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핵숭배'와 세계대전 갈림길
    2010년 06월 23일 08: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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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를 상기하자’는 구호가 뜨겁다. 2010년으로 한국전쟁이 60주년을 맞이했다는 ‘시간’,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한 이명박 정부의 등장이라는 ‘국내 정치’, 앞다투어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기사를 내보내고 있는 ‘언론’, 북한의 핵무장 시도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악화일로를 걸어온 남북관계 및 천안함 침몰 여파로 파국 위기를 맞이한 ‘민족 문제’ 등이 중첩된 결과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6.15 공동선언 10주년과 남북한이 사상 최초로 동반 진출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을 계기로 남북관계를 발전시키자는 목소리는 ‘6.25’와 ‘대~한민국’이라는 구호에 묻히고 말았다.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의 정치와 교훈의 추출은 천차만별이지만, 이 전쟁이 전지구적 파급력을 야기하면서 세계 현대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2차 대전 승리의 주역인 미국과 소련은 세계대전이 끝나자 서로를 두려운 존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당시의 버섯구름

한국전쟁 이전까지 소련은 ‘원자폭탄’을 앞세운 미국의 침공 가능성을 우려했다. 거꾸로 1949년 8월 29일 소련의 핵실험과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선포가 이어지면서 미국 내에서는 ‘적색 공포’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 지도자들은 소련의 위협을 ‘가상’에서 ‘현실’ 수준으로 격상시키면서 소련과의 3차 세계대전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동아시아 지정학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일본-미국으로 한편으로 하고, 북한-중국-소련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진영간의 대립 구도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격화되었고, 휴전선은 한반도의 ‘분단선’이자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선’으로 굳어져갔다.

미국은 서독의 재무장과 나토의 대대적인 군비증강 등 대소 봉쇄정책을 강화했고,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동유럽에 대한 직접 개입을 강화하면서 맞불을 놓았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처칠이 1946년에 말한 ‘철의 장막’을 전지구적으로 확대시켜 놓았고, 서로를 절멸시킬 수 있는 핵 군비경쟁에 기름을 부었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냉전 여명기의 모순을 고스란히 반영시킨 전쟁이자, 냉전을 고착화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시험대에 오른 조지 오웰의 예언

특히 한국전쟁은 핵무기라는 ‘절대무기’를 보유한 두 슈퍼 파워의 대결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이 원자폭탄 사용을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한국전쟁 당시 미 육군부 차관보와 차관으로 있었던 벤데트센(Karl R. Bendetsen)은 극비 사항이라 자세히 말해줄 수는 없지만, “개전 초기부터 미국은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고, 이와 관련된 “암호명(code name)도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은 조지 오웰이 말한 “평화가 없는 평화의 시대”라는 예언을 시험대에 올려놓은 전쟁이기도 했다. 그는 1945년 10월 19일자 칼럼에서 소련이 수년 내에 핵무기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며, “우리는 몇초만에 수백만의 사람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무기를 보유한 두세 개의 괴물과 같은 슈퍼파워 국가들이 세계를 분단시키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대규모의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줄어들겠지만, 영원히 ‘평화가 없는 평화’의 상태, 즉 ‘냉전(cold war)’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냉전의 여명기에 터진 한국전쟁은 핵전쟁을 포함한 열전(熱戰), 즉 3차 세계대전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전쟁 개시 당시 미국은 약 300개의 핵폭탄과 이를 운반할 수 있는 260여기의 전폭기를 갖고 있었고, 유사시 소련에 집중적으로 사용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전쟁 발발 10개월 전에 핵실험에 성공한 소련도 여러 개의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은 전쟁 초기부터 북한은 물론이고 소련과 중국에도 핵 사용 계획을 검토했고, 전세가 여의치 않자 아시아에 핵 전폭기를 배치하기도 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유럽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김일성과 마오쩌둥을 다그쳐 한국전쟁을 질질 끌었고, 미국과의 핵 능력 격차를 만회하기 위해 원자폭탄 생산을 비약적으로 늘렸다.

아래에 인용한 미국의 역사학자 가디스(John Lewis Gaddis)의 가상 에세이는 ‘글로벌 아마겟돈’의 위험을 안고 있었던 한국전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1950년 12월 2일, 맥아더는 트루먼의 위임에 따라 미 공군에게 한반도로 진군하는 중국군을 향해 5발의 핵폭탄 투하를 지시했다. 핵폭탄이 뿜어낸 섬광과 폭발은 중국군의 공격을 멈추게 했다. 약 15만명의 중국군이 사망했고, 미군과 한국군 포로 상당수도 목숨을 잃었다.

   
  ▲ 한국전쟁 당시의 트루먼과 맥아더. 당시 미 국방부는 한반도 내 접전 지역 및 중국 내륙의 배후기지에 대한 원폭 공격을 검토했고, 맥아더는 가장 강력한 주창자였다.

나토 회원국들은 자신과 상의없이 핵무기를 사용한 미국을 강력히 비난했고, 6개월 전 한국 방어를 위해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무효화하기 위한 결의안을 제출했지만, 미국의 비토권 행사로 거부되었다.

핵 보복에 나서달라는 중국의 압력에 따라 소련은 미국에게 한반도에서 모든 군사행동을 중지하든, ‘가장 심각한 결과’를 감수하든 48시간 안에 결정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12월 4일, 48시간이 지나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륙한 2기의 소련 전폭기는 부산과 인천에 핵폭탄을 투하했다.

