 미국 대사인 조셉 다비에스(Joseph Davies)를 만난 자리에서 ‘빅 3’ 회동 연기 의사를 피력했다. 다비에스는 “트루먼이 미국의 핵무기 보유 정보에 대해 함구를 요청하면서 당초 핵실험이 6월로 예정되었으나, 7월로 연기되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트루먼과 스팀슨은 보름 후에 만나 ‘빅 3’ 회동에서 마스터 카드를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한 합의를 이뤘다.

    트루먼은 스팀슨에게 포츠담 회담을 7월 15일로 연기했다고 알려줬는데, 이에 대해 스팀슨은 “핵실험이 또 다시 연기될 가능성이 있다”며, 스탈린과의 회동은 반드시 핵실험 이후에 해야 한다고 주문했고 트루먼도 이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절대무기’를 손에 넣은 미국은 한 쪽 눈으로는 교전국인 일본을, 다른 한 쪽 눈으로는 전시 동맹국인 소련을 응시한 것이다.

    스탈린, "난 네가 지난주에 한 일을 알고 있다"

    포츠담 회담에서 ‘빅 3’ 사이의 최대 이견은 동유럽 문제였다. 스탈린은 영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그리스에 개입하지 않을 테니, 미국과 영국도 발칸반도와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그 지역에 있는 국가들에게 자유선거를 비롯한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맞섰다. 또한 폴란드의 정부 구성 및 자유선거에 대해서도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이른 시일 내에 선거를 치르기로 했다”는 모호한 합의만 이뤘다. 이 밖에도 독일 다뉴브 강과 수에즈 운하 처리, 소련의 독일에 대한 배상 청구권, 이탈리아의 유엔 가입 등을 놓고도 이견이 표출되거나 모호한 합의에 머물렀다.

    트루먼의 강경한 태도는 루스벨트가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했던 것과는 분명 달라진 모습이었다. 미국의 핵무장 성공이 미국 외교정책을 ‘혁명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입증하듯, 제임스 번스(James Byrnes) 국무장관은 얄타에서 양해했던 사항, 즉 독일에 전쟁배상금 200억달러를 물리고 그 절반을 소련의 전후 복구에 사용하기로 한 내용을 포츠담에서는 없었던 일로 해버렸다. 이러한 미국의 자신감은 핵실험 성공으로부터 나왔다.

    포츠담에서 핵실험이 대성공을 거뒀다는 보고를 받은 트루먼은 “매우 고무되었고, 이는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자신감을 주었다”고 스팀슨은 회고했다. 스팀슨은 또한 트루먼에게 8월초에 우라늄 핵폭탄 사용 준비가 완료될 것이라고 보고했고, 처칠에게도 트리니티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에 처칠은 “트루먼이 스탈린에게 강경하게 나온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며, “스탈린에게 물러서지 말 것을 트루먼에게 요청”했다. 트루먼도 “나는 적절한 시점에 스탈린에게 맨해튼 프로젝트를 말해줄 것”이라고 화답했다.

    신무기의 등장과 자신의 보좌진 및 처칠의 권고에 고무된 트루먼은 7월 24일 저녁 스탈린에게 다가가, 미국은 “전례없는 파괴력을 갖춘 새로운 무기”를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바로 원자폭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스탈린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에 현명하게 사용해 달라”고 당부했다. 어찌된 영문이었을까? 스탈린은 1942년부터 스파이를 통해 미국과 영국의 공동 핵무기 개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련 스파이들의 활약

    당시 미국 정부는 소련의 스파이 활동을 경계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인 그로브스(Leslie Groves) 장군은 1945년 4월 중순 트루먼에게 맨해튼 프로젝트를 보고한 자리에서 “러시아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상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 첩보 활동을 하고 있지만, 우리의 육군 특수 방첩대와 연방수사국(FBI)이 면밀히 감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빈 구멍은 그로브스의 장담보다 훨씬 컸다. 맨해튼 프로젝트 초기부터 여러 명의 미국 및 영국 국적의 과학자들이 소련의 첩자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츠담에서 트루먼의 원자폭탄을 이용한 강압 외교가 어떤 성과를 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미 미국의 핵실험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트루먼이 전시 동맹국인 자신에게 10일이 지나서야 이를 알려준 것에 대해 대단히 불쾌해 했다. 스탈린은 포츠담 회담을 거치면서 미국이 핵무기를 자신에 대한 협박 수단으로 동원하기로 한 것을 간파했고, 이에 맞서 소련 과학자들에게 핵개발을 서두르라고 다그쳤다.

    이후 핵무기를 ‘절대 무기’이자 ‘강압 외교’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미국의 ‘핵 숭배주의’는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고, 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 그리고 한국전쟁에서의 핵 공격 위협으로 가시화됐다.

    이에 맞서 스탈린은 미국의 핵독점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핵 개발을 가속화하는 한편, 한국전쟁을 냉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기회로 활용하려고 했다. ‘공동의 적’인 나치 독일과 일제가 패망하자 트루먼과 스탈린은 동지에서 적으로 바뀌었고, 해방을 맞이한 한반도는 분단이 강요되면서 두 강대국 정치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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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참고 자료

    데이비드 레이놀즈 지음, 이종인 옮김, 『정상회담: 세계를 바꾼 6번의 만남』(책과함께, 2009).
    John Lewis Gaddis, The Cold War: A New History,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05),
    Gar Alperovitz and Kai Bird, "The Centrality of the Bomb, Foreign Policy (Spring 1994).
    Barton J. Bernstein, "Truman At Potsdam: His Secret Diary," Foreign Service Journal, July/August 1980.
    인용한 미국의 비밀해제문서 사이트: http://www.gwu.edu/~nsarchiv/

    *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 이 연재는 정욱식의 블로그 ‘뚜벅뚜벅’에서도 함께 진행됩니다.(http://blog.ohmynews.com/wooksik) 최근에 쓴 책으로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가 있습니다. 다음에 이어질 글은 ‘미국의 원폭 투하, ‘신의 축복’인가 ‘대량살상 외교’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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