이 두 곳은 유엔군 지원의 핵심 거점이었다. 맥아더는 소련의 핵공격이 자신이 행한 것보다 2배 이상의 사망자를 내자, 주일 미공군에게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의 선양 및 하얼빈에 핵폭탄을 투하하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소식은 소련 공군기의 작전 범위에 있는 일본과 유럽국가들의 격렬한 반미 시위를 야기했고,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3국은 나토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미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에 소련의 핵폭탄이 떨어진 뒤였다.”

왜 한국전쟁과 핵무기의 관계를 주목해야 하는가?

본 연재는 한국전쟁과 핵무기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일을 목적으로 한다. 전쟁의 원인과 배경, 전개 과정과 정전 협상,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고착화된 열전을 방불케 하는 한반도 냉전 구조에서 핵무기가 어떤 역할과 비중을 차지했는지, 이 과정에서 핵무기는 정책결정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크게 세 가지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실제로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았지만, 원자폭탄을 둘러싼 정치적·군사적·지정학적 고려와 교전 당사국들 및 그 동맹국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한국전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학문적인 사실이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내용이 국내 연구 성과나 해외 연구 성과가 국내에 소개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당시 핵무기와 전쟁 사이의 상호작용은 북한의 핵무장과 미국의 핵우산 정책이 맞서고 있는 현재와 미래의 한반도에도 중대한 함의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과 핵무기의 관계에 관련해 여러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핵 위협은 존재했고, 존재했다면 그 구체적인 양상은 무엇이었을까? 반면 미국이 개전 초기 북한군에 의해 한반도에서 축출된 위험이 있었고, 북진 이후 중국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무엇보다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직면하고도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은(혹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이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을 제외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단행한 배경에 핵 독점에 대한 자신감이 깔려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반대로 남침 승인과 지원 요청에 신중했던 스탈린이 입장을 바꿔 김일성의 요구를 들어준 데에는 자신의 핵보유 성공이 미국의 개입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미국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감행한 데에는, 자국의 핵 위협이 중국의 개입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미국의 주장대로 미국의 핵 위협이 공산군의 전쟁 의지를 꺾어 휴전협정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일까?

미국의 핵 사용 정책에 남한의 이승만과 북한의 김일성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핵전략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이것이 한반도를 비롯한 지구 지정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한국전쟁 직전 및 그 기간 동안 미국의 정책결정자들과 군 수뇌부는 핵무기에 대해 세 가지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첫째는 미국은 소련보다 확고한 핵 우위에 있었고, 둘째는 핵 우위가 전쟁 관리 수단으로 매우 유용했으며, 셋째는 “자제력과 결단력이 결합된 핵 외교”는 1948~49년 베를린 봉쇄 위기 당시에 입증되어 미래의 위기에도 효과적이라는 판단이었다. 이는 한국전쟁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됐다.

한국전쟁 개입이 유럽 방어 전선을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신속한 개입을 선택한 데에는 핵 전력의 압도적인 우위가 유럽에서 소련의 위협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탓이 컸다.

그러나 미국의 일방적인 핵 우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소련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핵무기와 전폭기 수를 크게 늘렸고, 이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미국 본토가 소련의 핵공격에 취약하다고 인정했고,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53년 1월 소련의 핵 능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고 판단했다. 한국전쟁과 그 이후 대만해협 위기에서 미국의 핵 위협에 노출된 중국도 핵개발에 착수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핵무기를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군사적 수단’이자, 공산군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강압 외교의 수단’으로 간주했다.

당시 육군부 장관이었던 페이스(Frank Pace Jr.)는 트루먼이 1950년 11월 말 기자회견을 통해 원했던 것은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의미보다는 “중국과의 협상에서 미국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뒤이은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미국의 핵 위협이 전쟁을 끝낸 힘이었다고 자화자찬하기에 이른다.

총성은 멈췄지만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핵 위협은 오늘날 한반도와 동북아, 그리고 세계 핵 비확산 체제의 가장 큰 도전으로 일컬어지는 북핵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인 셀리그 해리슨의 지적처럼,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시도는 한국전쟁 동안 미국의 핵 위협과 이후 30년 넘게 남한에 배치된 전술 핵무기에 대한 직접적 대응”이었다는 성격이 짙다. 동시에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단 한 번도 북한에 대한 핵선제 불사용 정책을 채택한 바가 없는데, 이는 한국전쟁이 낳은 미국 군사전략의 핵심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북한의 핵 개발 이후 제기되어온 북한의 ‘핵 게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정확히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했던 일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한미 양국에서는 북한이 한반도 유사시 미군 증원을 저지하기 위해 주일미군이나 미국 본토에 핵 공격 위협을 가할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중국과 소련의 개입을 억제하기 위해 핵 위협을 지속적으로 가했다. 북한이 기습 남침 후 휴전 협상을 제안하고 이 협상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을 이끌기 위해 핵 공격 위협을 가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런데 이 역시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했던 ‘핵 강압 외교’였다.

본 연재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 상황을 다루는 것부터 시작된다. 미소간의 전후 협상 결과 한반도가 분단되어 전쟁의 근원을 잉태시켰다는 점도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 맹위를 떨친 미국의 ‘핵 강압 외교’의 뿌리가 바로 이 시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것이 결사항전을 고수한 일본의 패망을 가져왔다고 인식하고 있는데, 이렇게 굳어진 ‘핵 숭배주의’는 한국전쟁에서 다양한 얼굴로 표출된다는 점도 지적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반도 핵문제의 기원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있고, 우리가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역사적이고 지구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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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 이 연재는 정욱식의 블로그 ‘뚜벅뚜벅’에서도 함께 진행됩니다.(http://blog.ohmynews.com/wooksik) 최근에 쓴 책으로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가 있습니다. 다음에 이어질 글은 ‘핵 강압 외교의 시작: 트루먼과 스탈린, 그리고 포츠담 회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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